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수원] 욕구 불만을 이기는 법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1사무 7, - 5ㄴ. 12 - 14ㄱ. 16
† 독서 : 로마 4, 13. 16 - 18. 22
† 복음 : 마태 1, 16. 18 - 21. 24ㄱ(또는 루카 2, 41 - 51ㄱ)
다윗 가문의 요셉은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했는데, 마리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시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기도 한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다.
★ 다윗이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자,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을 축복하신다.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세워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시며 영원히 굳건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 아브라함이 신앙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자식 하나 없는 그였지만, 후손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아버지)이 된 것이다(제2독서).
★ 다윗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 마리아와 요셉의
응답을 통해 실현된다.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에게서,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듣고서 자신의 뜻을
접고 주님께 순명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셉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은 분입니다. 첫 번째는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입니다. 같이 살지도 않았는데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도전을 이겨 나갑니다. 당시 율법에 따라
마리아를 길가에 내던져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지만,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함으로써 사랑하는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 줍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의 잉태가
그토록 믿어 왔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꿈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람과 오붓한 가정을 꾸려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책임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도전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들! 하느님께서 이 아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니 나에게도 그것은 큰 영광이고
보람이겠지.’
그러나 세 번째 도전이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기이며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를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도록 하셨습니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보이는 그 하느님을 요셉 성인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 도전도 이겨 나갑니다.
요셉 성인은 이처럼 끝없는 도전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도전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믿음의 사람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믿음의 사람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사랑합니다.
+성 요셉에게 바치는 기도
○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신 아버지시요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아멘.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욕구불만을 이기는 법
2013년 다해 3월18일 성 요셉 대축일
<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복음 : 마태오 1,16.18-21.24ㄱ
< 욕구불만을 이기는 법 >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 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 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런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 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 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을 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 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한다."
왜 자신이 맞으면 그만이지 어리석은 사람을 이기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자신의 위상
문제이고 자존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리석은 사람을 이겨서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열등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보다 낮아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 불만을
남을 이김으로써 해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기 때 동생이 너무 빨리 태어나서 젖을 일찍 떼게 되면
욕구불만을 지니게 된다고 합니다. 그 욕구불만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괴롭히는데, 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되게 된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겨서 자신의
욕구불만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은 찾게 되는 것처럼, 내 영혼도
만족하지 못하면 외적인 성취나 경쟁, 쾌락이나 돈 등을
긁어모으며 자신의 배고픔을 채우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어렸을 때 채워지지 않았던 욕구가 채워질
수는 없는 것처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무엇으로 유혹했습니까? 바로
빵입니다. 배고픔을 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빵의 유혹을
이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또는 뛰어내려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교만의 유혹도, 세상의 영화를 줄 테니 절을 해
보라는 재물의 유혹도 이겨내셨습니다. 어떻게
이겨내셨을까요? 이미 채워지셨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더 이상 큰 유혹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서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을 유혹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유혹은 나의 욕구불만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유혹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유혹자인 뱀이 아담과 하와가 모든 것에 만족하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것에 대한 불만을 시작으로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만이 모든 것에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더 가져야 당연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수많은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자신이 믿었던 약혼자가 잉태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요셉은 조용히 헤어지려 합니다. 그저
그동안의 관계에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와 혼인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과 온전한 부부가
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쾌락도 요셉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하느님의 어머니를
옆에서 보기만 해도 행복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올라가서는 그 가난 때문에 변변한 호텔 하나
잡아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향하라고 할 때에도
그저 묵묵히 따릅니다. 돌아오라고 할 때도 아무 말 없이
순종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겸손하시어 하느님의 뜻만 따르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3월 한 달 동안 성 요셉 축일을 지내고 있지만
성경에 요셉이 한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가장 말을 많이 한 분들도 한 달 동안 성인을 기리지
않지만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요셉 성인만 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을 드러내실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잊혀져 가도 행복하신 분이셨습니다.
당신을 내세우실 필요가 없으셨던 분입니다. 겸손하여 모든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고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유혹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분이십니다.
굉장한 비만인 여자를 다이어트로 살을 빼게 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도 못 견디고
그 배고픔에 뛰쳐나가서 살을 뺀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방법으로 수술로 늘어진 위를 작게 만들어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루 종일 먹기만 하던 그가 살이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이 먹는다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적게 먹어도 배부른
사람이 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주시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인의 길인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2013년 다해 3월19일 한국교회의 공동수호자
동정마리아의 배필 성요셉 대축일
- 마태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인간적인 시각으로 요셉을 바라보니 참으로 억울하고도
난감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결혼식이 바로 코앞이었겠지요.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차근차근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씩이나 걸리는 결혼잔치에 소요될
물품들도 구입하고, 청첩장도 돌리고, 신혼부부에게
필요한 살림살이들을 하나하나 장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 입장에서 정말이지 가슴 설레는 나날이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리아가 갑자기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인한 잉태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요셉 입장에서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습니다. 이
난감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요셉의
마음은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밤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입니다. 뭐라 변명도 못하는 마리아의
애매한 태도에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착한 요셉이었기에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내리누릅니다. 정말이지 순교자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 선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바닥체험을 톡톡히 하고 있던 요셉,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요셉에게 하느님께서 접근하십니다. 때가 이르렀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남달리 겸손하고 순종적이었던 요셉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잠시 후부터 시작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데 함께 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이제 요셉의 상처는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요셉의 좌절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희망으로 변화됩니다. 요셉 인생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에게는 시작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육화강생 사건 앞에서 요셉이 취한
태도는 정말 의연하고 대범했습니다.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거나 호기심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마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 놀라운
대 사건 앞에 경외하는 마음을 지녔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육화강생 사건이었지만
한결같이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경청과 침묵의 달인이자
순명과 기도의 전문가였던 요셉의 협조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은 무리 없이 진행되어나갔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높으신 분의 선물이니 이에 맞춰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생 시작으로 보고 1살이라는 게 정상
같아 보입니다. 임신부터 인생은 이미 시작된 것, 애벌레가
나비 되는 것보다 더 합당합니다. 임신부터 이미 인간관계가
이리저리 얽히게 마련인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오늘도 수호천사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선물을 세상방식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닐까요? 워낙 높으신 분의 선물이니 이에
맞춰 인생 펴는 것, 참 좋은 거라 봅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오 1,20)”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의로운 사람, 의리
도종환 씨의 시 <따뜻하게 안아주세요>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결혼을 앞둔 약혼녀 마리아를 얼마나 꼭 안아보고
싶었을까요? 요셉은 마리아를 떠올리며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워졌을까요?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마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싶었던 요셉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한 여인에 대한 요셉의 그러한 사랑이
진심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위해 헌신하고
지켜주는 마음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도 충실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들었을 때 요셉은
갈등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 사랑을 끝까지
지키고 싶고,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보호하고 싶은
의리, 또 한편 하느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하느님에 대한
의리, 이 두 의리 사이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요셉은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함으로 하느님의 법을
지키기로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하느님에 대한 의리를
모두 지키고자 했던 요셉을 복음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의리를 지켰던 요셉, 그렇게 따뜻하게
마리아를 안아주고자 했던 요셉이 옆에 있어서 마리아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 김귀웅 신부(서울대교구 중견사제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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