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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8:1-6 내 백성이여 : 칼빈
간단 간단히 많은 일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시편에서 두 가지 중요한 논제를 관찰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어떻게 친히 교회를 선택하셨으며 자비롭고 은혜롭게 품어 주셨는지 또 얼마나 놀랍게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냈으며 여러 가지로 축복하셨는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시는 큰 축복을 받은 유대인들이 때때로 완악하고 배은망덕하게 마음대로 아버지를 배반함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이 먼저 그들을 값없이 그의 양자로 택하심 속에서 분명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완악하고 목이 굳은 백성들의 반역에 투쟁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도 역시 계속 나타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에 대한 언급, 말하자면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유다 지파 중에서 다윗을 택하셨을 때, 하나님이 보여 주사 두 번 선택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삽의 마스길
1. 본문 1-2절은 “(1)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입니다.
1) 이 시편의 종결귀에 미루어 보면 다윗이 죽은 지 오랜 후에 이 시가 기록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가정에 세우신 왕국을 찬양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또한 에브라임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지 못한 에브라함 족속이 다윗가문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당시에 열 지파가 선택된 백성들의 남은 자들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에브라임 왕국이 불법이고 서자라는 불명예의 낙인이 찍히게 되는 어떤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이 시편을 영감으로 쓴 저자가 누구였든지 그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하는(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것이 아니라 친히 교사의 자격으로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백성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며 또 법을 ‘자기 법’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아무런 반론도 없습니다.
시편 78 편
선지자들이 그들의 교리에 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자기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그들에게 그 진리는 ‘그들의 것’ 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2장 16절에서 복음을 “내 복음” 으로 한 것 역시 그 복음의 기원이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 그가 그 복음에 대한 설교자와 증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석가들이 תורה(토라)를 ‘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엄격하게 옳은가에 대하여 약간의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다음 구절 곧 시편 기자가 같은 의미로 “내 입의 말”이라는 구를 사용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마저 하나님의 음성을 주의 없이 듣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선지자가 주의할 것을 엄히 요구함으로써 그의 교훈을 소개하려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가르치기 어렵고 완악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심지어 참된 신자들 자신도 일반적으로 그 진보가 너무 늦어 교훈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권면은 결코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게으르고 소극적인 사람들을 깨우치는데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
더 주의를 든든히 하기 위하여 그는 위대하고 높고 또 어려운 주제들을 논의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비유’라고 번역한 משל(마샬)이라는 단어는 격언, 금언, 경구 등과 같은 중대하고 뛰어난 문장들을 나타냅니다.
만일 우리가 취급하는 문제 자체가 비중이 크고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영감 받은 필자는 뚜렷한 의견과 주목할 만한 말들만 발언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고 확언합니다.
우리가 ‘수수께끼’(칼빈 사역 ; 비밀한 말-한글개역)로 번역한 חידות(히도트)는 다른 사람에 따르면 은밀한 말이라기 보다는 신랄하면서도 주의할 가치가 있는 속담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자기 노래를 막연한 말로 감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백성들의 배은망덕함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다만 그의 의도는 그의 신자들이 제출된 주제를 더 주의 깊게 고려하고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마태가 인용하여(마13:35) 그리스도께 적용시켰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불안케 하셨던 것입니다.
비유를 사용하신 그리스도의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큰 경외심으로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편 78 편
그가 일반적인 형태를 뛰어넘는 언어 스타일로 장엄한 신비를 설교했다는 점에서 선지자를 닮았으므로 여기서 시편 기자가 자신과 관련하여 확언하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타당합니다.
만일 이 시편에 신자들을 배움의 갈망으로 분발시키고 자극할 수 있는 그런 위엄이 빛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최대로 진지한 주의력을 기울여서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의 지혜의 보물을 우리에게 공개해 주시고 나타내 주신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2. 본문 3절은 “이는 우리가 들을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입니다.
시편 기자가 초두에 중대한 비밀한 말을 하겠다고 언급했던 것과 지금 덧붙여 말하면서 자기가 말하는 주제가 보편적인 것으로 조상이 후손에게 전해줌으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에 걸친 것이라는 말 사이에는 어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여기서 이야기된 일들을 후손들에게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선조들에게 주어진 의무라면 이런 일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맹인들과 또 가장 능력이 없는 나약한 사람에게까지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조금 전에 언급한 수수께끼, 또는 비밀한 말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이런 일들은 쉽게 조화될 수 있다고 우리는 대답합니다.
시편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많은 일들을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들에게 모든 광채와 말의 수식을 설명하며 사람들의 가슴속에 더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스스로 더 위대한 권위를 획득할 것입니다.
동시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위엄이 높다 하여도 이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심지어 어린 아이에게 이르기까지 그 말씀의 은혜와 유익을 주는 것은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신중하게 주목하여야 할 이런 진리의 말씀을 통해 배우도록 그런 사람들을 초대하고 격려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한된 능력에 자신을 적용시키므로 겸손하고 낮은 어법으로 말씀하신다면 이 교수 방법은 너무 단순한 것으로 경멸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그가 더 큰 권위를 부여할 목적으로 고차원적 방법을 사용한다면 인간은 그들의 무지를 구실로 하여 그것이 너무 모호하다고 핑계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악덕이 세상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자신의 어법을 조절하셔서 아무리 무력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유순하여 가르침을 받을 만하고 진지하게 교훈 받으려 한다면 그 진리의 숭고함은 결코 감추지 않으십니다.
시편 78 편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 선지자의 말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하려는 것이 선지자의 의도이며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잘 알려지고 또 논란없이 채택된 그러한 주제들을 제의하고는 어떤 새로운 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결심합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들은 바요’ 또한 ‘아는 바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근거하지 않은 무수한 것들이 급속하게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귀가 우화로 가득 채워지는 것 이상으로 더 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그가 들은 것을 말한 후 동시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에 대하여 그들의 진리를 확인하여 말한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이런 주제에 관한 지식은 ‘선조들’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전달되었다고 그는 덧붙입니다 이것은 가정의 지붕 아래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항상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들이 먼 나라로부터 들어올 때에 진리에 대한 위조로 인간을 속이는 보다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주로 준수되어야 할 것은 모든 선조들이 여기서 무분별하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로서 거룩한 진리에 대한 수호 책임을 교훈 받은 사람들만을 말합니다.
3. 본문 4절은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נכחד(느카헷) 이라는 동사를 네필(nephil) 동사 활용으로 받아들여 이렇게 번역합니다. 곧 “그들은 감추어지거나 혹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법에 따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선조들에게 배운 것을 마땅히 그 자손들에게 열심히 전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른다고 하는 모든 핑계는 제거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시대를 따라 선포되고 각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자녀에게 전수됨으로써 마지막 인류의 가정에까지 이르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행한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기이한 사적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라’ 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4. 본문 5절은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새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셨으니” 입니다.
시편 78 편
어떤 교훈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거나 또는 찬동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진리에 대해 확고히 동의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선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의 창시자로 드러냅니다.
그는 열조들이 그들의 마음의 단순한 충동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범할 수 없는 법으로 지켜져야 할 법령을 세우셨는데 그 백성을 위하여 거룩하게 역사 하신 구원이 항상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제한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령’ 혹은 ‘증거’ , ‘법’은 성문법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한 것으로 곧 백성들이 하나로 다 같이 모인 후에 자기들의 구원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유대인들에 대하여 그의 백성으로서의 권리를 가지실 뿐 아니라 도한 그것에 관한 지식이 결코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은총으로 보증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모든 다른 백성들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하여 언약이 성문법으로 인준되었을 때 그것이 공적인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그들의 시선을 동시에 값없는 선택과 그 열매에 돌리지 않았다면 이미 이루어진 분명한 역사를 밝히 알고 기억하는 일은 거의 중요치 않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법령은 이것입니다. 곧 친히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던 선조들은 자기들이 한 번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서 한 몸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입에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모든 시대에 걸쳐 자기들의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에게 거룩하고 순전히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반절의 앞부분은 당연히 ‘그가 명령하셨으며’ 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사 אשר(아셰르; which)가 여기에서는 앞 문장을 다시 설명할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는 이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역은 ‘즉 (namely, that is) 그가.......’ 라고 되는데, 우리는 같은 의미를 갖는 ‘for'(왜냐하면, 다시 말해서)로 번역했습니다.
5. 본문 6절은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입니다.
시편 78 편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거룩한 진리의 계속적인 전수에 관하여 그가 말한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 법이 다만 어느 한 시대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실되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보전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이 그들의 의로운 유산처럼 선조들로부터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수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큰 관심을 갖고 알아보게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 전서 3장 15절에서 “이 집은 ....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주장한 이유이며 바울은 그 말로써 진리 그 자체가 약하거나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이 자기들에게 부여된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고 말하자면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 그 진리를 유지할 때 바로 이런 사역자들을 통하여 그 진리를 널리 전파하며 유포하신다고 의미합니다.
이제 선지자는 거룩한 진리 안에서 교훈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계속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미 율법이 기록되기 전 아브라함에 대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18:19)라고 기록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 이것은 족장들에게 그들의 필요한 의무의 일부로 부과되었습니다
율법이 전해지자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제사장들로 공적인 선생과 교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같은 것이 신약 시대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이렇게 증명하였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9:21)” 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에서 특별한 명령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주어졌습니다.
곧 그들 각자에게 부지런히 그들 자신의 자녀들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부과되었으며 아무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하려는 노력이 가장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일이 될 것이며 또한 그의 최상의 찬성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후생 자손.... 그들은 일어나” 라는 말이 작은 수의 개인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들 만큼이나 그 수가 많을 터인데. 바로 이들의 노력으로 순수한 종교는 영원히 번영하고 전파된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시편 78 편
시78:7-11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본 시편의 총 주제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구원사(救援史)와 이스라엘의 범죄사(犯罪史)를 전감(前鑑)으로 회고함” 이라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 입장에 서서 그분의 백성을 가르치는 교사의 처지에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가 비유를 말하고 비밀을 말한다고 함으로써 만대에 교훈을 주는 보고를 열어서 증거합니다. 이 같은 진리의 보고들은 이미 주신 것들이요 전통적으로 전수되고 보존되어서 내려온 것이라 합니다. 또 이 같은 하나님 말씀은 계대적 전승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전승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증거와 법도며 하나님의 복음이 있게 하심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분의 계명을 지켜서 완고하고 패역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했던 그들의 열조와 같지 않게 하시려는 목적이라고 말씀합니다(7-8).
이어서 에브라임 자파 불신앙의 죄악을 지적합니다(9-11).
1. 본문 7절은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언급했던 교리가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용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조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예배를 지속하는데 도움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이 자기 자녀들의 구원을 준비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의 노력의 이와 같은 귀한 결과에 이를 때까지 마땅히 더욱 분발하여 힘 있게 자기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녀들 편에서도 더 큰 열심히 불타올라 거룩한 지식을 얻는데 열심을 기울어야 하며 마음을 무익한 사색에 방황하지 말게 하고 오직 올바른 표적을 목적하여 곧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3:7) 상태가 되는 것은 불행하고 비참한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이 부여된 목적을 들을 때 비로소 율법에서 나오는 유익의 참되고 가장 성공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쉽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신뢰’ (칼빈 사역 ; 소망을 둠-한글 개역) 를 제일 먼저 말하고 가장 높은 서열에 두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신앙을 확고히 하고 든든히 하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기억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78 편
요컨대 시편 기자가 뜻하는 바는 하늘 지혜의 총화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는 점입니다. 곧 사람들은 마땅히 그들의 마음을 참되고 거짓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둔 후에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점과 하나님께 둔 자신들의 신뢰를 계속 유지하고 소중히 여길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혜택을 성실히 묵상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께 거짓 없는 헌신적인 복종을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가 믿음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확신을 다른 대상으로 옮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을 하나님에게서 빼앗는 셈이 됩니다.
2. 본문 8절은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이와 같은 설교가 얼마나 필요했던가를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말함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곧 유대인들은 능력 있는 힘에 붙들려 복종하지 않게 되면 그들은 극도로 하나님을 반역하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가 완고하고 패역하여 정직치 못하고 불충하다고 말했던 그들 열조들의 마음보다 결코 낫지 못하다는 점을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사실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이 계속적으로 확고한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의 길에서 뒷걸음치고 말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경험은 호레이스(Horace)가 그 자신의 민족에 관해 기록한 것이 어느 곳에서나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열조가 태어난 때 그 시대는 그 선조들의 수치를 보았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비열하여 타락한 인류의 더욱 증가하는 죄악을 땅 위에 남기리라“
2) 만일 하나님께서 이토록 악에서 더욱 나쁜 악으로 나아가는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선지자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이 악하고 완고했던 사실로부터 그들만큼은 나쁜 예를 닮지 않도록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우매함이 얼마나 큰가를 배우게 되는데, 세상은 선조들의 본보기를 모든 경우에서 따라야 할 하나의 법칙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거룩하게 선택된 민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가 책망하는 것은 소수의 몇 사람들이 아니라 거의 모든 민족으로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망각과 불신의 위선뿐만 아니라 극도의 완고함이 팽배했었습니다.
시편 78 편
그가 단순히 한 시대의 조상들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의 선조들에게까지 미치는 기간으로 보는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의 횡행했던 기간을 핑계삼아 범죄의 기회로 삼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함으로서 선조들 가운데 마땅히 본받아야 할 사람들을 골라야 합니다.
본래 선조들에 대한 존경심은 그 후손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으로서 잘못하여 이와 같이 선조들의 완고함을 모방하지 않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그 선조들의 괘씸한 행악을 말하기 위해 많은 말을 사용하여 그들에게 배교, 반항, 반역, 위선 등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비난합니다.
이런 것들은 대단히 중한 문책이긴 하나 결코 과장되지 않은 것이 명백합니다.
내가 ‘향했다’ (directed ; 칼빈 사역; 한글 개역에는 분명치 않음)라고 번역한 הכין(헤킨)을 어떤 이들은 ‘세우다’로 번역하는데, 우리가 보는 이 말의 의미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을 등지고 그릇된 곁길로 갔다는 뜻입니다.
또한 곧 이어지는 말씀을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이라고 읽지 않고 그것을 “그 심령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한” 이라고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엄중히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신실하고도 꾸준하게 헌신하지 못했다는 뜻을 따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사용하여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굴복시켜 마음대로 선과 악을 향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논증거리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론은 잠시도 참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비록 선지자가 그 마음을 올바르게 갖지 못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의 목적이 사람이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에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그의 성령의 은밀한 영향력을 통해 자신에게로 돌이키심이 그가 특별히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 자신의 정욕과 부패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해서 책망을 면하리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여기서 책망되는 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시키시고 그를 섬기게 하시는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고집을 집어 던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멍에를 메어야 하며 둘째로 우리가 온유한 심령으로 옷을 입고 마음의 감정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며 정직을 추구하되 단순한 일시적인 충동적 열심으로가 아닌 거짓 없고 흔들림 없는 꾸준함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78 편
3. 본문 9절은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에브라임 자손들에게 이와 같은 불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예로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악을 행하기에 끈질기게 마음을 쏟는 자들이 단순한 교훈으로는 회개하고 마음을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에브라임 자손들에게 형벌을 가하게 됨으로써 저희가 버림받은 자들인 것이 판명됩니다.
그들이 전쟁을 좋아했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시에 뒤로 물러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불쾌해하신 증거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활을 쏘는데’ 능숙했다고 분명히 선포됩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으로 멀리 도망하는 원수들을 죽이기 위하여 이러한 무기로 무장한다고 묘사된다는 사실은 그들의 또 다른 치욕입니다.
이로부터 보다 명백해지는 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불쾌감을 샀고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도움을 빼앗으실 뿐만 아니라 저희의 마음을 위험한 때에 나약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듯이 모든 지파가 전반적으로 같은 정죄에 포함되어 있는데 어째서 유독 에브라임 자손만 책망을 받고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가드 사람들이 에브라함의 아들들을 죽였던 사실과 관련시키고 있는데 가드 사람들은 자기들이 빼앗겼던 짐승을 되찾기 위해 그들을 쳤던 것입니다(대상7:20, 21, 22).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지나치게 제한된 해석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왕국이 부패하고 거의 멸망케 되었을 때 이 시편이 쓰여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유법으로 보고 에브라임 자손들이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따르는 편이 더 좋습니다.
이런 주석가들은 물론 우리가 빼놓고 지나쳐서는 안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합니다 에브라임지파가 의도적으로 지명되는 것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이 지파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반역에 참여시키는 도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왕상12:25-33).
우리가 명심해야 마땅한 것으로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브라임 지파는 택하지 않고 유다 지파가 택해지는 대조는 결코 까닭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또한 에브라임 자손들은 하나의 대조를 이루기 위해 언급되고 있는데 이와 같이 교회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 자기 생활에서 거룩한 열매를 보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칭호를 자랑해대는 자들의 경우를 통해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시편 78 편
저희가 그 수에 있어서나 부에 있어서 다른 모든 지파들을 능가했으므로 그들의 영향력은 너무도 세어 순박한 자들을 기만했으나 선지자는 이 점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제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는 사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4. 본문 10절은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에브라임 지파가 전쟁의 날에 물러가게 된 이유로서 왜 하나님의 도움이 그들에게서 철회되었나를 설명해 줍니다.
사실 다른 지파들도 이런 점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죄가 있으나 에브라임 지파에 행해진 하나님의 보복이 전반적인 경고로서 의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전 왕국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브라임 지파가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멍에를 벗어 던져 버림으로써 모든 다른 지파들에게 부끄러운 반역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에 선지자는 백성들이 단순히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속지 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할 셈이었습니다.
그가 에브라임 자손에게 돌리는 책임은 결코 경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배반하여 모든 율법을 경멸하고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율법’과 ‘언약’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언약’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그는 분명히 생활의 모든 완전한 규칙인 도덕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예배, 거룩한 약속들의 진실성과 신실성, 또 그들 속에 있어야 할 신뢰 또한 기원 그리고 참된 종교의 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의 기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그들을 언약의 파기자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시라는 하나님이 세운 약속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가 언약이 담겨있는 공적인 기록으로 “율법”을 첨가하는 것은 아주 타당합니다.
그는 “거절하다”라는 말로 에브라임 자손의 죄의 극악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데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사려없고 분별력 없는 무모함으로 행하여 지식이나 통찰력의 부족으로 경솔히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고집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파기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시편 78 편
5. 본문 11절은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입니다.
이러한 수치스러운 불신앙은 여기서 그 기원이 배은망덕 때문인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들이 영원히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을 악하게도 잊어버리고 자기들을 위해 행해진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히 힘찬 감사를 드려야 될 하나님을 떠난 것은 짐승보다, 말하자면 괴물보다 더 어리석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베풀어진 기적을 잊지 않고 그것들이 쌓여 자신들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복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사단에게 그토록 넋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그들의 계속적인 범죄에 남기지 않기 위해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에 “기이한” 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암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 방법이 점차 쉽게 잊어버릴 정도로 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완고하고 사악하게 저희의 눈을 감았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자기들의 죄악된 행진을 억제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시편 78 편
시78:12-22 옛적에 하나님이
본 시편 기자는 성령으로 옛 이스라엘의 시작지점에서부터 그들의 신앙을 평가합니다.
옛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부터 그들 앞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곧 친히 말씀하심과 큰 기사와 기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셨을지라도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무지하고 그들의 무지한 의지는 목이 곧을 만큼 완고하여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모시지 못하였습니다 특별히 광야 40년 동안을 그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들을 훈련하셨을지라도 계속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들의 욕심대로 하나님을 시험했으며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의심하고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1. 본문 12-14절은 “(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14)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입니다.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시편 기자는 여기서도 여전히 이스라엘 후손들의 죄를 정죄하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민족의 선조에 대해서 아주 적절히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그 민족은 모두 그들의 최초의 조상 때부터 완고하고 반역적인 기질을 가졌다고 암시합니다.
시편 기자는 에브라임 자손들이 하나님의 기사를 잊었기 때문에 배신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한 후에 계속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 열조들에게로 기쁘게 말을 들리고 있는데 바로 이들이 그가 똑같은 정죄에 포함시키고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그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 애굽 땅에서 행해졌던 기적을 언급합니다.
이 사건을 그 마음에 보다 생생하게 회상시키기 위하여 그는 아주 유명한 그 장소의 이름 소안들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바다를 통해 지나간 사실을 언급하면서 앞 시편에서 우리를 주목케 했던 것, 곧 물이 그 흐름을 그치고 산처럼 단단한 벽을 이루었을 때 자연 질서가 파괴된 사실을 말합니다.
세 번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홍해를 지난 후에도 여전히 계속하여 그들의 여행에 안내자가 되셨다는 사실과 이것이 단순히 일시적인 구원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계속하여 그의 손을 펼치사 자신의 선하심에 대한 새 증거를 주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 백성이 메마르고 모래가 많은 사막지역으로 여행하기란 어렵고 지치기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구름 기둥으로 태양열을 막아 주셨는데 이는 굉장한 축복이었습니다.
시편 78 편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그들에게 보다 분명한 은혜의 표시에 불과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은 이 백성이 하늘기업에 도달할 때까지 자기의 보호아래 있었다고 증거하신 셈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전10장 1절에서 가르치기를 물을 통과하는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구름가운데서도 백성들에게 어떤 종류의 세례가 베풀어졌는데 그 세례의 열매란 덧없는 일시적 생애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에까지 뻗쳐있다고 합니다.
2. 본문 15-16절은 “(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 이 백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큰 배려를 행하셨나를 증명하셨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마실 것을 주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사실 때때로 물줄기가 반석에서 나오기는 하나 모세가 친 반석은 완전히 메마른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명백한 것은 물이 어떤 샘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심연에서부터 흘러나왔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물이 마치 땅의 바로 중심부에서 흘러나왔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물이 풍성히 흘러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밑바닥이 없는 심연에서 마셨다는 의미로 해석한 사람들은 이 말의 참된 해석을 주는데 실패한 자들입니다.
모세는 그가 쓴 기적의 역사책에서(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듯함) 오히려 더욱 그 위대함을 높이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이 가장 멀리 있는 암맥(岩挀)으로부터 물이 나올 것을 명하시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2) 동일한 진리가 다음 구절에서 확증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언급되기를 전에 한 방울의 물도 없던 곳이 크고 거대한 강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일 소량의 물이 반석에서 나왔었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얕보고 트집잡을 분명한 근거로 삼았을지도 몰랐으나 물이 갑자기 그토록 풍부하게 흘러나오게 된 이상 누군들 자연의 정상 과정이 지구에 감춰진 어떤 암맥이나 샘이 터진 것보다 더 변했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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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문 17절은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계속 은혜를 베푸심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후에, 이제 덧붙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께 깊고도 엄숙한 의무가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자기들에게 당연했던 것처럼 습관을 따라 악하게도 하나님을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그들이 끈질기게 죄악에 죄악을 더함으로 심히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나무라고 다음으로 그는 그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을 배반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배반” 이라는 말로 시편 기자가 암시하는 바는 그들이 결코 경미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가증하고 나쁜 악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저질러진 장소 또한 그 죄의 극악성을 더욱 크게 합니다.
그곳은 바로 황야로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를 눈으로 매일 충분히 보았었으며 또 이곳에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참되고 거룩하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시편 78 편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오만함과 방종한 욕망을 억제하지 않던 곳이 바로 이 광야였었습니다 더욱이 모든 것이 부족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제하여 최선의 처방을 입증하되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했어야 했을 시기에 그들이 전에 그랬듯이 그토록 방종하고 배은망덕한 태도로 행동한 것은 참으로 기괴한 얼빠진 행동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공포로 채우실 정도로 그들 앞에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기도 하셨고 또한 그들을 친절하고도 부드럽게 자신에게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8절은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언급된 “배반”입니다. 그러나 배가 고파 음식을 구할 수밖에 없을 때 그들이 단순히 음식을 구했던 것은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굶주려 하나님께 필요한 음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죄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음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저희들의 정욕대로 허리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만나로 그들을 먹이시기 시작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머지 않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음식(만나)에 대한 싫증이 그들로 하여금 새 음식을 열망하게 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늘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공급하신 것을 경멸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저희가 저희 영혼을 위해 음식을 구하여 - 칼빈 사역] 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음식을 구한 것은 굶주림 때문에 필연적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욕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정해 주셨던 음식으로 살아갈 것에 만족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이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얕보거나 멸시하면서 자신의 과도한 욕망에 자유를 주고 합법적인 것 이상으로 욕망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을 그의 변덕에 복종시키려는 듯이 행동하는 자요, 또는 하나님이 과연 자기가 정말 기쁘게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실 수 있나를 물어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뜻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뜻을 구별시키려 하거나 하나님을 그가 뜻하시는 것을 하실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려는 사람은 분명히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을 산산이 조각내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실 이상으로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를 시험하는 자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망이 우리를 자극시켜 하나님을 시험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욕망에 절제를 가하고 우리에게 그어져 있는 한계에 겸손히 만족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시편 78 편
만일 육체를 절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용한 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주 그리고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께 불평하게 될 것입니다.
5. 본문 19-20절은 “(19)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20)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 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이미 저희가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라고 말했고 이제 덧붙여서 그들이 더럽고 모독적인 혀로 속에 품고 있던 불신앙을 공개적으로 털어놓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보다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원한과 사악함이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에 거룩하지 못한 생각이 들어오게 될 때 욕망이 죄를 어떻게 낳는지를 알게 됩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을 중요시하지 않고 그 능력에 의심을 일으킬 정도로 더러운 방종으로 계속 나아갔을 때 그 죄는 그것이 정욕에 작용했을 때보다 더욱 진일보한 셈이 됩니다.
“식탁을 준비하시랴” 는 말은 애굽에서 늘 먹던 맛있는 음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결국 단 하나의 음식물로도 그들의 식성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풍족하고 다양한 음식으로 채우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라는 다음 구절은 보다 심하게 비꼰 말로써 선지자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의 뻔뻔스러운 오만함을 조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꼭 이런 식으로 말한 것 같지는 않으나 선지자는 그들 목전에서 일어난 일과 그들의 입, 또는 그들의 인격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6. 본문 21-22절은 “(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 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22)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말은 그가 모두 완전히 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그 이유를 철저히 알 때까지 범죄자를 처벌할 수 없는 지상의 재판관들로부터 취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해질 때는 곧 그가 자기 백성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시기 위해 은총과 자비를 보이실 때이며 또한 반대로 처벌되고야 말 자들, 곧 자신을 모독하는 자들을 들으신다고도 말합니다.
시편 78 편
하나님의 진노가 잔혹한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의 모든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극악성이 다시 기록되고 있는데, 곧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라고 묘사된 것입니다.
그들이 마땅히 동의하고 복종해야 했을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으나 그들은 얼이 빠져 그 약속에 결코 복종치 않았다는 사실이 여기에 논박의 여지가 없는 점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한다”는 말은 그의 아버지로서의 섭리를 의지한다는 말이요, 그분을 충분히 우리의 모든 부족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불신앙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 것이며 신앙의 참된 특성이 무엇이고 신앙에 의해 생기는 열매가 어떤 것이냐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조용히 복종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이 하나님 보시기에 특히 귀중한 것을 알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게 되고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 지배받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참된 경건의 뿌리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바라고 갈구하도록 가르치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만드는데 반해 한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항상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선지자의 의도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바라지 않는 자들이 신앙이 있는 체하는 것은 그 바탕이 잘못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을 때 구원에 대한 소망이 마음에서 신속히 생기며 이 소망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찬양케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78:23-37 그러나 저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계속해서 관용하심과 후대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극에 달하여서 무엇이 없을 때에도 범죄하였고, 또 풍족하게 주셨을 때에도 여전히 범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권능을 맛보고도 범죄하였고 벌을 받는 중에도 범죄하였습니다.
시편 78 편
그들 대부분은 잠깐동안 회개하였으나 그것까지도 아첨하는 방식의 일환이었습니다.
1. 본문 23-25절은 “(23)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주셨나니
(25)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입니다.
이 기적이 단순히 역사적으로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다 잔혹하게 책망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만나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맛좋은 음식물을 정욕대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자면 천사와 함께 참여했던 하늘의 음식을 비난하고 거절한 것은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이었습니다. 만일 프랑스나 이태리에 사는 어떤 사람이 그가 애굽 빵이나 아시아의 포도주가 없다고 괴로워하고 애태운다면 이러한 일은 그가 마치 옛날의 거인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자연을 대적하여 전쟁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상의 음식으로 풍부히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빵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데 그들이 그토록 과도히 욕심을 부렸던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긴 기간동안 굶주림을 잘 인내해 왔다 하더라도 그들은 보다 겸손하게 음식을 구하는 예의와 의무를 가져야 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먹을 것으로 지푸라기와 왕겨를 공급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장소가 광야인 것을 알고 그것이라도 하늘의 특별한 혜택으로 여겨야만 했을 것입니다.
비록 딱딱한 빵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새 음식을 창조하시고 그의 손을 하늘에서부터 뻗쳐 풍부하고도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음에야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했을까?
이것이 만나를 “하늘 양식” “권세 있는 자의 떡” 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םידיבא(아비림) 이라는 히브리어가 “하늘”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우리는 이 견해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갈대아어 주석가와 그를 따른 어떤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천사’ 들로 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기적이 높이 칭송되고 있는데 이는 그 백성들의 불신앙을 보다 미움받는 것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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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가 하늘로부터 비같이 쏟아진 것은 그들이 식물이나 과일 열매, 또는 땅의 다른 소출로 먹인 경우보다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강력히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만나를 “신령한 식물”(고전10:3) 이라고 다른 의미로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요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선지자의 의도는 그 백성들의 두가지 배은망덕함을 책망하려 함으로써 그 백성들은 땅에서 얻어진 보통 음식을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떡마저 멸시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동사를 과거 시제로 번역하여 ‘저가 구름을 명했고 - 저가 하늘의 문을 여셨으며 - 만나를 비같이 내리셨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모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 생각에 이 동사를 대과거 완료 시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곧 ‘저가 명했었고, 열었었으며, 비같이 쏟으셨었다’ 인데 이렇게 되면 신자들은 선지자가 여기서 단순히 이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있었던 이 사건을 다른 목적을 위해 회상시키는 것으로 보다 잘 이해하게 됩니다.
2. 본문 26-31절은 “(26) 저가 동풍으로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 시고 (27)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 같은 나는 새라
(28) 그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들리셨도다
(29)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
(30)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31)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입니다.
1)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그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나를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그들의 까다로운 욕망을 은혜스럽게 보아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으리라고 믿었던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셨다는 사실을 결과로써 보이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27절의 “고기”와 만나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려는 어떤 주석가들의 행동이 얼마나 분별 없는 짓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기가 주어진 이유와 만나가 베풀어진 이유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아버지로서의 직무를 행하셨으나 고기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그들의 게걸스런 욕망을 만족시키되 그들 자신의 탐욕이 스스로를 질식시키도록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만드셨다 해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시편 78 편
그런데 하나님은 바람의 힘으로 메추라기들을 모으시는 방법을 택하사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요소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또 아무리 장소가 멀어도 자신의 능력은 동에서 서로 즉각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이 없던 백성들이 모든 자연요소가 하나님의 명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복종하고 신속히 수행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악의를 품고 가치를 떨어뜨렸던 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갖게된 셈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의 위치에 따라서 바람을 일으켰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도움 없이 고기를 그들 앞에 주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리라.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라는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많은 새를 이끌어 와서 그들의 배를 충만히 채우셨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기에는 그들이 고기를 구하게 된 동기가 먹고 살 양식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지배할 수 없는 정욕 때문이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이미 위에서 만나가 대량으로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분명히 그들의 억제할 수 없는 식욕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준 그들의 탐욕을 책망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145:19 에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권리로서 ‘그들의 소원을 이루신다’고 약속하시지만 여기에서는 달리 자기를 경외하지도 않는 백성들의 완악한 욕구에 하나님이 굴복하신 것처럼 언급되어 있습니다(29절).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인자하심이 이미 떠났으므로, 곧 그의 진노를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단히 주의할 가치가 있는 본보기로서 우리의 욕망이 한계를 벗어나 솟아올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 방해를 받아 불쾌하게 되는 경우에 우리가 불평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어리석은 성향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행복의 정도에 따라 그의 은혜를 조절하실 때에도 진정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반대로 비록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선한 것 이상으로 주신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타당합니다.
그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짐을 지워 곧장 파멸로 빠지게 하십니다.
2) 시편 기자는 곧이어 (30, 31절) 이토록 잔뜩 먹이신 것이 그들에게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삼켜 버린 것과 같이 치명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그가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라는 말은 그들이 여전히 욕심으로 불붙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시편 78 편
만일 누가 이 말이 앞 절 곧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라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반론을 편다면 우리는 만일 인간의 마음이 잘 알려진 대로 이성과 절제로 묶여 있지 않는다면 그들은 만족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제아무리 풍부한 양이라도 부패한 식욕의 불을 끄지 못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30절 상반절을 ‘저희가 실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번역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희가 여전히 그 음식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라고 번역합니다.
이 후자의 번역이 의미를 아주 잘 드러내긴 하지만 이 번역은 ‘떠나다’ 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דוז(주르) 의 의미에서 너무 거리가 멉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당시 느꼈던 쾌락을 두 가지 말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 보복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지나친 미각적 희열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와’ (칼빈 사역 - 노를 발하신-한글 개역)라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그가 심판을 행하시려 홀연히 일어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을 감으시고 우리 죄를 주시하지 않으실 때는 그는 말하자면 주무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모든 사람들이 다 징벌을 느꼈으나 특별히 “살진 자”와 “청년”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보다 현저하게 나타나 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부분의 건장하고 발랄한 자들이 염병에 죽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한 자들이 흔히 그들의 힘에 속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잊고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더욱 맹렬한 불타는 것을 본다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3. 본문 32절은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여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매를 맞을 때 지혜로와진다는 일반적인 격언이 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변화되지 않아서 완전히 실망시켰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여기 나타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강퍅함을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벌이 내려져도 고치지 않았었습니다. 힘세고 씩씩하던 사람들이 죽어서 땅위에 뻗어 있는 모습은 하나님의 보복이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오싹한 광경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들의 가중할 냉혹함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사”라는 말은 바로 위에서 말한 재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전에 말한 다른 기적들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악을 갑절이나 범한 것이 됩니다.
시편 78 편
즉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저주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행하신 기적을 얕본 것에 대한 저주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 내린 재앙은 늘어났다는 말이 부가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고집 세고 냉담하며 마음속에 악을 간직한 자들에게는 일곱 배나 가혹한 벌을 내릴 것이라고 저주하고 위협하셨다는 말입니다.
4. 본문 33절은 “하나님이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소인부터 대인까지 예외 없이 모두 즉시 죽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가장 무서운 형벌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모두 멸망하리라는 말일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까웠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거룩한 땅(the Holy Land) 으로 들어가는 문을 그들 스스로 닫고 난 뒤에 40년에 걸쳐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날”(日) 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다음에 “해”(年)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살아있는 날이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 단축되고 살아 있는 동안에 그들의 기력이 쇠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해”(年) 는 헛되게 지나갔습니다. 날들이 연기와 같이 사라졌습니다.
“저희 해”가 물과 같이 재빨리 흘렀기 때문에 ‘급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히브리어 הלחכ(베할라)는 여기서 ‘급하게’ 라고 번역되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오히려 ‘소동’으로 보고 싶습니다.
소란 속에서 어떤 것이든지 강제로 빼앗기는 것과 같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급히’ 라는 말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이 말이 의미를 더 뚜렷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한 요인인 그들의 힘이 시들어 그림자와 같이 갑자기 없어져 버리는 것은 그들의 완고함에 비추어 볼 때 한 정당한 벌이 내려진 것입니다.
5. 본문 34-35절은 “(34)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 을 간절히 찾았고
(35)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오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입니다.
시편 78 편
이 기록의 상황으로 보아 이 말은 그들의 죄를 확대시킬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힘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바로 벌받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그 자신을 겸허히 하지 않고 그를 조롱하였으며 거짓된 마음으로 그를 피했기 때문에 그들의 불충은 용서받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판단력을 잃어서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무감각하기 때문에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실을 지적 받고도 계속 고치지 않거나 또는 겉보기는 그럴듯하나 거짓된 말로써 가볍게 용서를 구한 다음 다시 이전의 마음 상태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이 신실하지 못하므로 그의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고집 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든 그 형벌이 흔히 있는 것이거나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자신의 약함을 믿게 된 것은 물론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속죄감과 속죄의 기억 때문에 감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5절).
이러한 방법에 의해 그들은 모르고 죄를 지었다는 변명을 더욱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표현은 그들이 부주의하게 또는 무지로 인해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마치 고의적인 목적이었던 것처럼 방심한 상태에서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과 오만을 털어 주시면서 마치 은신처에서 광명 천지로 그들을 끌어내듯이 그들의 절망적인 약탈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6. 본문 36-37절은 “(36)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 다” 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구원한 영광을 하나님에게 진실로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배반을 비난받습니다. 그들이 전혀 감사를 드리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고백이 입에서 그쳤을 뿐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강제로 된 것이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주목할만한 값진 일인데 이로부터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그와 다른 말을 내밷는 엄청난 위선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는 의무와 숨은 위선 즉 죄지은 자가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노예 근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거나 피할 수 있는 위선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시편 78 편
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이 병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그들로부터 어떤 종류의 외경(畏敬)을 끌어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진실된 불빛이 완전히 꺼진다면 그것은 그들이 좋아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찬성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찬성의 말이 진실하고 순수한 감동을 수반해야 하며 그리해서 우리의 마음이 표리가 있거나 나뉘어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이 ‘정함이 없으며 성실치 못하다’ 라고 위선의 원인과 근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는 무엇이든지 거짓 없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과 속임수로 간주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직함이 계율 어디에서나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그들다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그들을 언약파기자라고 저주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우리 믿음의 상호관계와 교신(交信)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 믿음의 꾸밈없는 동의가 하나님 언약의 성실성에 응답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78:38-51 오직 하나님은
앞에 말한 모든 죄들은 그들의 신종하지 않은 일들과 상관된 것이고 여기서는 그들이 배은망덕한 죄를 길게 논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정복까지 가능케 하여 주신 역사적 사실들을 지적하여 그 받은 은혜가 지대함을 말하였습니다.
1. 본문 38절은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이스라엘 사람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건전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더 완전히 보여주었고 이제 비록 하나님이 그들의 겹친 죄악을 참으셨고 그들을 용서하심에 자비를 베푸셨으나 그들은 그가 인자함을 베풀 때마다 그것을 악용하고 그가 그들을 혹독하게 대할 때는 고집 세고 끈질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편 78 편
동시에 그들이 완전히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가 지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한가지로 멸망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들 중 몇 사람은 살리기로 선언하셨습니다. 아무도 이미 언급된 이 보복의 예로서 하나님께서 전대미문의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고 추론할 수 없으며 정말 그들이 저지른 누적된 죄악에 비하면 온건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마땅히 처해져야 할 것에 그렇게 많이 눈을 주지 않고 그의 자비에 자리를 내주기를 원하는 양 그의 손을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한때는 우리에게 심한 벌을 주시고 어떤 때는 온화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고 해서 그가 변덕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비할 데 없이 높은 지혜를 사용해서 우리를 회복시킬 희망이 진정으로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실 다른 수단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은 더 누적되어 그의 벌도 인간을 뜯어 고쳐놓지 못하고 그의 자비하심도 인간의 죄를 녹이지 못합니다.
하나님 속성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인 자비는 그가 왜 인간을 용서해 주시는가 하는데 대한 이유로서 그는 오직 그 스스로 그렇게 많이 용서를 원하시고 또한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여기서 지적해 줍니다.
나아가서 그가 인간을 한때 한가지 점에서 용서하시지 않았을 때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라는 말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번화를 치밀었지만 계속 그 화를 가라앉히셨으며 끝으로 그는 인간이 그가 내린 벌의 무게에 질리지 않도록 형벌을 경감하셨다는 사실도 확인됩니다.
2. 본문 39절은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정하시는 다른 한 이유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78 편
이 세상에서 잠시 살다가 죽도록 만들어져 있는 인간에게 그의 크신 흠을 쓰지 않으려고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사용된 표현은 인간의 조건이 불행한 이유인 약함을 나타냅니다.
“육체” 와 “영”은 성경에서 번번히 대조됩니다.
“육체”는 타락하고 죄짓는 속성을 의미하고 “영”은 신의 아들들이 다시 태어나는 정직성을 의미할 때만이 아니고 인간 내부에 굳고 영속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육체”는 인간을 지칭할 대도 사용됩니다.
이사야 31장 3절에서 “애굽은 .....사단이요, 영이 아니다” 라고 말한 때가 이 경우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러나 “육체”와 “영”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육체’는 인간이 썩고 부패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영’은 인간이 한번의 숨, 또는 달아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은 계속 소모되고 쇠락해서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인간은 지나가 버리고 저절로 떨어지며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경주를 할 때 지상에서 우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욥14:7-10) 라고 말했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이제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거니와 하나님은 그의 자비와 선을 발휘하셔서 유대인에게 참고 견디셨다는데 그들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약하고 덧없는 운명이 그로부터 동정심을 불러냈고 인간들을 용서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시편103편 13-16절에서 이와 유사한 말,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는데 그것은 인간이 풀과 같은 존재여서 곧 시들고 건초같이 마른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오직 비참함을 발견하고 우리를 동정한다면 우리를 지켜주도록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하심과 그의 과분한 선하심입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삶의 과정을 끝내면 ‘돌아오지 않는다’ 고 말하게 될 때, 그 말이 미래의 부활의 희망이 제거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만 생각하게 되고 지상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상황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78 편
인간이 천상생활(天上生活) 로의 변혁은 자연을 훨씬 능가하는 한 기적인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다른 곳, 즉 지혜서 16장 14절에 “한번 나가 버린 생기를 다시 불어 넣을 수는 없으며”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은 인간이 태어날 때 중생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미래의 구원에의 희망은 가지고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3. 본문 40-41절은 “(40)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41)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새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입니다.
여기서 앞 문장이 옳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즉 광야에서 그들이 수많은 범죄로 그렇게나 여러 번 하나님의 분을 돋구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에게 자주 자비를 베풀고 감싸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천 번은 멸망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장이 의문형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은 쉬지 않고 죄를 지었다는 말이 더 의미 있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광야” 라는 말에는 장소와 시간적인 상황이 모두 포함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심지어 매일 그 은혜를 목격하면서도 그들이 너무 교만해 있어서 최소한 자신들의 죄악을 점검해 볼 수조차 없었던 배은망덕함을 꾸짖으며 둘째로 그 짧은 동안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한 그들의 성급하고 분별 없다는 사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41절) ‘저희가 그의(칼빈 사역) 이전의 상태로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했다’ 는 말로 이어집니다.
‘돌이킨다’ 라는 변화를 의미하지 않고 여전히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저질러진 가증스러운 모욕이 아름다운 비유로 표현되었습니다.
הות(타바)는 ‘구별하다. 묘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대로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려 할 때, 그는 말하자면 나무 또는 철제 빗장 안에 가둬지고 그의 무한한 권능은 불신자들이 제한하려는 좁은 경계 속에 제한 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표시합니다.
확실히 인간은 자신의 이해의 한계를 넘지 못할 때 신을 자신의 작은 능력으로 하나님을 재려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그의 좌(座)에서 끌어내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의 권위는 우리가 마음대로 그를 규정하려 할 때 우리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78 편
4. 본문 42-43절은 “(42) 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43) 그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 징조를 소안 들에서 그 기사를 나타내사” 입니다.
기자는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을 나무랍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을 계획적이며 악의적으로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신의 은혜를 단순히 기억하는 일조차 그들을 구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신앙의 망각에서부터 모든 고집셈과 반항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손’ 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환유법에 의해 그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선택된 그래서 축복 받은 족속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손은 새롭고 이례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그들의 보충은 이제 선지자의 힐난 대상인데, 그들이 한시도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서는 안될 것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능의 구체적인 예를 처음에는 “징조”로 그 다음에는 “기사”(43절) 라고 표현하면서 하나씩 열거하고 그것들을 읊음으로써 사람들의 그 치욕적인 우매함을 다시 힐난합니다. “징조” 와 “기사”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나오는 “기사” 라는 말은 당시 그 이상한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애굽 사람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빨리 사라져서는 안될 만한 지독한 두려움을 일으켰다는 의미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5. 본문 44-49절은 “(44) 저희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저희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45) 파리 떼를 저희 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46) 저희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시며 저희의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47) 저희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저희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48) 저희 가축을 우박에, 저희 양 떼를 번갯불에 붙이셨으며
(49) 그 맹렬한 노와 분과 분노와 고난 곧 벌하는 사자들을 저희에게 내려보내셨으며”
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하심에 자신의 권능의 형적을 나타내신 기적들을 순서대로 열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유명한 사건들을 기억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비난받아야 할 악과 배은망덕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78 편
모세 설화가 여기서 잠깐 언급된 사실을 보다 더 확실하고 완전하게 말해 줄 것이므로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신자에게 기억시키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종종 이교도에게 우박과 기타 재앙을 보내어 그들을 벌하셨지만 당시 애굽인에게 내려진 모든 재앙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며 이전에는 없던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분과 화와 노와 고통을 보내시어’ 와 같이 어휘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러한 가혹한 하나님의 보복 사례들을 더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휘를 그렇게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잠자는 마음을 깨워 그 많은 기적들을 보게 했으며 그 어휘의 수와 강력함은 눈먼 사람에게도 감지될 정도였습니다.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심판을 “사자” 들을 통하여 행하셨다고 부언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가 즐겨하시는 데로 하늘과 땅에 어떤 율법을 세우고 자연의 모든 질서를 개개의 피조물에게 자신의 독특한 임무에 따르도록 예정된 방법으로 다스리시지만 원할 때는 언제나 자신의 명령을 집행함에 사자들을 대행시키셨고 그 방법으로 정례적인 것이기보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신비한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 중에 여기서 “사자”라는 말이 ‘악한, 또는 해로운’이라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기 때문에 천사가 아닌 ‘악마’를 대행시켰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견해를 우리는 반대하지 않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별로 견고치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선택된 인간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셨듯이 버려진 천사를 시켜 마치 그들이 집행자인 것처럼 그의 진노를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나 항상 이러한 구별이 있었다는 말은 부정합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그 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성읍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그들의 진중을 쳐부수고 포위를 풀게 만든 것은 교회 방위를 위임받았던 천사가 아니고 누구였던가?(왕하19:35)
이와 비슷하게 애굽에서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는 천사(출11:5)는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집행자요 종이며 또한 이스라엘 보호 임무를 띤 사자입니다.
한편 다니엘의 입에 오른 왕들은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나아가서 약탈자이며 모든 혼란을 야기시키나 다니엘은 신성한 천사에게 그들을 벌주는 일을 맡겼습니다(단20:13).
애굽 사람들은 응분의 벌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타락한 천사들에게 붙여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천사들을 “맹렬한”이란 말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맡은 일,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적들이 자행한 독재와 폭력을 진압하기 위해 무서운 재앙을 부과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시편 78 편
이렇게 해서 하늘에 있는 선택된 천사와 타락한 천사 모두 재앙의 집행자 또는 심부름꾼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양자간의 어감상(語感上)의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전자는 하나님에게 신속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복종하고, 후자는 그들이 항상 해악을 끼치기를 열렬히 바라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뒤엎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 적격자들입니다.
6. 본문 50-51절은 “(50) 그 노를 위하여 지도하사 저희 혼의 사망을 면케 아니하시고 저희 생명을 염병에 붙이셨으며
(51)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가장 명백하고 두드러진 선의 증거에도 인간들이 그 앞에 복종하지 않자 이 배은망덕한 인간들의 변명을 제거시키기 위해 여기서 다시 애굽 땅을 급류와 같이 휩쓸고 지나간 하나님의 분노가 다시 반복됩니다.
그 기사란, 마지막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의 능력 있는 손을 시켜 어느 날 밤에 애굽에서 처음 태어난 것을 모조리 죽인 일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일반적이고 보통 많이 사용하는 화법에 따르면 초태생은 ‘시작’ 또는 ‘기력의 첫 열매들’ 이라고 보통 불립니다.
늙은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기력이 쇠해 죽음에 이르렀지만 자손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쇠진한 그들의 기력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에 ‘기력’ 이라는 말은 그들의 자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첫째 태어난 것’ 이란 창세기 49장 3절에 더 자세히 설명했듯이, 이 기력의 ‘시작 또는 첫 열매’로 불립니다.
애굽의 가정은 애굽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인 미스라임이 창세기 10장 6절에 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함의 장막’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함의 자손들보다 셈족의 편애를 받을만한 고유한 특성도 지니지 못했으나 여기서 하나님은 함의 자손보다 셈족을 더 사랑하시며 그 사실이 여기서 축복됩니다.
시편 78 편
시78:52-58 자기 백성을
여기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시고 불러내셔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원수들은 제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중에 거하시면서 자기 백성 삼으셨으나 여전히 우상에게로 돌아간 중한 죄를 아프게 말하고 있습니다.
1. 본문 52절은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같이 지도하셨도다”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가 양 떼와 비교하는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방어할 수 있는 지혜나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목자장이 되어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자신의 양 떼로 삼으사 조금도 싫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먹이시고저 자신을 낮추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품고 계시는 독특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전술에 대하여 결코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군중이 강력하고도 호전적인 원수들에 대항하여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전술을 배우기는커녕 이 백성들은 마치 광산과 채석장 지대에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선고라도 받았던 사람들처럼 애굽 체류 당시에는 천하고도 굴욕적인 노동에 종사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아는 바 그대로입니다.
2. 본문 53-54절은 “(53)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54)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입니다.
시편 78 편
이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확고하고도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생계를 보장해 주셨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장에 사로잡힐 때는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했을 때였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자마자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따라서 그들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다음과 같이 불평에 찬 질문을 토로한 것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다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그러므로 본 구절이 노래하고 있는 안전도 백성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안전 의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을 홍해에 수장시킴으로 그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안정과 평온을 만끽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기타의 축복들과 동시에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배은망덕함을 보다 뚜렷이 폭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약속되어진 기업을 소유하게 되자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았었던 것처럼 그들의 심장은 언제나 반역과 반항 일변도로 움직였습니다.
그들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께서 그가 개시하셨던 일을 성취하고저 결심하지 않으셨더라면 성취, 말하자면 그들은 해방시키는 마무리 작업은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그 진입이 거부당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땅은 “그 성소의 지경”(54절) 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의 백성에게 배당하시면서 또한 그 땅을 자기 자신에게 성스럽게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고대의 부패했던 땅으로 이 땅을 다시 부패시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다 가증스럽고도 더욱 악화된 조명 안에서 보게 됩니다.
이 땅의 옛 거주민들이 그들의 가중한 행위 때문에 그 땅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사악함의 영역에서 그 옛 거주민들을 능가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참으로 마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던 하나님의 보응을 그들 자신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저 굳게 결심한 사람들 같습니다. 혹자는 이 “산”이란 낱말을 유다의 전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78 편
사실 유다는 산악지대이긴 하지만 평야도 있을 뿐 아니라 넓이로 보나 길이로 보나 광대한 평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셨던 주거지인 시온산과 그의 보좌를 말한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는 제유법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 구절은 한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근원과 원천의 경우와 같이 이것으로부터 전 땅의 거룩함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이 장소의 이름이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자들이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오른손으로 이 산을 소유하시고 획득하셨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히브리어 동사 הנק(카나)는 이러한 의미들의 하나로 이해되어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자신들의 능력으로 땅의 정복을 완수했던 것처럼 혹은 평화스럽게 그 땅을 소유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긍지와 자만심에 들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것은 시편 43편 3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실 연고니이다”
3. 본문 55절은 “또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시게 하셨도다” 입니다.
이 문장은 앞 절의 결론 부분에 대한 일종의 설명입니다.
이 문장은 이스라엘에서 있어서 이방인들을 몰아 내는 것이 손쉬울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전적 민족이 아니라는 점과 이방인들은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에서 승리를 얻지 않았거나 그의 힘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된 경과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시편 78 편
더욱이 만약 원주민들이 그 땅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하며 낯선 민족이 그들 대신에 그 땅에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소유하는 것은 무법적인 횡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4. 본문 56-57절은 “(56) 그럴지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여 그 증거 를 지키지 아니하며
(57) 저희 열조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가서” 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특별히 생각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많은 표지에도 불구하고 완악한 행위를 계속했기 때문에 질책을 당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베풀어 주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도록 그들을 소생시켜 주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역함으로써 하나님이 지워주신 멍에를 벗어 던졌습니다.
‘시험하다’ 는 낱말에 관해서는 이미 그 의미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본 문장에는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가 일반적으로 부가되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공연하고도 커다란 반역을 보다 완벽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미를 충분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증거’ 혹은 ‘동의’ 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떠한 조건 위에서 약정 관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계약을 통하여 이 백성과 약정 관계를 맺으시며 그들을 자기에게 구속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련에서 그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가벼운 비난조차 그 백성들에게 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그들이 배반과 불성실한 죄를 범했다는 혐의를 받게 됨으로써 그들의 죄악의 정도는 극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수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경멸을 보내면서 자발적으로 그것을 배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신의 날개 아래 함께 불러모았으나 백성들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립니다.
시편 78 편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미혹에 빠져 자신들을 파멸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모든 시대에 백성들은 자신들이 불경건하고도 사악한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결론짓고 그리고 다시 주목되어야 하는 사실은 그들이 정죄받는 가장 커다란 과오는 그들이 자신들의 선조들을 너무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무작정 자신의 선조를 모방하면서 자신이 정당한 일을 수행한다고 착각하거나 그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한 논거로서 선조들의 경우는 끌여들여서는 안된다고 가정하면서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특별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안정성은 다음 구절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 표현되었는데 호세아 역시 그의 예언서 7장 16절에서 이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궁수들이 소유한 활이 너무 약하고 잘 당겨지지 않거나 혹은 휘어지고 너무 연하면 궁수는 그 활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그들의 기만적이고도 비뚤어진 교활함을 활용하여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전혀 다스리실 수 없었다고 진술되는 것입니다.
5. 본문 58절은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거부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거부했던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는 일종의 변절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모든 면에 있어서 통제되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곡해되고 훼손될 수 있다는 경고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그들은 그의 전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 자신의 멋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모독 속에서 획일적으로 맺힌 열매들, 즉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이해를 따르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커다란 미신에 접붙임을 입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두 가지로 훼손당했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첫째 그들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세우고 형상을 새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켰고, 둘째 하나님의 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괴이하고도 금지된 의식을 만들어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켰습니다.
시편 78 편
시78:59-66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생활 방식과 모든 제도들을 계시로 알리셨으나 여전히 이방인들과 같이 자기들 소견에 옳게 여기는 대로 자기들의 산당에 자기들이 고안해 낸 방식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각양 진노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심 때문에 용사같이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시며 그 대적들을 길이 복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1. 본문 59-60절은 “(59)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는 보다 극악스럽게 죄를 조장하는 것으로까지 곡해되었던 하나님의 오랜 고통의 결과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마침내 그들에게 엄한 형벌을 내리시고자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지상의 재판관의 경우에서 차용할 이 은유를 성서에서 자주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 심문을 하시는 일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하찮게 움직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또한 하나님은 경솔하게 행동하신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의도는 사람들이 끈질기게 사악한 행위를 계속 자행했으며 마침내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형벌의 무게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사악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시편 78 편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이 그의 눈에서 혐오스러움으로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이후 그들은 모든 재난 중에서도 참 행복과 안락의 유일한 근원이던 하나님의 현존에서 쫓겨남을 당했다고 부기하고 있습니다(60절).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께서 유다를 떠나셨고 그 백성들에게 작별을 고하셨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언약궤가 다른 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허용하실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상징에 유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이스라엘 사이의 밀접한 관계의 기념 혹은 상징으로 이 언약궤를 주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통 중에 그것이 옮겨졌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그는 증언했습니다.
오랫동안 언약궤가 있던 장소요, 블레셋인들이 그것을 탈취해 간 장소인 실로는 ‘하나님의 거주지 혹은 머무시는 곳 ’이라고 불리웁니다.
한 마디로 그의 거주 방식을 실로는 ‘인간에 세우신’ 하나님의 거주 장소라고 묘사된 다음 문장 중에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충만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높이 들리신 그 무한하신 높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과 은총을 행하시어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심으로 그는 필요한 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그리고 우리의 제한된 능력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지상에서 택하신 유일한 장소인 이곳을 포기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줄기찬 사악함 때문에 분노를 갖게 되셨다는 사실을 가장 강조해서 표현한 말인 것입니다.
2. 본문 61절은 “그 능력 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입니다.
동일한 주제가 본 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켜 주셨으며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은 포로에 붙여졌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이 오직 외부적인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전처럼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대적하시는 대신 그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던 은혜가 포로로 잡힌 바 되어야 마땅한 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블레셋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포로로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장수가 사로잡히자 전 군대가 패주하는 데서 보여지듯이 그들이 적들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칼빈 사역; 자기 영광 -한글 개역) 이라고 또한 불려지고 있습니다.
시편 78 편
전혀 불가시적이신 분이신 하나님은 그 언약궤를 그의 임재의 상징으로 말하자면 그를 보여주는 거울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불레셋인들에 의해 포로에 붙여졌다는 표현은 언뜻 읽기에는 대담하고도 불합리한 과장적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악함을 뚜렷하게 폭로할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자신의 팔을 능력있게 펼치곤 하셨기 때문에 그의 능력의 상징이 이방의 군대에 의하여 강제로 탈취당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보아 그를 격분시켰던 죄악들은 아주 사악한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겠습니다.
우리는 예언자 예레미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을 배웁니다(렘7:12).
즉 여기에서 실로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향유하고 있다는 허위에 근거하여 스스로 만족하여 헛된 신뢰에 사로잡혀 들떠 있는 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정하게 다가오실 때 만약 우리가 경외심을 갖추고 전정으로 그 분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로의 백성들에게 임했던 것이 우리에게도 닥치리라는 두려움을 갖게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로마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고 주장하는 교황과 그 추종자들의 자만은 예전에는 바로 그 도시에 교회가 융성했다는 사실에서 가히 혐오스러운 작태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셨으며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에서 거하시며 설교하셨다는 사실, 그들은 바로 이점을 망각한다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도시들이 오늘날에는 비참하게도 황폐화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무서운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3. 본문 62-64절은 “(62)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63)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저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64)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입니다.
1) 엘리 대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에 닥쳤던 다른 형태의 재난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언약궤가 탈취 당하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 들이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편 78 편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모든 꽃들을 쓸어버리셨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택된 자들 중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장정들이 불이 아닌 적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는(삼상4:10) 역사적 사건을 암시함이 분명한 이 언어는 은유적입니다. 이 장면은 무서운 재난이 창졸간에 닥쳤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본 절은 마치 불꽃이 왕겨와 나무의 마른 잎을 순식간에 태워 버리는 것처럼 그들 역시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을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2) 또 하나의 장면이 이 살육행위의 커다란 처참상을 말해 줍니다.
즉 청년은 수자가 모자라고 이에 따라 처녀들은 미혼상태를 벗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라는 구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축하하기 위하여 불려지는 ‘결혼축가’를 의미합니다. 무섭고도 끔직한 이 재난의 성격을 보다 부각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시는 ‘사제’마저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무차별하게 멸망을 당했다는 사실이 첨가됩니다.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라는 구절은 그들이 애당초 슬픔에 겨워 있었기 때문에 애곡을 할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적들에 의해 사로잡힘으로 애곡이 금지되었다든가 하는 둘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고 우리는 봅니다.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숱한 종류의 재난들이 그들을 엄습했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4. 본문 65-66절은 “(65)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일어나사 (66) 그 대적을 쳐 물리쳐서 길이 욕되게 하시고” 입니다.
1) 혹자는 주께서 이스라엘 때문에 깨셨다고 주장하면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라고 이해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66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대적’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분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겠으며”(사1:24)라는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의미는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인내에 격려를 받아 죄를 더욱 크게 저지름으로써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한 대가를 받았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깨어나셔서 격렬한 분노를 그들에게 터뜨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그들의 이름을 모세로부터 전용하고 또한 모세의 언어를 기준으로 거기에 맞추어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이 구절과 다음 구절들이 불레셋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시편 78 편
여기에서 선지자는 이 순서를 모세의 노래(신32:27)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벌하시는 동시에 그들의 적들을 멸하시는 일 또한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모세의 도래에서 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택된 백성의 적들이 승리를 차지한 이후에 설령 어떠한 변화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전쟁의 이유가 불명확하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백성들이 받게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한 형벌이었다는 것은 꼭 자명하다고 볼 수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에게 괴로움을 가하고 겸손하게 한 이후 이제 하나님은 인간들의 기대를 넘어, 그리고 일반적인 사건 경과에 일어나는 것과는 모순되게 인간을 도구로 삼음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복자들에게 자신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굴욕을 당하게 될 때 그것은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사실이 보다 분명하게 알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선지자는 하나님은 아주 엄격히 그들을 벌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합니다.
불레셋인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 후에 하나님은 잃어버리셨다는 사실에 틀림없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 쉬운 그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여러모로 예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하나님은 잠시 블레셋 편을 들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약속의 진리가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로부터 그의 사랑을 전적으로 포기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2) 술취한 사람에 대한 표상은 다소 거슬리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백성들의 어리석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채택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표현은 적절한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순결하고도 명확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이렇듯 굳이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자기의 백성들에게 대하여 타인처럼 대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술취한 자와 비교하심으로 곧 백성들의 술취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그들의 무감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 은유는 그것의 영광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우리들의 재난을 치유해 주지 않으면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시편 78 편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거인들보다 더 능력 있는 분으로서 거인들조차도 오랫동안을 어렵지 않게 지켜 보호하고 짧은 잠에 만족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잠에 들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내를 보이시고 그의 심판을 성급하게 행하지 않으심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행동을 어리석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빈둥거린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선지자는 돌연한 하나님의 분기가 처음 심판을 행하시고자 최초에 그의 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무섭고도 놀라운 일이 되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마치 포도주에 취한 거인이 그가 자신의 잠을 충분히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잠으로부터 돌연히 튀듯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대적을 쳐 물리쳐서”에 관한 66절의 진술을 삼상5:12절에 기록된 블레셋인에게 임했던 ‘역병’ 이라고 봅니다.
“길이 욕되게 하시고” 라는 구절은 이 해석과 잘 일치를 이릅니다.
항문에 치질이 걸린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병이기 때문입니다.
시78:67-72 또 요셉의 장막을
결론적으로 이 시인 당시 이스라엘의 복된 상황을 말합니다.
이렇게 이 시인의 역사담이 이스라엘 초기로부터 다윗 시대까지 미치고 끊긴 것을 보니 이 시편은 다윗 시대에 살던 성도의 작품인 것이 분명합니다.
1. 본문 67절은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입니다.
1) 66절의 “대적”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구절들을 앞 절과 관련시키며 하나님이 치셔서 다친 자들을 치유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취하려는 견해는 그 적들이란 블레셋인들을 가리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을 내리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적들에 대하여 끔직할 정도로 복수를 해주셨기 때문에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계약은 무효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것이며 우리가 하고자 하는 설명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사악하게 대적했던 그의 백성들과 완전히 화해를 하신 것도 아니며 이 증거로써 그들 사이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렸던 형벌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정정의 방법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시편 78 편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불레셋인들이 언약궤를 탈취해 갈 때 자신의 백성의 죄에 취해 하나님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응당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지킬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잠에 골아 떨어져 계시지 않았으며 불경한 블레셋인들이 자신의 영광을 조롱하는 것을 보실 때면 언제나 이 사악한 범죄는 마치 잘 마시고 취한 거인이 그 포도주의 취함으로부터 회복되기 전에 그의 첫잠에서 깨어났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깨웠고 격분케 했습니다.
동시에 그의 분노는 이방인과 할례 받지 않은 민족에게 유발됨으로 말미암아 그가 사악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내렸던 징벌의 어떤 상징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궤가 다른 장소로 탈취되도록 방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특권에 의하여 구별함을 받았었던 영예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한 것은 두 가지 원칙적인 사항입니다.
첫째, 불레셋인들이 꼴사납게도 궤양에 의해 쓰러진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증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궤양에 의해 또한 쓰러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러한 일이 벌어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새로운 힘을 회복하거나 잠시 후에 승리를 거두었던 불레셋인들을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롭게 군대를 모집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이 일을 행함에 있어 그는 외국 군대의 힘에 의존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의 사항은 비록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계약을 기억하고 계심과 그가 선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불레셋인에 대항하여 그의 손을 펼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해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분노의 영원한 기념비로서 실로를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에브라임 지파 역시 배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영원한 그들을 버렸거나 그들을 교회의 나머지 지체로부터 완전히 잘라내 버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언약궤를 그 지파의 경계내에 더 이상 두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다 지파는 여기에서 에브라임 지파와는 반대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즉 하나님은 자신의 거처로써 유다 지파를 택하신 것입니다.
시편 78 편
3) 이렇듯 선지자는 언약궤의 위치가 시온산 위로 정해짐으로써 백성들은 어느정도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화해의 상징이 그들에게 회복됨으로써 그들은 그들과 떨어졌던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되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의 힘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은 이를 기억함으로 하나님은 자신들의 사악함을 증오하신다는 사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전에 머물렀던 장소를 더 이상 고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비록 사람들을 가르쳐 다가오는 시간에 보다 주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던 결별 이후에 완전하고도 충족된 회복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그 자신이 친히 행하시는 기이한 선함과 자비의 표현이었던 자신의 언약궤의 고정된 거처를 선택하셨습니다.
복귀 이후에 이 언약궤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즉 가사, 에그는 및 기타의 장소로 옮겨졌는데 이러한 이동은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산을 언약궤의 고정장소를 지시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 과도적 기간에 주목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의 의도가 형벌의 사례와 그 누구도 감히 희망조차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시키고자 하는 것 뿐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종종 반복한 것은 또한 기억되어야 마땅합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12:5)
실로는 오랫동안 언약궤가 머물렀던 곳인 관계로 이 명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대적의 땅으로 넘어감으로 그들이 하나님이 그 미래의 거처로 택하신 장소를 알기 전까지 그들은 당혹감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열 지파는 이때 추방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왕국과 유다지파와 더불어 사제직에 동일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반역을 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에브라임 족속이 추방되었으며 그 선조격인 요셉 족속은 택함을 입지 못했다고 조롱하는 이유입니다.
2. 본문 68절은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은 다른 백성들보다 유다 지파를 좋아하시어 그들 중에서 왕을 택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전 이스라엘 위에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온산을 자기 성소의 자리로 택하셨습니다.
시편 78 편
이러한 선택의 이유는 하나님밖에 알 자가 없습니다.
다른 어떠한 장소보다 시온산이 선택된 사실과 시온산이 독특하게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분에 넘치는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관계대명사 Which는 여기에서 원인부사인 for 대신에 쓰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성소가 장소의 어떤 가치 때문에 거기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기쁨 때문에 거기에 세워진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백성들의 회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하실 때 보여졌던 첫 번째 경우의 자유로움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였다는 점은 타당합니다. 이 장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관심인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교회는 애당초 그리고 어느 때나 하나님의 순전한 은총과 선함에 의해 모여졌다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인간이란 결코 어떤 본능적으로 가치 있는 권리를 그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교회는 인간의 능력에만 의존되기는 너무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3. 본문 69절은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입니다.
이 구절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은 시온산이 고고하게 미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하늘의 모습을 지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백성의 마음이 그 건물의 장대함에 의해서나 혹은 외견상의 의식의 화려함에 의해 전적으로 압도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전의 섭리의 제 비유들의 진리를 계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접근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지으시고 말하자면 그 성소가 모든 높은 산들 가운데서도 우뚝 솟아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사야 2:2절이나 미가 4:1절 마저도 새롭고 영적인 성전건축을 예언하면서 그것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을 위해 뛰어나고’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요새들이 높은 고지 위에 세워졌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시온은 이제 이 지구 전체와 비교됩니다.
‘그의 성소를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땅 중의 어떤 지역은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땅의 열림에 의해 멸망하기도 하고 어떤 격렬한 동요에 의해 교란되기도 하고 숱한 변화를 겪습니다.
그러나 이 땅 자체는 항상 흔들리지도 않고 변화되지도 않는 채 계속 존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깊은 근거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78 편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건물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폐허로 전략하거나 다른 사건에 의해 파괴될 위험을 가지고 있는 왕들의 호화스러운 왕궁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끝에 뿌리박고 세워져 있습니다.
만약 누가 성전이 갈대아인이나 앗수르인들에 의해 파괴되어졌다는 것을 반대한다면 우리의 대답은 명백합니다.
즉 찬양 받을 견고함은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비유에 불과했던 고대의 성소가 그것을 형상화했던 것에 대한 관련없이 단순히 그것 자체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공허한 그림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장차 존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한 서약으로 행하셨기 때문에 영원성은 마땅히 그것에로 귀속되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시편87편 1절에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그리고 이사야 14장 32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라는 구절들,
그리고 다시 시편74편 2절에 하나님은 “주의 거하신 시온산” 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는 시온산에 거하시는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소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4. 본문 70절은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입니다.
성전에 관하여 언급한 후에 선지자는 이제 왕국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전과 왕국 이 둘은 하나님이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다는 사실과 그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우리의 왕과 제사장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양 우리와 소를 기르는 일에서 끌어내어 왕으로 삼아 보좌에 앉히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한 종이 위엄에까지 높여졌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적지 않게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게 합니다.
이 은총은 다윗 일개인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자비의 샘으로부터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사람의 전반적인 영광과 행복은 왕국과 사제직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들 양자는 하나님의 순전한 은총과 선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편 78 편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시작이 약하고 조롱받을 만한 정도였으며 하나님은 그가 우리의 구원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외부적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명백하게 보여주셨을 것이라는 점은 필요했습니다.
71-72절은 “(71)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 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양 지키는 자였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그 기업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는 상황에서 더욱 칭송되어집니다. 다윗의 본래적인 직업과 비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에게 좋은 군주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는 먼저 누구나 목자 같아야 함을 말함으로써 선하고 의로운 왕과 독재자, 강도 그리고 탐욕스러운 착취자들 사이의 구별을 보여주십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의무로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이 부기를 통해 선지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하고 불가침적인 순서를 뒤집어 엎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유익한 멍에를 떨쳐 버림으로 비참하게 분산되어 버리고 말았던 백성들의 배은망덕함과 사악함을 간접적으로 질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손이 공교함’ 이 뒤따라 나오는 것은 이 표현의 부적절한 형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가 수행했던 것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그의 길에 나타나는 아무 일에나 경솔하게 손을 대지 않고 신앙과 의무가 그에게 요구하는 일만을 공교하고 유능하게 수행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렇듯 그가 행한 일이 성공을 거둠으로 그의 지혜는 그의 좋은 운명보다 더욱 뚜렷하게 돋보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