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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추동하는 서정의 미학
--현상연의 {울음, 태우다}의 시세계
권혁재
현상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울음, 태우다는 시인 자신의 말에서 나타나듯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생각이/ 쓸쓸한 부재로 남아 있는 지금”(자서)의 위치를 인식하여 서정이나 이미지를 추동하는 기억이 산재해 있던 언어를 결집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또한 대상이나 타자를 대하는 진정성이 가득한 언어의 탐색 의지는 현상연으로 하여금 흥미를 잃어가는 시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시인으로 돋보이게 해주는 시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대개의 서정시는 화자 자신의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 대상에 편향적인 사유에 따라 위안을 받거나 시로 보듬어 내었는데, 현상연 시인의 시는 거기에다 기억이라는 원형을 첨가하여 외연을 넓혀냈다. 그에게 기억은 과거의 풍경과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상력으로 이미지를 변형해냄으로써 생명에 대한 애착을 매우 친근하고 포근하게 환기시켜 주는 대상이다. 그런 오래된 기억과 이미지의 힘이 결속하면서 그 자신이 견지하는 시의 서정도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런 시의 경향은 이번 상재한 시집 울음, 태우다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용해시켜내어 현상연 시인의 시가 삶의 기저에 내재한 여러 층위의 대상을 관찰하여 그만의 시적 진실이나 지극한 애착으로 포착해내는 일면을 보여준다. 특히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이미지를 획득하는 상상력은 현상연 시인에게는 시 쓰기의 즐거움과 시인으로서 역할을 분명하게 하고, 또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 일련의 노력은 그만이 지닌 시작법이자 시 쓰기를 꾸준히 유지하게 해준 단단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현상연 시인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기억과 상상력의 감각이 빚어낸 울음이나 아픔을 품으면서 존재라는 사유에 대해 동참하게 된다. 그 동참에서 현상연 시인이 수용하고 거부하는 기억의 형태들이 삶이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무성한 풀에게 안부를” 묻듯이 우리도 그를 쫓아갈 것이다. 현상연 시인은 많은 기억 속에서 자신의 다양한 시적 스펙트럼을 빚어내어 서정과 이미지를 적절히 섞어 시의 농도를 잘 맞추고 있다.
오래된 서정을 소환하는 기억
자정이 가까운 여수역
무리에서 떨어진 새 한 마리
썰렁한 경계심 틈으로
누군가 건네준 빵
곱씹은 생각으로 꾀죄죄하고
초점 잃은 눈은 핫바 한 개와 우유 한 병에
울음을 터트린다
날기도 전, 떨어지는 법부터 터득한
새의 울음 속 두려움을 먼저 읽는다
잘근잘근 물어뜯는 초조가 기억을 더듬고
바닥을 비벼대는 운동화 끝은
어미 새에 대한 항변일 거라고
수군거리는 역 주변 어둠들
-「버려진 새」 부분
현상연 시인에게 기억은 오래된 서정을 소환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에게 기억은 불편하고 현실사회에 대한 부조리 또는 비정상적인 면들을 자주 들춰낸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억은 트라우마 같은 형태로 시를 지배하여 그의 기억으로부터 시적 상상력을 여러 통로로 거쳐 배출해내어 왔다. 이 시도 “자정이 가까운 여수역”에서 소외되고 잊혀져가는 “무리에서 떨어진 새 한 마리”의 기억에서 결국은 “초점 잃은 눈, 바닥을 비벼대는 운동화 끝, 적막만 날아다니던 공간” 등의 오래된 기억을 굴착하여 “버려진 새”의 서정을 추동한다. 그에게 오래된 서정은 그 자신의 잠재의식에 내재한 기억이고, 그런 기억 또한 시를 쓰게끔 추동하는 일종의 모티프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 기억과 서정이 각기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닌 현상연 시인에게는 기억과 서정이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특이하다.
“버려진 새”에서 화자의 포근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울음 속 두려움”을 알게 해주는 “새 한 마리”가 아니라 “우수에 젖은 눈이 기억 저 편을 더듬”으며 타자가 맞닥트려야 할 두려움마저 짚어낸다는 점에서 깊은 동질성을 갖게 해주는 것에 있다. 즉, 화자는 이미 “버려진 새”의 기억 속을 파고 들어가 그의 “썰렁한 경계심”이나 “어미 새에 대한 항변”을 노출 시키는 것보다 시인 자신의 이타적인 친근감을 내세워 “대합실에 내미는 손”의 이미지에서 “버려진 새”를 잘 잡아주는 것으로 획득해낸다.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시 「울음, 태우다」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맨드라미 붉게 타오르던 날
그녀가 불 속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세상이 서늘하였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길들어진 인내는 잿빛 바람이 되고
해묵은 생의 파편들은 숯이 되었다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되고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던 울음은
토하지 못하는 울음이 되었다
-「울음, 태우다」 부분
시인은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를 울음을 태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길들어진 인내는 잿빛 바람이 되고/ 해묵은 생의 파편들은 숯이” 된 그녀의 내력에서 온전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그녀가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잿빛 바람”이나 “숯이” 될 때까지 “문밖을 서성이던 어떤 울음은 불이” 된다. 그리고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던 울음은/ 토하지 못하는 울음이” 될 만큼 화자에게는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 속의 기억으로 “마지막 유언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울음, 태우다」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는 상상력과 이미지다. 보통 우리가 시의 제목을 정할 때는 “울음을 태우다”로 하는 게 일반적인데, 현상연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울음, 태우다”로 시 제목을 사용하였다. 시인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몇 가지 추론을 해볼 수 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울음과 태우다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오직 대상에 대한 애정과 회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대상에게서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성과 성찰의 계기를 갖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울음을 태우다”라는 단순한 표면적인 방식을 선택하여 기억을 울음으로 태워버림으로써 기억이 기억을 소거하는 형태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상연 시인에게 “화구에 들어간 그녀”는 잿빛 바람 또는 숯이 된 새의 파편들이 부추기는 울음이 아니라 불이 된 울음이었고, “울음을 토하지 못하는 울음”으로 태워도 울음이 멈추지 않는 영원한 시적 대상자로서 여전히 “까맣게 뚫린 심장 사이로 들락거리”고 있다. 이러한 일면의 서정이 나타나는 작품이 참으로 많은데, 그 시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숫돌에 물 먹이며/ 녹슨 기억 벗겨”(「날을 세우다」)보는 장면이나 “제 본분”(「못의 담론」)을 잃지 않고 항상 곧게 펴져 있어야 하는 못의 기능을 지적하거나 “조상의 내력”에서 “파도의 묘지가 된 방파제”(「테트라포드」)를 기억해내기도 한다. 또 “밀착된 낡은 기억, 대기권 밖에서 깜박거리는 행성, 기억의 균열”(「치매」)로 잘 탐색해낸 “치매” 또한 오랜 서정을 소환하는 기억의 한 부류로 작용한다. 이외에도 「폐차」나 「간판」, 「1시와 3시 사이」 등에서도 현대문명의 이기나 정당하지 않은 노동의 환경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작품도 모두 오랜 서정을 추동하며 이미지를 시작품에 잘 적용시켜낸다.
불편한 서정을 깨우는 기억
시에서 기억은 상상력을 추동하여 이미지를 획득해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부연하자면 상상력은 시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 밑바탕이 되는 상상은 항상 기억에 의존한다. 이런 기억은 긍정적이거나 기쁨의 기억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이고 불편한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서정을 깨우는 경우도 있다. 후진하는 차에 치여 사라진 백구(「백구가 사라졌다」), 바다 이야기같이 “한바탕 파도타기”를 하며 한탕을 노리는 「얼굴 없는 고래」에서 과학 문명이 갖다준 폐해나 자본시장을 부정하게 잠식하려는 “코인 가격이나 바다의 흐름”(「얼굴 없는 고래」)을 통해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그릇된 “시장을 컨트롤”하는 이기적인 자본의 불편한 장면도 담담하게 잘 포착해낸다.
건물 모퉁이
앉은뱅이 노파의 냉이 한 움큼과
비닐 속 무말랭이가 전부인 반나절
마수걸이 없는 막혀버린 눈물샘에 허기가 흔들린다
무말랭이처럼 비틀어진 노인 손가락
얼마나 많은 마른 길을 지나왔는지
손가락 마디가 휜 갈퀴 같다
좌판 노파의 밥그릇이 햇살에 말라 간다
-「송북 오일장」 부분
현상연 시인은 장이 서는 송북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그래서 “송북 오일장”의 정서나 애환을 잘 파악하고 있다 하겠다. 그에게 축적된 송북 오일장의 기억은 “그늘조차 드리우지 못한 오늘”이고 “무말랭이처럼 비틀어진 노인 손가락”으로 불편하게 각인되는 기억의 공간이자 시간이기도 하다. 다양한 가게에서 마수걸이의 허기가 흔들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목청 돋우며, “밀려난 햇살들”을 “건물 모퉁이”에서 “날개 단 오후”를 “주름진 노을에 하나 둘 흩어” 보낸다. “닷새 되면 다시 열리는 송북 오일장”은 삶의 치열한 모습이 “비닐 속 무말랭이가 전부인 반나절”이나 “햇살에 말라가는 좌판 노파의 밥그릇”같이 처연하고 불편한 기억으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농익은 상처에 흐르는 고름
씨앗 빠진 자리 붉은 허공 하나 생겼다
아버지 안마당 한 바퀴 휘돌아
울 너머로 날아가고
아버지만큼 생을 건너온 나도
단단한 복숭아 하나 품고 건너왔다
-「아버지 텃밭」 부분
시인에게 아버지는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아버지 중의 한 분의 아버지로 언제나 시적 대상이 될 수 있고 타자의 입장에서 기억을 부추기는 육친 너머의 기억의 대상이다. 그런 아버지 텃밭의 울타리에는 “딸애 등록금, 썩고 진 무른 곳에 알을 슬기 시작”한 벌레들, “농익은 상처에 흐르는 고름, 울 너머로 날아간 아버지” 등의 이미지가 아버지로 향한 회한으로 둘러쳐져 있다. 화자를 사랑하는 부성애가 “분홍빛으로 굽어 있”는 이 작품은 오롯이 아버지 자신이 감내하며 “붉은 근심 주워 삼”키고 “씨앗 빠진 자리 붉은 허공 하나” 만드는 것으로 여기고, 울 너머로 날아간 아버지를 화자는 “단단한 복숭아 하나 품고 건너” 온 것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 동참의 행위는 일상적인 관습에서 나타나는 편린이나 후회가 아닌 기억 너머로 날아간 아버지의 모습 뒤로 화자 자신이 아버지 같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나 각오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작품이 남다르게 보인다.
현상연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특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문명의 이기나 현대인의 그릇된 정신적인 측면을 오랜 기억을 통해 응집된 정서로 짚어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이나 식물적인 대상에서 자연재해나 이상기후 조짐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 그의 시가 나아갈 방향이나 그가 이끌어갈 그 자신의 시 세계를 엿보는 것 같아 고무적이다.
“삐걱거리며 부서지는 「전기밥솥」, 소의 생애나 내력이 계산되지 않는 「가벼운 계산법」, 꽃 핀 자리와 꽃 진 자리를 기피하는 「도미노 게임」, 쌓아 놓은 풀더미에 조문 행렬 이어지는 「풀과 전쟁」, 과수 화상병으로 봉분 없는 무덤이 생긴 사과밭을 지적한 「사과나무 장례」,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는 검은 비닐의 「은밀한 속내」” 등은 모두 한결같이 불편한 서정을 깨우는 기억의 방식을 취한다.
기억을 더듬는 기억 속의 기억
소꿉친구 병실을 찾았다
그녀의 아픈 기억이 단내로 훅 풍긴다
수없이 찔러대는 주사 바늘
병명의 취조가 끝난 후 그녀를 석방하기로 한다
들숨과 날숨의 파동이 일파만파로 번져
혈관 어딘가에 꼭꼭 숨어 핀
붉은 꽃
은밀한 병명이 술래잡기하는 가운데
그녀의 내력을 되짚어 본다
집안 한 켠
그녀 살을 발라 먹으며 제 키를 늘리는
앉은뱅이 꽃들
그녀는 육신을 조금씩 덜어내며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시들어 간다
삶이란 제 곪은 곳을 드러내는 법
단단히 채워진 그녀의 자물쇠가
무성한 소문에도 열리지 않는다
병명은 여전히 링거액처럼 흐르고
붉은 꽃만
저녁이 오는 병실에서 시들어간다
-「저녁이 오는 병실」 전문
시에서 저녁이나 어둠은 죽음을 뜻하는 원형의 이미지를 지닌다. 저녁은 한밤 이전의 단계로 서서히 시들어가거나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해줌으로써 시에서 밝고 어두운 것을 조절해주며 이미지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현상연 시인에게 저녁은 “그녀의 아픈 기억이 단내로 훅 풍기”는 시간이며, “병명의 취조가 끝난 후 그녀를 석방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화자에게 저녁이라는 시간은 “그녀 살을 발라 먹으며 제 키를 늘리는/ 앉은뱅이 꽃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간이고, “단단히 채워진 그녀의 자물쇠가/ 무성한 소문에도 열리지 않는” 것에 대해 “곪은 곳을 드러내는” 행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녁이라는 시간과 그녀를 바라보며 채워진 그녀의 자물쇠를 풀려는 행위에도 그녀는 “저녁이 오는 병실에서 시들어간다”. 그녀의 “아픈 기억”과 “삶이란 제 곪은 곳을 드러내는” 화자의 기억은 기억 속의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시들어가는 것을 “붉은 꽃만/ 저녁이 오는 병실”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잘 짚어낸다.
현상연 시인에게 기억은 일상적인 하나의 기억이 아니라 기억 속의 기억을 더듬어내는 시작법으로 사용한다. 일례로 「돼지의 꿈」에서 전반부에서는 “옆집 여자 깨진 사랑이 취기에 엎질러진” 장면으로 나타났다가 후반부에서는 “오물에 발 담그고 엉덩이 똥칠하며 살던 돼지의 꿈은/ 결국 술안주밖에 되지 못했다”라고 표출하며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치 또는 병립되는 기억 속에서 기억을 더듬어 작품으로 잘 주조해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으로는 「갈매기 날다」가 있다. “세탁기에 바다를 넣는다”는 신선한 이미지와 도저한 시상의 전개는 “얼룩의 끝자락”이나 “물고 있던 불순물”을 뱉어내는 세탁의 과정을 묘사해내다가 “잔잔한 바다 위로 갈매기 날아오른다”로 매듭짓고 있는 장면에서도 전면부와 후면부가 서로 비슷한 이미지의 기억을 중첩시킨다. 이 또한 기억 속의 기억을 탐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골목의 호흡」에서 노을이 지는 골목의 모습을 기억 속의 기억으로 “체납된 고지서 같은 어둠”을 “죽음에 길들어진 시간”으로 바라보는 화자가 골목길에서 맞닥트리게 되는 존재의 기억을 더듬어 “반복된 습관”에 갇힌 기억을 획득해낸다. 또 「법고」에서는 “가죽을 보시하고/ 불가에 귀의한 짐승”을 소로 기억해냈다가 “탑 주변을 배회하는 뭇 사내”로 전이시켜 귀착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기억은 죽은 소의 가죽이라는 기억에서 “북채 잡은 손”으로 “번민을 다독”이는 “뭇 사내”의 기억에 맞닿아 기억 속의 기억을 추적해내는 화자의 집요함이 엿보인다.
기억을 잃은 기억 속의 기억들
약이 밥 되어버린 구순의 아버지
폐암, 고혈압, 심장질환, 전립선 비대증
약 보따리는 항상 문갑에 대기 중이고
약은 약 먹은 기억조차 먹는 건지
기억 잃은 기억이 또다시 약을 먹고
뜨락에 올라선 햇살이
무릎 치며 중복된 사실을 확인하고
점심 약 굶지만
약은 저녁 식전에 꼭 가출 한다
아버지 약의 행방 찾아 구석구석 살피지만
알약이 가는 곳은 문갑 밑이나 장롱 밑
먼저 숨어버린 그 곳
손이 닿지 않는다
행방을 수소문하다 포기한 기억은 청소기에서 발견되고
아버지 어두운 알약만 더듬거린다
흐린 생각은 여전히 침대 밑이나 윗목으로 가출하고
밥보다 약이 먼저인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
한 주먹 남은 생을 다시 삼킨다
-「가출」 전문
화자에게 기억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지 않고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기억을 헤집어 다시 기억을 들춰내는 형태도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가출」이다. “폐암, 고혈압, 심장질환” 등의 지병을 앓고 있는 구순의 아버지에게 약은 매번 먹는 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약 보따리는 항상 문갑에 대기 중이고”, 약을 수시로 복용하는 탓에 “약은 약 먹은 기억조차 먹는 건지/ 기억 잃은 기억이 또다시 약을 먹”는지 “중복된 사실을 확인”까지 하게 된다.
현상연 시인이 구순의 아버지에게서 획득한 서정은 기억을 잃은 기억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인식해낸다. 그 인식은 안타깝게도 “문갑 밑이나 장롱 밑”에 숨어버린 아버지의 알약을 찾는 장면에서 기억을 서정으로 변주하는 지극한 시상으로 전개한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버린 알약은 결국 “청소기에서 발견”되어 아버지의 잃은 기억은 여전히 “침대 밑이나 윗목으로 가출”을 하지만 화자는 그런 아버지에게 잃은 기억을 찾아주듯이 “한 주먹 남은 생을 다시 삼”켜 드리기 위해 기억을 “뜨락에 올라선 햇살”같이 아버지의 문갑에다 귀가시켜 놓는다. 이렇게 아버지로 향한 애틋한 기억을 불러오는 또 다른 작품에는 「아버지의 섬」도 있다.
현상연 시인은 아버지의 잃은 기억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잃은 기억을 잘 포착해 비린내만 풍기는 바다에서 “오래전 염장해둔 기억만 잔뼈 주위를 떠도”는 편린을 잘 표현해내기도 한다. 화자에게 잃은 기억은 주로 가족이 그 대상이 되나 여기에서는 “매미, 모기, 산수유, 비, 포도주, 쌍둥이 손자” 등 다양한 대상들을 등장시켜 내밀한 서정의 기억으로 엮어낸다. 여기서 잃은 기억을 들춰내는 특이한 몇 작품을 거론해보면 「착각」, 「환청」, 「비의 수다」, 「코골이」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착각」은 “기억을 흘린 사내”가 “기억 사이를 더듬으며” 달빛 아래서 “걸어온 길 되짚”는 것을, 착각으로 보는 시적 감각은 실존 의식과 잇닿아 있는 듯하다. 또 「환청」에서도 “지상의 속도를 놓친 바퀴”에서 추동하는 “빛의 행방과 속도를 흥정하던 시간”이나 “이미 회전해버린 방향”에서 몽환적인 “환청”을 견고한 사유로 잘 표출하고, “방향 잃은 길 바라보며 밤을 추격”하는 자세로 잃은 기억을 재확인하려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엿보게 해준다. 현상연 시인은 기억 잃은 대상들에게 기억 속의 기억을 되찾아주거나 찾아냄으로써 그의 시심이 본연적으로 시인을 시인답게 해주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그에게 기억이 영원하듯 시도 영원히 그의 곁에 머물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주지하듯이 시는 오랜 기억에서 서정이나 이미지를 추동하여 발화되거나 존재와 실존이 내포된 사유의 세계를 언어로 획득해낸 결과물이다. 그것은 현재까지 변함없는 사실이며 과거의 기억을 현재나 미래의 기억으로 소환하여 형식이나 내용을 바꿔 놓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상충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으나 분명한 것은 기억을 통해 서정이나 이미지를 추동하여 시를 이루어 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정은 서사나 서경과는 다른 시의 세계를 구축하는 원리를 갖고 있다.
현상연 시인은 오래전 기억을 불러오면서도 그 기억 안에 가득 차 있는 서정이나 이미지를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잘 이끌어 왔다. 그 과정은 기억이 스크린에 비추는 것처럼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때론 안타깝고, 때론 참담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시 세계는 기억을 통해 추동하는 많은 이미지를 언어의 미학으로 힘겹게 추적해가는 시작詩作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현상연 시인의 시집 울음, 태우다는 서정이나 이미지를 추동하는 기억이 산재해 있던 언어의 결집으로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기억에 대한 새로운 시적 전환을 되새기게 해준다.
이제 현상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발간을 축하하고 “골목의 호흡”이 그에게 시의 호흡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 “공복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시적 진실과 삶의 진경을 디뎌가며, “패딩처럼 빵빵”하라는 뜻으로 「골목의 호흡」 일부분을 아래에 첨부해 놓는다.
지친 하루가 벗어놓은 노을
금 간 유리창 틈으로 기어오르고
묵은 기침이 떠도는 담벼락에 매달린 우편함
색 바랜 고지서 물고
오가는 행인의 행방에 소인을 찍는다
숱한 세월 잘라먹은 길바닥엔
체납된 고지서 같은 어둠이
지친 몸을 이끌며 공복의 발걸음 재촉한다
-「골목의 호흡」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