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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5년에 세워진 용소막성당 전경. 지붕 경사가 가파른 것은 건축 당시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다. 2. 용소막성당 내부는 고딕 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3. 용소막본당 수녀들과 신자들이 성당 뒷동산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인 풍수원본당(1888년 설립)도 그렇거니와 강원도 세번째 본당인 용소막본당(1904년)을 찾아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성당이 참으로 외진 곳에 있다는 점이다. 근처에 고속도로가 시원스레 뚫린 지금도 한적한 시골에 불과한데, 100여년 전에는 얼마나 구석진 골짜기였을까. 유서깊은 성당이 왜 이런 시골에서 먼저 지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알고 보니 풍수원본당과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즉 병인박해(1866년) 당시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온 몇몇 신자 가족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몰려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용소막(龍召幕)에서 멀지 않은 황둔과 오미 마을에 정착했고, 이들이 용소막을 중심으로 모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용소막이 자연스레 신앙 못자리가 된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에 설립된 많은 본당들과 사연이 비슷하다.
얼마 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용소막성당(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2리 소재)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명소가 됐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가다가 원주 못미쳐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 방향으로 20여분 달리면 신림 톨게이트가 나온다. 거기서 빠져나와 배론 성지쪽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오른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의 종탑을 지닌,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이 쉽게 눈에 띈다. 야트막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 몇 그루에 둘러싸여 있는 용소막성당. 처음 와본 사람들도 전혀 낯설지 않을 만큼 포근한 느낌을 준다.
지금 성당이 세워진 것은 1915년이고, 용소막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은 그로부터 11년 전인 1904년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이가 바로 최도철(바르나바, 1848∼1931년)이라는 인물로, 그의 인생사가 곧 초기 용소막본당사나 다름 없다. 19살 때 병인박해를 만나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신앙을 지키던 그는 풍수원본당 르메르 신부에게서 전교회장으로 임명돼 활발한 전교활동을 벌인다. 1898년 용소막에 정착한 그가 그해 마련한 초가 10칸 짜리 경당은 용소막본당의 실질적 출발이다. 이듬해 오미에 살던 백씨네와 행주에 살던 선씨네가 이주해옴으로써 용소막은 본격적인 교우촌을 이루게 됐고, 1904년 마침내 본당으로 승격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풍수원·원주(현재 원동)본당에 이어 강원도 세번째 본당이 탄생한 것이다.
초대 주임은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파리외방전교회) 신부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지역은 원주군·영월군·평창군·제천군·단양군 등 무려 5개 군이었으며, 공소는 17개나 되었다. 사방 300리에 흩어져 사는 신자 수는 864명. 용소막본당은 프와요 신부와 최도철·최영식 부자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1910년 무렵에는 신자 수 2000여명의 대형 본당으로 급성장했다.
제2대 기요 신부가 시작한 성전 신축 공사는 제3대 주임 시잘레 신부에 의해 마무리된다.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는 가족을 끌고 나와 밤샘 작업을 할 만큼 열성을 보였던 최도철 회장과 신자들이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를 열심히 도운 결과, 공사에 들어간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 마침내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했다.
용소막성당은 지붕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데, 건축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9년 춘천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됨에 따라 용소막본당은 춘천교구로 이관되어 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 관할에 들어갔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주재용 신부 때는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 성당은 공산군 식량창고로 전락했고, 성당 내부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됐을 뿐 아니라 천장도 총탄 세례를 받아 크게 훼손됐다. 성당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랄까.
용소막본당은 1965년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되면서 다시 원주교구 소속이 된다. 이후 용소막본당은 관할 지역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 진출 현상으로 교세가 크게 감소했다. 한때 신자 수 3000여명을 자랑했던 신앙의 요람 용소막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신자 수는 870여명으로, 100년 전 본당 설립 당시 신자 수와 거의 일치한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다. 용소막본당 신자들은 설립 당시 그 마음으로 돌아가 새출발하라는 하느님 뜻으로 담담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