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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출 29:1-9)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죄인으로 칭할 때 행위의 잘못을 근거로 해서 죄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정해놓은 법을 근거로 해서 죄인과 죄인이 아닌 자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을 어기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죄인이라고 부를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적인 시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죄인을 생각하게 될까요? 보나마나 어떤 법을 기준으로 내세워서 그 법을 지키면 죄인이 아니고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도 부분적인 죄인을 고백하지 전체적으로 타락되어서 어느 한구석도 선한 모습이 없는 죄인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죄인이다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그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즉 죄인인 인간이 하는 일은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를 하나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사람들 많이 끌어 모으고 선교 많이 하고 구제 많이 하면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저 목사는 자꾸 교회에서 하는 일까지 선한 것이 아니다는 말을 하느냐’고 이상하게만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깊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주 간단한 이치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왔느냐?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느냐? 이 차이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고, 그리스도는 선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이는 분명히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생각으로 죄인을 위해서 하는 것은 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비록 죄인인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한다면 그것은 악이겠습니까? 선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생각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죄인인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죄인의 생각이 아니라 선하신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칭함 받는 것입니다.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연관된 일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생각, 또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고찰은 전혀 없이 종교적인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선한 일로 단정짓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인 몸부림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몸부림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도 없고 선한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대속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대속의 종교란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것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능케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행위로서는 제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대신 죽으시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속의 종교라고 하면서 왜 자꾸 인간의 행위에 선을 두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란 인간에게서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대속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의 의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그 행동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한다거나, 자신은 천국갈자가 틀림없다는 표로 삼는다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한 행동이라면 그것은 그렇게 하도록 하신 성령의 도우심이지 인간의 힘으로 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아는 신자라면 그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자기의 의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신앙생활을 내힘으로 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을 무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단지 남에게 머리 숙이고 말로만 겸손떠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깊이 간직하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도 성령이 한 것이지 결코 자기의 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사람의 속중심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에 묶여서 감추어져 있게 됩니다. 세상적인 지위와 체면, 명예라는 것에 묶여서 그 속의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면과 도덕을 벗어버릴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때 사람에게서는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두세 사람이 모이면 스스럼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복을 입으면 그런 신사다운 신사가 없는데, 예비군복만 입으면, 그것도 여럿이 어울려서 다니게 되면 술 취해서 난장판이고, 고성방가에 노상방뇨에 길거리에 여자들 희롱하고 그런 개망나니가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즉 예비군복이 그동안 구속돼 있는 세상의 도덕과 체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목사는 어떻습니까? 장로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는 그토록 인자하고 덕망 높은 목사 장로가 노회, 총회에만 가게 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핏대를 올리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보시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을 이해하십니까? 속중심이 선한 인간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겉행동이야 선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중심이 선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은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의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속중심으로 보시고 판단하시기 때문에 인간중에 하나님께 나아갈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이런 인간을 기뻐한다’는 것을 제사장을 모델로 내세워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사장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모습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죄용서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제사장을 바라보고 제사장을 본받아 사는 인간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즉 제사장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레위기 8:35절에 보면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규례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고 합니다. 제사장이 위임식을 할동안 회막문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규례는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제사장 위임식동안 회막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회막 바깥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결국 제사장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고 구원을 얻는 삶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소망이 있으시다면 오늘 제사장의 모습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제사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제사장을 세우신 규례를 통해서 여호와의 뜻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단지 제사를 진행하기 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기준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원하신다면 제사장 마음을 품으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제사장은 레위인으로서 재산이 없습니다. 먹고사는 양식은 하나님의 규례 때문에 백성들을 통해서 공급됩니다. 즉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가는 자가 제사장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제사장은 하나의 모델입니다. 시범조교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의 모습인지, 하나님 백성의 바른 삶인지를 시범으로 보여주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은 제사장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생활태도를 내 생활태도로 받아들이려고 애쓸 때 천국에 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이것이다. 병낫고, 돈벌고, 자식 잘되고 하는 이런 것들을 성경이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좋아하기 때문에 목사들이 신자들 비위 맞춰 줄려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해서 솔깃하는 것은 아직까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재산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사는 제사장은 그날그날의 양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날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세상 것을 쌓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 것을 더 갖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여러분 과연 그날그날의 양식으로 감사하며 살아갑니까? 딤전 6:8절에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9절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는 인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부자되기에 힘쓰지 않는 인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안에서 기도하는 자가 과연 자기의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육신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말그대로 그날 필요한 양식입니다. 내일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날그날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과연 그날의 것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거의 대부분은 앞일을 대비하기 위한 기도일 것입니다. 그날그날의 것은 굳이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도 내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루하루의 양식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갑니까? 이것을 느끼며 사는 자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편안하고 물질이 풍부해져서 하루하루의 양식에 대한 간절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천명이 굶어죽어 간다는 소말리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양식이 정말로 절박한 심정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양식이 얼마나 고마운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나이드신 분들은 옛날 일제시대나 6.25전쟁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뼈저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보릿고개를 이야기하면서도 단지 옛날의 추억으로만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풍부함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더 큰 풍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살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을 물로 씻기라고 하고, 7절에서는 머리에 관유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은 거룩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거룩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서의 거룩을 말합니다. 제사장이란 자기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삶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을 살펴볼 때 자신의 성공, 출세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서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제사장은 목사도 장로도 교회에 오래나온 사람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 말고 속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만을 바라고 사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자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사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