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 본문 이해를 위한 신학적 소고 □
편 집 부
이 글의 목적
이 글은 첫째 주 본문인 마5:13-20과 그에 이어지는 여섯 개의 반제들(21-48)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 또는 율법과 예수의 ‘새’ 계명의 대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마련되었습니다. 믿음과 행위, 율법주의자와 열광주의자의 대립은 초대교회의 현안 문제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행15:1-32; 6:1). 그러므로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해 온 것처럼 ‘인식과 행동’이라는 형식논리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 속에서 이 대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들을 꼽으라면 당연히 바울서신과 야고보서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의 공동체는 양자를 포괄하며 그 대립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바울서신, 특히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믿음’의 진정한 의미와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양자 사이에 숨어 있는 역사적 과정을 재건해 봄으로써 마태복음, 특히 산상수훈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이 글은 박응천 박사가 『복음과 상황』지에 기고했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 바울 구원 신학의 폭넓은 이해를 위하여”라는 글을 주로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일반적 이해
한국의 건전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믿음과 행위가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마음에 있는 바와 행동으로 나타나는 바가 같아야 바른 것이고 또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리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을 그런 관점에서 평가하곤 합니다. 그러나 앎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윤리적 판단을 곧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앎’이라는 개념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를 인식과 행동이라는 형식 논리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식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말에는 이미 양자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더 좁혀 말하면 기독교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는 바울서신의 ‘믿음’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서에 대한 기존 이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구원론은 루터가 찾아낸 ‘이신칭의’의 신학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이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인간의 책임이나 역할은 철저히 부인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가 ‘행함으로도 의롭게 된다’(약2:24)고 말할 때 이는 바울과 정면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혹평했던 것은 이를 잘 반영해 줍니다.
이러한 인식은 불트만 이후 초대교회의 역사 재건을 통해 더욱 확대됩니다. 초대교회에는 크게 나누어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를 받아들인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 공동체⌋와 이방인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헬라 기독교 공동체⌋(행6:1)라는 양대 세력이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주의 형제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보아 왔습니다. 따라서 바울서신과 야고보서는 곧 두 교회의 대립을 반영함으로써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선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의 구원론에 대한 해석이 서로의 강조점을 증폭시켜 결과적으로 각각의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극단적인 견해를 본문에 부여하는 오류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야고보서가 1세기 말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며, 그 저자도 역사적 야고보라기보다는 그의 전통을 이어 받은 후기 기독교 공동체의 한 인물인 것으로 분석합니다. 그렇다면 대략 50년대 초반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 사이에는 대략 30-40년의 시간차가 있는 것이며, 이 기간중 바울 전승을 보존한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와 예루살렘 전승을 보존한 유대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는 사도 바울이 철저한 유대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음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야고보서를 대립 관계로 상정하는 것은 오해이며, 이는 바울의 ‘믿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서신들에 나타나는 어조의 차이는 근본 주장의 차이라기보다 역사적 상황 변화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 - 열광주의자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대 기독교 공동체와 안디옥을 중심한 헬라 기독교 공동체라는 두 입장의 교회들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그 지도권은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곳곳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해야만 하는(갈1:1; 11-24) 불리한 여건에 있었고,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상경해야만 했습니다(행15:2). 그러나 이어지는 역사는 오히려 예루살렘보다 바울 쪽으로 기울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요약되는 초대교회 논쟁사의 핵심은 복음과 율법이었고, 이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정당성이 입증되어 가는 과정으로 정리되어 왔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율법주의자들이라는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는 과정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바울에 대한 바른 이해에 터 하여 마태복음이나 야고보서를 연구해 보면 초대교회에 또 하나의 숨은 세력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울을 잘못 이해하여 행위를 무시하고 믿음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입니다.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주여, 주여’ 하는 자들(마7:21), 그리고 야고보서가 지적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2:17)의 소유자들입니다. 이 열광주의자들의 존재를 고려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믿음’
바울의 믿음을 이해할 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철저한 히브리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틴 루터를 일깨웠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갈3:11)는 하박국 2장 4절의 인용이고, 갈라디아서 3장 6절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는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위의 두 경우 모두 구약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인식 작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의지’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엑 피스테오스⌋ evk pi,stew) 살리라.” 이 말은 의인의 삶의 양식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입
니다. 칠십인역 하박국 2장 4절이 pi,stij(믿음)로 번역하고 있는 히
브리어 명사 ⌈에무나⌋hn"Wma/ 는 ‘믿음’보다는 차라리 ‘신실함,’ ‘꾸준
함,’ ‘성실함,’ ‘확실함,’ ‘진리’라는 뜻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또 창세
기 15장 6절에서 ⌈피스튜오⌋ (pisteu,w ‘믿다’)로 번역된 ⌈헤에민⌋ !ymia/h, 은 ‘신뢰하다,’ ‘믿다,’ 또는 ‘의지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는 어떤 진리 체계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인식 작용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대상 자체를 신뢰하고 삶을 내어맡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동시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며,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야고보서의 행위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이 두 인용문을 통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헤에민⌋)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피스튜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러한 의인의 삶의 양식은 그의 신실함(⌈엨 피스네오스⌋)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믿음을 말하기 위한 근거로 아브라함을 인용한 반면, 야고보서는 같은 아브라함을 행함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약3:21-23). 나아가 23절에서는 갈라디아서와 똑같이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고보서 기자가 갈라디아서 3장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하는데, 여기서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고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믿음이 행함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이지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행위의 파기가 아니라 ‘사랑을 통한 율법의 완성’(갈5:14)입니다. 율법의 행위 대신 사랑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5장 6절에 집약되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여기서 ‘역사한다’로 번역된 ⌈에네르구메네⌋는 ‘행위’를 뜻하는 ⌈에르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한 절 속에 ‘믿음’과 ‘행위’라는 개념이 한데 어우러져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되는 구원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듯이 믿음이란 그 자체가 행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단지 하나의 인식 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양식’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행위’
야고보서에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2장 14-26절인데, 이 본문의 배후에는 믿음과 행함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행함을 무시하면서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즉 마태복음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야고보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언뜻 보면 바울의 신학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행위(⌈에르가⌋)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이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2방 24절은 바울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기보다는 바울보다 후대에 바울의 신학을 극단적으로 또 편협한 방향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인 것입니다.
그 좋은 근거가 2장 8절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과 똑같이 야고보서 2장 8절은 이웃 사랑을 율법의 완성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가 모두 율법의 행위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바울이 ‘사랑의 행위’를 제시하는 반면 야고보서는 ‘자유의 율법’(1:25; 2:12)을 말합니다. 바울이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을 말하듯이 야고보서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야고보서 저자가 바울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또 바울의 ‘믿음’ 개념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는 같은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과 결론 : 믿음 이해의 변천과 마태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최초의 신자들은 자신을 유대교와 구별된 별개의 종교 집단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유대인의 회당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할례를 비롯하여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확장되면서 율법 준수의 의무가 의문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복음을 전파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바울이 제시하는 믿음이 율법의 행위를 부정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행위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를 대체하는 사랑의 행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초기 바울은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해야만 하고 예루살렘 주류 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 소수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바울의 손을 들어 많은 이방인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결국 바울의 복음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되고 예루살렘 교회는 언제인지 모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외부와의 싸움에 전력하는 가운데 내부에는 새로운 문제가 움트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와 반대로 바울의 복음을 극단적으로 이해하여, 믿음과 행함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행함을 무시하면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야고보와 마태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의 공동체는 이 30-40년 과정의 역사를 동시대에 한꺼번에 안고 있는 교회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산상수훈에는 그들을 향한 양면적인 대응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달 첫째 주 본문인 5장 13-16절이나 7장 21절은 ‘주여, 주여’ 하는 열광주의자들을 향한 것이고, 5장 17절로부터 이어지는 여섯 개의 반제들은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마태의 공동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종교개혁 이후 형성된 ‘오직 믿음’의 원리가 서구식 이원론으로 잘못 이해되어 성도들이 믿음과 행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기독교인의 윤리적 성숙의 문제가 강하게 제기되어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상과 담을 쌓고 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거부하는 율법주의적 주장들이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