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언 시집 {꽃의 속도} 출간
김재언 시인은 1958년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에서 태어났고, 경남 밀양에서 살고 있다. 2021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밀양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및 도시락挑詩樂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4년 1월 제1회 청도문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김재언의 첫 시집 『꽃의 속도』는 ‘사람을 한’ 시편들로 울창하다. 시인이 극진하게 보살핀 씨앗과 모종은 ‘사람 하여’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시의 숲이 되었다. 거듭 ‘사람 하는’ 생명의 문장들이 악수를 청해오는 유월.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소록소록 초록언어들이 돋아난다.
김재언의 첫시집 『꽃의 속도』는 지혜를 탐구하기 위해 더딘 걸음으로 디뎌간 시집이다. 시적 대상을 포획하여 시세계의 결과물로 빚어가는 언어의 속도는 서두르지 않아서 어깨를 겯고 걷기에 편안하다. 그녀의 내면 사유는 특별히 앞서거나 욕심 부리지 않고 차분하다. 골똘하게 자신을 건져 올린(「손금」) 이번 시집에서 김재언이 추구해온 시적 세계는 시인의 천형으로 연주해가는 언어를 보여준다. 목련화를 주저 앉혀 전설이 된 시인처럼 그녀는 자목련 아래 누워 봄밤의 불씨를 기다린다(「페어웰」). 절망의 순간을 건너고 극한의 고통 끝에서 ‘시’라는 환희를 받을 수 있게 된 그녀. 김재언은 환희의 순간을 온전히 ‘시’로만 완성할 수 있는 천상 시인이다. 김재언은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까지 표현해내려는 시적 이상理想으로 잠재된 세계까지 파고들어 독자와 자신을 위로하고 구원의 빛을 던진다. 언제든 어디서든 시의 언어가 피운 꽃나무들의 걸음에 귀를 기울이며 한 발 뒤에서 겸허하게 발맞추는 김재언. 그녀의 시는 자신이 찾아낸 유려한 언어로 독자를 향한 열림을 꿈꾼다. 김재언의 첫 시집 『꽃의 속도』는 ‘사람을 한’ 시편들로 울창하다. 시인이 극진하게 보살핀 씨앗과 모종은 ‘사람 하여’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시의 숲이 되었다. 거듭 ‘사람 하는’ 생명의 문장들이 악수를 청해오는 유월.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소록소록 초록언어들이 돋아난다. ----배옥주 시인, 애지편집위원
얼음장 갈피 따라 꽃술은 차례로 디뎌갈 것이다
아껴둔 말을 쏟아내듯 주춤거리는 곁가지도 빛에 물들 것이다
에두르다 햇빛 기우는 쪽 이슬 흔들리는 표정으로 나비를 기다릴 것이다 어둠이 열릴 때까지
꽃자루에 매달린 벌레도 앉히고 숨결 바라보며 첫사랑은 향기로 닿을 것이다 열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고 길 멀어도 물어물어 그리움 한잎한잎 디뎌갈 것이다
달빛 깊은 속내 읽어낼 때까지 꽃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 「꽃의 속도」 전문
위 시 「꽃의 속도」는 표제작이다. 꽃을 피우기까지 견뎌야하는 속도는 한잎 한잎 꽃이 겪어가는 생의 과정이다. 꽃이나 삶이나 하루는 차례대로 디뎌가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나아간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바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숨 돌릴 틈 없이 서두르다 허방도 짚고 건너뛰다 엎어지기도 한다. 아무리 흔들려도 온전히 이슬일 수 있도록 꽃은 “어둠이 열릴 때까”지 사유하는 속도 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들을 지나가야 나비도, 첫사랑도 향기에 닿을 수 있다. 꽃은 “달빛 깊은 속내 읽어낼” 때까지 지레 달려가거나 건너뛰지 않고 “햇빛 기우는 쪽으”로 “그리움 한잎한잎 디뎌”갈 것이다. 다음 시편들은 자연의 물질적 상상력과 교감하는 시적 화자의 삶에 대한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가리지 않았습니다 허방은 앉힌 적이 없습니다
걸려 넘어질 때 심장이 쿵쾅거리면 저를 낮춰드릴게요 얇은 귀가 술렁이면 네 개의 맨발로 막아보겠습니다
<중략>
닦을수록 내력이 깊어지는 저를 등지기라 불러주시겠어요 저녁이면 웃음소리를 태워주는 그네가 되겠습니다
부디, 꽃자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나이테를 잊는 일 나무였다면 낮은 숲을 달래고 바람이었다면 유목의 소리를 귀담아 듣겠습니다 - 「의자의 말씀」 부분
목백일홍을 옮겨 심었다 사람 하느라 앓은 몇날 며칠 흐려진 꽃물로 버티고 있다
<중략>
사람을 한다는 건 들숨을 순하게 내뱉는 일 몰아쉬는 나무의 숨이 한 줄 나이테를 늘일 수 있을까
배롱가지에게 휘파람새가 일러주고 있다 자죽자죽 모둠발 앞세우면 짓무른 수피에 흥얼흥얼 새살이 돋을 거라고 - 「사람을 한다」 부분 온전히 대상에게 몰두하는 시에서는 시인의 생목소리가 더욱 잘 들린다. ‘의자’는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들려주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의자의 말씀」에서 ‘의자’의 말씀은 화자의 내면을 대신 전해주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의자가 들려주는 말씀을 듣다보면 숙연해진다. 의자는 자신이 “걸려 넘어”지거나 “벼랑으로 밀”려도 자신을 “낮춰”주겠다거나 “바퀴 달린 낙하산을 펴”주겠다고 공언한다. ‘등지기’가 되어주고 ‘그네’가 되어준다는 의자의 말씀 속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수용하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의자는 자신이 나무였던 근원을 떠올리며 나이테를 잊고 낮은 숲을 달래겠다고 전한다. 때로는 바람이 되어 “유목의 소리”까지 “귀담아 듣겠다”는 1인칭 주인공이다. 의자는 타인을 향해 자신을 희생하는 화자의 긍정적 에너지를 대신 책임지고 있다. 납작하게 낮추고 꽃자리가 되어 세상을 밝히고 싶은 화자의 의지가 의자 이전의 나무였던 근원적인 사유로 드러난다. 「사람을 한다」에서 “사람을 한다”는 건 쓰다듬어주고 싶은 생명의 말이다. 이사를 가도 전학을 가도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려면 쉽지 않다. 더러는 적응하지 못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힘든 시간을 이어가기도 한다. ‘사람을 한다’는 건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실뿌리를 뻗어가는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람 하기’까지 인내하는 시간은 굳세게 버텨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람 한다’는 건 고통을 이겨내고 잔뿌리에 심줄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대견한 일이다. 위 시편들의 진술에서 돋는 새살의 의미를 통해 기다리고 내주고 낮추는 김재언의 시적 세계관을 알 수 있다.
----김재언 시집 {꽃의 속도},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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