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불승(無忍不勝)의 믿음으로(고전4:1-2)
2022.12.11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무인불승(無忍不勝)이라는 말이 있다. ‘인내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번 월드컵 축구에서도 주장 손흥민 선수를 비롯한 우리나라 선수들이 무인불승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주었다.
“등대지기”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말미에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이라는 가사가 있다. 온통 암흑과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에도 등대지기는 극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뎌내며 희망의 불을 밝힌다. 그 희생이 없으면 배들이 운행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 또한 고귀한 무인불승의 모습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무인불승의 정신은 스포츠 경기나 등대 빛을 밝히는 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는 세상일보다 더욱 더 영적인 무인불승의 믿음이 필요하다. 어두운 바다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이 땅(우리나라, 동네, 가문 등)에도 무인불승의 믿음을 가진 거룩한 등대지기들이 필요하다. 먼저 믿은 성도들이 바로 그 사람이며, 교회는 등대와도 같다. 특히 거룩한 직분을 맡은 일꾼들은 더욱 그렇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러한 영적인 등대지기 열 명이 없어서 망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나 지금이나 무인불승의 믿음으로 진리의 빛을 비추는 등대지기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도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일꾼이 부족하다. 그래서 주님은 일꾼이 없음을 한탄하시면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마9:35-39).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9)
주님의 일에는 많은 고난이 따른다. 때로는 내 마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불이익을 당하기도하고, 비난의 말을 듣기도하고 심지어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일의 성과가 빨리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조급해지고(이런 경우 대부분 사람들의 입이 문제), 이로 인해 자신을 한없이 질책하기도 한다. 그래서 격려와 용기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 그 어떤 일이든지를 막론하고(세상일이든, 교회일이든) 격려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무리 옥토라도 햇볕만 계속되면 사막이 되어 버리듯이 고통과 어려움의 상황들이 지속되면, 아무리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도 그 마음이 삭막해 진다. 영적인 피로감이 쌓이고, 지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매년 연말이나 총회가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다 집어 치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것은 교회일이나 동네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목적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하면, 비난 들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결정이 주님께서 부족하고 흠 많은 나(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세워 주셨고, 성도의 한 사람으로 불러주신 목적은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나를 일꾼으로 불러주신 분이 누구이고,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 속에서 깨닫는다면, 우리는 무인불승의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는 마음의 큰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이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한 말들은 우리들 큰 의미가 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4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이 말씀을 보면,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직분자들은 더욱)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는 자들이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페레타스(ὑπηρέτας)’인데, 그 뜻은 ‘배 밑창에서 노젓는 사람’이다. 1세기 로마제국 시대에 전투선의 배 밑창에서 노예나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이고, 온 몸이 벗겨진 상태에서 북소리에 맞춰서 노를 저었다.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 벤허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휘페레타스가 되어서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모습이 나온다. 노젓는 노예들은 질문도 할 수 없다. 오직 북소리에 맞춰서 죽도록 노만 저으면 된다. 그런데 그 전쟁이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면, 그 노예들도 공로자로 인정을 받고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을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또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οἰκονόμος μυστηρίων,오이코노모스 뮈스테리온)”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나 관리인’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비밀이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영하심 즉 구원의 비밀을 말한다. 이 비밀의 정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이 말씀처럼 모든 성도들은 특히 직분을 받은 분들은 더욱 더 그리스도의 일꾼(휘페레타스, 교회라는 구원방주의 밑창에서 노젓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비밀(뮈스테이온) 즉 복음을 위해 청지기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어느 날 노 젓는 노예들이 전쟁에 승리하는 날 자유인이 되는 기쁨을 누리듯이, 비록 지금은 우리들이 주님이 맡기신 사명과 직분들 감당하는 일에 큰 고통이 따르고 힘들지만, 훗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을 깨닫고 승리의 그날은 반드시 온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이 가져야할 자세가 바로 충성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다(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충성이 무엇인가? 충성이란 이처럼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내 인생을 거는 것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씀은 쉽게 말하면, 지금은 지금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하고, 왜 배 밑창에서 노를 저어야야 하고,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쯤 왔는지 다 알 수도 없고, 이해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노젓는 일에 내 인생을 걸라는 말씀이다. 언제까지?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이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내이다. 그렇기에 영적인 무인불승(無忍不勝)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견뎌내고 이겨내는 것이다.
예전에 어미 곰과 아기 곰이 눈 덮인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가 미끄러지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이 동영상에 보면, 아기곰은 여러 번 미끄러지기를 반복했지만, 포기가지 않고 다시 도전해서 결국은 어미 곰이 기다리고 있는 언덕에 오른다.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주님의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고자 할 때, 얼마든지 수 없이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는 고통이 따를 수 있다.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의 길을 넓은 길이라 하지 않고, 좁은 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도 함께 주셨다(마28:20). 이를 위해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 주셨다(행2:1-4).
** 어미곰과 아기곰이 언덕을 오르는 예화 동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hk5D_R4e4fw&t=4s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지금 어떤 삶의 어려움이 나에게 밀려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믿고 무인불승의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자. 좁은 길을 걸으면서 기뻐도 찬송하고, 배 밑창에서 노젓는 것 같은 고통에서 눈물로 찬송하면서 그 길을 가자. 내가 져야할 십자가는 내가 지자. 그래서 이 어두운 땅에 희망의 빛을 비추자.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일꾼의 길이며, 비밀을 맡은 자의 길이며, 직분자의 길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