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번 국도 외 3편
오시열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 따라 달린다. 동쪽 16번 국도.
그대의 입맞춤이 서성이는 곳. 작은 산등성이 내 마음처럼 누워 있는 곳. 젖꼭지에 나무 한 그루 올려놓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곳. 나무 위에 산새 한 마리가 필릴리 필릴리 우는 곳. 꿈 속 푸르스름한 안개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곳. 억새꽃 하얗게 머리 풀고 우는 곳. 늘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곳. 사글세를 사는 슬픔이 빈 방에 쓸쓸히 앉아 나를 기다리는 곳. 질긴 개민들레 지천으로 피어 있는 곳.
바람이 나를 따라 달리는 길. 동쪽 16번 국도
손톱에 뜬 달
일곱 살 막내의 손톱을 깎는다.
아직 단단하지 않은 조개손톱 끝, 또각또각 경쾌한 리듬 아이의 손톱 조각 하나
초승달로 뛰어 올라 하늘에 걸린다.
달 위로폴짝, 그네 타는 아이. 별과 별의 꼭지점에서 함께 흔들리는 웃음소리.
내가 가졌던 저 짙은 눈망울 안으로총총 들어앉는 별빛
일흔 넘은 어머니의 손톱을 깎던날. 내 가슴 안으로 그믐달 들어와 박혔다.
옹이로 굳어진 겹겹의 세월. 딱, 딱, 힘겹게 깎이는 어머니의 가슴처럼 두터워진 손톱,
깎는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젖은 눈 내 손톱을 본다.
바오밥 나무의 상징처럼 허공으로 자라나는 질긴 뿌리.
이제 적당히 눌려 굳어진 세월의 켜켜, 밀어낸 길이만큼 깎여진 불투명해지는 불혹의 뿌리
다시 아이의 손톱을 깎는다.
아이의 손톱에서 노란 달맞이꽃 퐁퐁 피어난다. 어릴 적, 어머니와손잡고 바라보던….
노란 잠수함을 탄다
그대 곁에 다가갈 수 없는 날, 나는 그대 안으로 노란 잠수함을 탄다.
수심 5m,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미생물의 흔적들로 뿌옇게 흐려질 공간, 오늘 그대 가슴은 아무런 사유의 흔적조차 허락하질 않는다. 한 계절 더디게 자라나는 그의 가슴 속 해조 더미에선 새끼 미역이 가는 줄기를 하느적거리며 아직 가을 속을 헤매고 있다. 줄기 흔들릴 때마다 억새꽃 사이로 보이던 그대의 웃음이 지나가고…. 아직 그대 숨소리 들리지 않아.
수심 10m, 팽팽하던 내 가슴 한쪽 움푹 찌그러든다. 자잘한 자리돔 우루루 몰려와 잠수함 유리벽을 기웃거린다. 뱉어내는 언어들 속에서 그대의 가느다란 숨소리 들려오고…. 숨소리, 작은 기포로 흩어질 때마다 더욱 찌그러지는 가슴. 깊어질수록 모든 색을 흡수해버리고 짙은 우울만 파랗게 남기는 그의 습성처럼 자라나는 저 고요.
수심 20m, 나는 조심스레 잠수함의 등을 켠다. 놀라며 눈을 뜨는 산호들과 그곳을 누비는 까치돔 연은회색의 흔들림. 그대는 은회색의 타이를 매곤 했지. 가슴이 조여올 때마다 붉은 색 산호들의 짙은 눈길이 흔들리고.
30m, 붉은 색 산호들 사이로 부챗살의 산호가 흔들리고 다시 붉은 색 산호 더미, 그 사이로 까맣게 엎드린 전복 하나. 온통 찌그러진 가슴 부여 안고 까맣게 타 들어가는 전복처럼 달라붙은 그리움 하나. …… 위험 신호 들리고, 부상(浮上)당한 나
다시 팽팽하게 부푸는 텅 빈 가슴
바다를 닮은 당신을 찾아
오늘도 당신을 찾아
간간한 바람 맞으며
출렁이는 파도 앞에 앉습니다.
집어등集魚燈을 켜놓은 바다는
당신과 함께 왈츠를 춥니다.
팔락이는 하얀 드레스 사이로
당신은 멀어졌다 다가옵니다.
풍겨오는 당신 체취에
물새는 나선형으로 울고
나는 부르르 떨며 눈을 감습니다.
파도 소리 문득 가까워지고
집어등 불빛만 별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당신은 늘 파도처럼 출렁이다
그냥 부서져 버립니다.
오시열
-제주 출생
-199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노란 잠수함을 탄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