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묘앙에오(無明庵回小)에 대해
14세 때 깨달음을 언뜻 넘보는 체험이 있고부터 23세까지 여러 가지 신비학,
도 등을 섭렵했지만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30세 무렵부터 우발적으로 독자적인 채널링을 시작하여 은하계와 막후 정
보들을 얻었다.
33세에 그것들에 대한 총괄적 결론과 사색의 결과로 생명과 존재에 절망했다.
1992년 2월 17일 우발적으로 대오견성했다.
그후 약 1년 동안 명상센터의 명상가들이나 치료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자
기의 글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거의 모두가 묵살해 버린 가운데 3명의 문하가 생겼다.
1993년 8월부터 그의 지도와 병편이 禪으로 기울고 선문의 본산, 각 지
방 선방의 승려들에게 글을 우편으로 보내기를 계속했다.
그 중에서 문하가 나왔으며 뒤에 그 승려는 대오를 이뤘다. 전통과 형식
에 매달리는 선, 그리고 스승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명상센터와의 마찰
과 반감 속을 흐르면서 그의 글은 지금 많은 명상가과 참선 수행자들에
게 개인적인 편지 또는 기관지의 형태로 전해져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일생동안 단체화, 조직화, 통속적인 사제관계를 거부했다.
1994년 10월 22일 죽었다.
당년 36세 죽은 사람의 직계 문하로 쥬우와 호오장 둘을 남겼다.
행복을 정의하는 것은 철학자나 종교인, 도사가 아닌 당신 한 사람이다.
그러나 행복의<결정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의>가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지침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을 여기에 적어둔다.
당신이<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생각되는 환희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
그것이 행복의 정체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는 것이 귀찮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자아의 소망의 일부는 아니다.
너무나 큰 행복과 환희 속에서, 생사가 무의미할 정도의 기쁨과 안심 속에서
당신 본인이 사라져버리는 것. 그것이 행복의 정체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당신의 손으로 잡는게 아니라,
행복이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한편, 세상에 널려 있는 술집이며 식당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 나온다.
<아! 맛있다. 산다는 건 좋은거야~>
이 <아! 산다는 건 좋은거야~>라는 말과
<아!이제 죽어도 좋다>라는 미소의 차이.
그 하늘과 땅만큼의 긍정적인 질과 차원의 차이를 똑바로 대면하기 바란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신이 행복의 중심에 있을 때뿐이다.
한편, 당신 입에서<산다는 건 좋은거야~>라는 말이 나온다면
당신은 절망적인 불행의 중심에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이 당신에게 있어서 지독한 역설로 들린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모든 게 소멸해도 좋다>라고 내심 생각하는 것만이
당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산다는 건 좋은거야라는 경우는,
좋다고 생각하게 만드는<실로 쓸데없는 외부적인 무언가>가 반드시 거기
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는 당신 내부에 폭발할 것 같은 흥분이 있다.
이 사회가 불행한 인간 혹은 불행으로 가득차게 되면,
자연스러운 쾌락을 넘어서 이상할 정도로
인류가 섹스에 지배되는 원인이 많든 적든 여기에 있다.
에너지의 고조와 그 폭발 속에서 소멸되고 싶다는 소망이
너무나도 지독하게 저질스럽기는 하나 그렇다고 행복이나 깨달음과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좋은거야~라고 당신이 생각할 때는 외부의 즐거운 자극이 있고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당신은 결국<자신이 존재 하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금 죽어도 좋다는 경우는
당신<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의 환희>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눈앞에 항상 죽음이라는 것이 없으면
환희라든가 절대적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해지는 이유이다.
<당신-당신=제로>,
이것이 타오와 선<禪>과 불교의 유일한 공식이다.
당신이 소멸되는게 소원인 (적정(寂靜)의 법열> 속으로 사라지는 게 도(道)다.
그것은 단적으로 깨달음이니 도니 법이니 진리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 단 한 사람을 위한<절대행복>인 것이다.
--속 페허의 붓다...프롤로그...--
첫댓글 에오는 신심이 없이 그냥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죠.
보통 사람들은 이런류의 것을 즐기는데요.
그것을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기도 어렵기는 합니다.
신심으로 가기 전단계에서 필요악이 될수 있는 그런부분이기도 하죠.
이런류에서 빨리 앞으로 전진하지않으면 그냥 그런세계에 갇히게 됩니다.
에오가 아라한의 대오를 한것인지 어떠한 경지인지 그것은 중요하지않아요.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수도 있어요.
아라한이 신심과 상관없이 갈수도 있어요.
속제를 알면 아라한이 되기 때문이죠.
속제를 알면 생사에 벗어나죠.
생사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죠.
연기이기에 그래요.
속제의 환희와 신심의 환희가 둘이 동시에 오는것이 이종신심이죠.
진리에 가까이에 오면 공포가 도사리죠. 낭떨어지에 썩은 밧줄을 붙잖고 있는데 올라갈려고해도 위에는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죠.
보통 사람들은 꿀만 보이고 다른것은 보이지않아요. 삶에 대해서 염오가 생기고 괴로워하죠. 막상 깨닫고 나면 나는 언제나 그자리에 있었을뿐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죠. 나는 항상 극락에 있었고 극락을 보고도 알지못한 것일뿐이죠. 장소가 아니라 신심이었죠. 장소는 속제를 이해하고 좋게 맞추어야한다는 것을 이해하는것이죠. 속제는 환경구축. 진제는 신심. 둘이 있어야지 최적의 상태가 되죠.
속제의 환희는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을때입니다. 연기의 이치란 인과법을 아는것, 둘아닌 하나를 아는것. 신심하나만을 쫓다보면 속제는 덤으로 알아지는것이죠. 마치 호랑이를 그리다보면 호랑이는 못그리더라도 고양이는 나오듯이.. 신심을 쫓다보면 신심을 못얻을수는 있지만 속제는 저절로 알아지는것과 같지요. 처음부터 속제에만 매달리면 열에 아홉은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신심이 극도로 강해지면 속제의 이치를 먼저 알게되고 거의 동시에 속제와 신심을 얻게되죠. 속제또한 부처의 자비로 이루어졌음을 알게되죠. 속제와 진제 모두 부처님의 자비의 세상이고 불국토의 세상이죠. 그래서 속제와 진제는 다르지않고 윤회가 극락인것이죠.
윤회에서 벗어나라.. 아라한이 되라.. 모두 방편일뿐이죠. 모든 중생은 이미 윤회에 벗어나 있고 아라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 신심을 얻었느냐 못얻었느냐의 차이일뿐이죠.
쉽게 얘기하면 중생이 탐진치를 너무 좋아하니 부처는 중생에게 탐진치와 함께한 세상을 만들어버린것이죠. 부처는 소수의 중생을 위한 부처가 아니라 다수의 악인을 위한 부처입니다. 세상이 인과법이기에 악인악과로 계속해서 나쁜결과만이 나오는 악순환만 계속 되는거죠. 부처는 그런 인과법을 거슬리게 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고통을 대신 받아갑니다. 그중에 1%만이 중생에게 악인악과의 괴로움이 찾아오죠. 중생이 선한일을 하면 부처는 더큰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몇만배의 보상이 중생에게 오게하죠.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부처에 있어서 작은노력이죠.
부처가 없다면 연기의 법칙또한 아니게 됩니다. 부처는 진제인 불국토처럼 속제인 윤회도 불국토처럼 만들어 버린것이죠. 그래서 둘아닌 하나의 세상을 만든것입니다. 중생은 연기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는거죠. 인과법인 자인자과 타인타과이나 연기에 의해서 교묘하게 고통이 덜하게 만들어 버린것이죠. 연기가 어려운것은 완전한 인과법이 아니기 때문이죠.
연기에 대해서 완벽하게 중생이 알수가 없어요. 그것은 부처의 자비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심을 얻으면 그냥 그자비로 인해서 중생이 평온해지는구나 아는거죠.
간혹 에오처럼 천재들이 신심없이 연기의법칙을 느낄수가 있어요. 에오같은 이들은 경전을 철저히 독파하지않았기때문에 그것이 부처의 자비인줄은 모르죠. 에오처럼 독각자들은 생사가 둘아닌 하나라고 알고 있기만 하는거죠. 부처의 자비인줄 알고 신심을 느낄때 그행복은 독각자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