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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연구하면서
김인희
1. 토지의 소개
박경리의 『토지』 는 우리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우리 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가운데 진정한 삶에 대한 탐색을 탁월하게 보여준 역작이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간의 창작기간을 걸쳐 완성된 『토지』 는 그 길이만 따져서 원고지로 대략 31,200장의 분량이며, 전체 5부 25편 362장(序 포함)으로 각 편과 장에는 제목이 붙어 있다.
『토지』 가 연재되기 1년쯤 전에 발표된 단편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1968.11)에는 『토지』 의 1부 1권의 내용이 응축되어 있어, 작가가 이미 훨씬 전부터 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창작, 연재된 만큼 『토지』는 문학지와 일반 잡지, 신문 등 다양한 게재지를 거쳤다. 제1부는 1969년 9월부터 1972년 9월 말까지 만 3년 동안 『현대문학』에 이어 제2부는 『문학사상』 으로 옮겨 1972년 10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역시 만 3년 동안 연재되었다. 제3부는 1977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독서생활』에 1977년 6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한국문학』에 다시 1979년 12월까지는 『주부생활』에 실렸다.
1980년에 작가는 집필지를 원주시 단구동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옮긴 후,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여 4부 구상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제4부의 앞부분은 1983년 7월 12월까지 『정경문화』에 실렸고, 다시 3년 8개월간 연재가 중단되었다가 1987년 8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월간경향』에 4부의 나머지가 발표되었다. 제5부는 그 후 4년여의 공백 끝에 1992년 9월 1일 부터 1994년 8월30일까지 약2년간 607회에 걸쳐 《문화일보》에 연재됨으로써 그 긴 장정의 막을 내렸다.
『토지』 는 연재 처음부터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연재가 끝나는 대로 삼성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여 나왔다. 1989년에는 『박경리 전집』을 낸 지식산업사에서 4부까지 개정판이 간행되었고, 1994년 총 16권으로 솔 출판사에서 완간되었다.
또한 1983년에는 『토지』 1부가 일본 문예선서에서, 1994년에는 역시 1부가 프랑스 벨퐁 출판사에서, 다음해에 1부가 영국 키건폴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으며, 독일어로도 번역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토지는 3부까지의 내용이 KBS 1TV를 통해 두 차례, 또 5부 완간 이후에는 SBS TV를 통해 52부작 대하드라마로 방영되었다.
『토지』 는 그 독특한 성격으로 하여 연재가 되는 가운데 문학계에 다양한 논의를 유발시켰으며, 완간된 후에는 한국문학연구학회 주최로 '『토지』 와 박경리의 문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현재 『토지』 에 관한 비평서가 계속 출간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석 · 박사 논문도 활발하게 쓰여지고 있다.
2.토지의 역사
『토지』 는 1969년 9월부터 연재되었지만,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작품이었다. 박경리는 작품을 연재하기 3, 4년 전쯤 한 수필에서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고 밝히고,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습작을 해 왔었다고 고백하였다. 실제로 이전의 작품들에 나오는 모티프나 인물형상화, 구성적 특성 등은 『토지』 에 종합되어 나타난다.
이중 『토지』 의 사건이나 인물화에서 직접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작품으로 평사리 풍경의 중요한 밑그림이 되는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과, 작가의 진주여고 체험이 직접적으로 재구성되어 『토지』 5부에 이어지는 「환상의 시기」, 「옛날이야기」가 있다. 특히 토지를 연재하기 10개월 전인 1968년 11월, 『월간문학』 창간호에 실린 중편소설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은 강청댁과 용이, 그리고 월선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것으로 『토지』의 1부 중의 한 부분과 거의 비슷하다. 그렇게 작가는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결국 26년이나 걸리는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박경리는 왜 그토록 간절하게 이 작품을 쓰려고 했을까
문단에 나오기 전에 외가의 먼 친척뻘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즉 어느 시골에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광대한 토지가 있어 풍년이 들어 곡식이 무르익었는데도 호열자가 나돌아 그것을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 '베어 먹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어요. 벼가 누렇게 익었는데 마을은 텅 빈 그런 풍경이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할까. 그 뒤 문단에 나와 작품을 쓰다가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그때부터 그것으로 뭔가 작품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자꾸 생각이 바뀌고 했지만요.
(박경리와의 대화- 소유의 관계로 본 한의 원류, 김치수, 『박경리와 이청준』, 민음사, 1982, 165-166쪽.)
박경리는 '풍요로운 대지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강렬한 이미지의 대비가 『토지』를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어느 부잣집이 저주를 받아 대가 끊겼다는 이야기, 근친간의 사랑, 육촌 남매의 비극적인 연애사건 같은 것도 작품을 쓰게 한 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또 이런 이야기에 알맞은 시대배경을 설정하기 위해 흉년이 일어나고 1902년 호열자가 창궐하기 조금 전인 18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토지』가 구한말 우리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26년간에 걸쳐 창작된 사연은 그러하다.
『토지』는 매우 조용히 시작되었다. 『토지』 1부 연재가 시작된 『현대문학』 1969년 9월호에는 '상당한 기간 침묵을 지켜온 박경리씨의 장편을 이 달부터 새로 연재한다'는 짧은 편집후기와 작가가'오랫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끊으며 오직 이 작품에만 심혈을 기울였었다'는 말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을 뿐 연재기간 내내 작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침묵을 깬 것은 연재가 끝나자마자 나온 1부 단행본이었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대하소설', '한국현대문학사의 최대걸작', '한국문학으로서 확실한 전기가 될 문제작' 등의 수식어가 붙으면서 『토지』는 이 때 창간된 『문학사상』으로 옮겨 연재가 지속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1977년 1월부터 토지 3부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잡지, 『주부생활』과 『독서생활』에 동시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토지』는 KBS에 의해 처음으로 드라마화 되었다. 1979년 11월부터 1980년 8월까지 『토지』 1, 2, 3부가 방영되면서 독자들의 『토지』에 대한 관심은 무척 커졌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작품론이 1980년대 중반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언론에서는 『토지』 4부 연재에 대한 독자들의 강한 기대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경리는 4부의 연재에 거듭 실패하고 만다. 작품은 이미 처음에 작가가 계획했던 규모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외부의 요구를 냉정하게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 4부는 『문학사상』에 연재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창간호부터 2부를 연재했던 『문학사상』은 지령 100호를 맞아 다시 『토지』를 연재하겠다는 광고를 내고, 이 작품에 대한 김치수의 해설을 3개월이나 연재했으며, 1981년 5월호에는 '내달부터 고대하고 있던 박경리씨의 『토지』 4부가 게재된다'는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어찌된 사정인지 『토지』 4부는 그로부터 4개월이나 지난 후 『마당』 창간호에 연재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시사종합지 『정경문화』에 연재되었다.
1980년대 말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진 『토지』는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4부 연재를 끝내고 작가가 낸 시집과 중국기행문 『만리장성의 나라』가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79년부터 지식산업사에서 출간되기 시작한 단행본 『토지』가 매년 판을 거듭하며 팔려나갔다. 그리고 1992년 9월 1일, 새로운 포맷의 특수지인 《문화일보》에 그 5부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2년 후인 1994년 8월 30일 그 화려한 막을 내렸다. 신문과 잡지는 앞 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했고, 최초로 『토지』를 연재했던 『현대문학』은 무려 125쪽을 할애한 특집을 실었으며, 『작가세계』 역시 박경리를 특집으로 다루었고, 『토지』에 대한 평문과 단행본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토지』라는 거대한 '탑'을 기리는 문학적 잔치가 1994년 하반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토지』 연재 26년간 작가는 40대 초반의 중년에서 70이 다 된 노인으로 늙어갔으며, 중견작가에서 어느덧 원로작가로, 그리고 이제는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영향력 있는 '문사'로 대접받기에 이르렀다. 집필지를 원주로 옮긴 1980년 무렵부터 박경리는 인터뷰를 통해 작가로서보다 주로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밭을 매고 연탄을 갈며 고추를 따고 잡풀을 뽑는 등 언제나 일하는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고, 그 모든 노동이 『토지』 창작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고백했다. 환경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표면화된 것은 5부 연재시 환경운동연합공동대표직을 맡은 것이었다.
작가는 이 무렵부터는 환경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를 하며, 청계천복원운동에서 앞장서는 등 환경운동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박경리가 관여하고 있는 '토지문화관'이 환경문제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고 환경과 문학을 공동주제로 하는 계간지 『숨소리』를 간행한 것도 그 실천의 하나이다. 이제 『토지』의 작가는 스스로 야인(野人)이라 칭하면서 이 시대의 문제를 찾아서 지적하고, 작품 밖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존재이자 환경 파수꾼이 되었으며, 『토지』는 이런 작가의 모습에 의해 생명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로 새로 읽혀지고 있다.
3. 토지의 제목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는 각자 고유한 이름이 있듯이, 문학예술 작품에도 그 이름에 해당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문학 작품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없습니다만, 간혹 음악이나 미술의 경우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단 작품을 접할 기회가 있는데, 그 '무제'라는 것도 작가가 고심 끝에 붙인 이름, 즉 제목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제목을 부여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요. 그리고 독자들은 그 제목을 통하여 작품의 주제, 사상, 내용, 정조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게 됩니다. 결국 작품의 제목이란 단순한 팻말이 아니라 작가(창조자)와 독자(수용자) 사이에서 본원적 소통의 핵심적인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소설의 경우 작가가 부여한 제목은 소설 텍스트의 일부를 이루면서 동시에 이야기 전체의 방향을 주도하는 비중 있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의 제목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하는 것이나, 제목 여하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장대한 서사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 『토지』의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언뜻 보면 '토지'라는 명사는 '땅'이나 '대지'(실제로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들도 있습니다만)가 환기하는 것처럼, 사람살이의 터전 혹은 역사적 사건이 펼쳐지는 특정한 무대라는 의미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목인 '토지'는 단순한 땅이나 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의 터전 전체를 의미하는 대지적 이미지(김병익)를 품고 있으며, 항속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생성의 수용력과 창조력을 가진 생의 원천과 자궁으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 그 자체를 표상하고 있습니다(이재선). 이 때 '표상'이라는 어휘는 은유로 대체해야만 그 의미가 더 풍부하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서 '토지'는 단순한 농토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직설적인 것만이 아니라 은유적 이미지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토지』는 평사리라는 특정 장소의 '토지'에 관한 제유를 통해 우리의 국토와 역사를 은유적으로 포괄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장 조선다운 토지의 전형을 품고 있는 평사리라는 서사 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 터전을 지키고, 삶을 지탱하며, 투쟁해가는 과정 전체가 『토지』의 전체 서사는 은유적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4. 토지 제목의 함축적 의미
『토지』의 제목에 함축된 의미에 대해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토지'라는 제목과 관련해서는 처음에는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土地'라고 정한 것은 대지도 아니고 땅도 아닌 것, 즉 땅이라고 하면 순수하게 흙냄새를 연상하게 되고 大地라고 하면 그냥 광활하다는 느낌만 들어 그 밖의 것을 찾다가 나온 겁니다. 이것은 제 느낌입니다만 토지라고 하면 반드시 땅문서를 연상하게 되고 '소유'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원초적인 상태에서 오늘에 이른 것은 다 소유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하는 거지요.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이런 정도의 생각으로 출발해서 그것이 씌어지면서 자꾸 생각이 넓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기도 하여 간 것이 아니냐 하는데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토지'라는 제목은 땅문서를 연상케 하면서, 더 나아가 '소유'의 관념을 포함한 자본제적 소유 욕망이 투여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역사적 체제 안에서 토지라는 '자본'을 작기 확장이라는 목적을 위해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투자)하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토지'라는 말에는 농경을 곧 땅의 문명화로 여기는 농경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봉건주의적이건 자본주의적이건 간에 소유의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품에서 동학 잔류 세력들의 '오백섬의 토지'를 관리하며 김 환에게 투쟁 자금을 공급하는 토지관리인 '길노인(송안거사)'의 의식이나, 조선의 토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평사리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숱한 인물들이 배움을 익히고 삶을 꾸려나가며 투쟁하는 전 과정에서 작가가 의도한 '토지'의 중의적 의미는 잘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토지』는 땅을 매개로 삶을 영위해 가는 순환적 터전이라는 기본 의미를 포괄하면서, 그것을 넘어 전체 서사의 내용에 반영된 자본제적 소유와 욕망의 개념, 더 나아가 식민지 자본주의 형성 과정을 통해 근대사회로 변화해 가는 역사적 도정에서 한민족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는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이해된다.
첫댓글 작가 의 전생애 가 담긴 대하소설 토지를 완독 하는 일만 으로도 거대한 산맥의 능선에서 스토리의 길을 잃고 멍청한 시선으로 별의 행로를 찾아 긴 한숨을 쉬다가 포기 할수 도 있는데 작가자신도 우여곡절과 좌절의 연속선상에서 이를 악물며 26년이라는 반생을 바친 3대의 이야기를 정밀분석 . .학위논문의 기재로 선택하셨습니다 .작가 박경리보다 더 위대한 당신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 합니다 . 비교가 불가한 옥동자를 순산하시기 바랍니다.
추서하면 인간은 황토로 빗어진 것이고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토지는 자본주의 가 시작되기 훨신 이전 봉건주의 사회부터 지주의 소유 개념으로 분류 되었었고 소작과 마름과 머슴등은 생명까지도 소유권이 지주 들에게 귀속 되어야 했습니다 . 그러나 지주와 예속된 사람들 모두가 돌아갈 고향 즉 귀향지 이기도 합니다 . 토지는 인간의 자궁으로 그리고 다시 자궁과 함께 산화 되어야 하는 환생을 향한 무한한 재생적 윤회를 체득하게 해주는 모성본능의 밭입니다 펄벅의 대지는 박경리의 토지에 미칠수 없는 졸작입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더 깊게, 더 높게, 더 넓게, 더 강하게
노력하겠습니다. 견고하게 지내겠습니다.
토지 어머니의 땅
우리의 밥줄
토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학위논문이 잘 통과되어
멋진 박사님 되시길 기도합니다 메멘토모리카르페디엠
감사합니다.
늘 긍정적인 힘을 주시고
상한 무릎을 세워 주십니다.
굳건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행복합니다 멋진오늘 되세요 팟팅 나정집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