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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룻기 2: 14-23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일에 보답하는 분이십니다. 또한 주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상을 주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위에서 무엇보다 그녀가 과거의 우상 신을 버리고 주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온 사실에 감동하여 주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절).
이에 룻은 큰 감격 가운데 겸손히 감사를 표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13절).
그 날 아침만 하더라도 룻은 그 날에 발생할 일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룻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섭리 가운데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고 심지어 보아스를 만나게 되더니 그 밭에서 맘껏 이삭을 주울 수 있게 되었고, 생수를 마시게 되었고, 또한 안전한 보호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자신의 삶을 던진 모압 여인 룻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실 룻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였습니다. 즉, 룻이 믿음으로 얻은 복은 이 땅에서의 안정되고 풍성한 삶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얻은 최고의 영원한 복은 본인 자신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뱀의 머리를 때리실 여인의 그 씨인 메시아의 조모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을 룻에게 베푸신 이유가 룻이 어떤 큰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매일 진행되는 평소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나타내자 이러한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기를 힘쓰며 평소에 주의 뜻을 찾아 행하기에 온 힘을 다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를 통해 주의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매일 주와 동행함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토대인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이에 바울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이제 어느새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룻에게 자기 식탁으로 올라오라고 권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룻 2:14).
룻은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자기 식탁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이는 보아스가 룻을 자기 가족처럼 대우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초청은 보아스의 편에서 대단히 큰 은혜와 자비를 보여주는 초청이었습니다.
신구약을 배경으로 할 때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같은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 대해 언급할 때 “나와 함께 (식탁에서) 먹는 자”(막 14:18)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 역시 함께 식탁을 나눔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이 되자 친구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의 아들 므비모셋을 선대합니다. 이때 그 선대는 왕의 식탁에서 함께 떡을 떼는 것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더라](삼하 9:6-7).
즉, 보아스는 룻을 그의 식탁으로 초청함으로 그녀를 드높여준 것이고 또한 자신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도 보아스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룻들에게 그분의 식탁으로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지혜 그 자체가 되시는 주 예수께서는 하늘 잔치를 마련하시고 누구든지 초청하십니다.
[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잠 9:1-6)
그러나 교만한 인간들은 영원한 왕이며 주이신 그리스도의 초청을 멸시하고 거절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존귀하게 될 수 있는 최고의 초청을 거절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합니다.
[18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눅 14:18-20)
예수께서 주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
이처럼 룻을 향한 보아스의 식탁 초청은 룻에게 복을 주려는 보아스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으로서 지극히 자신을 낮춘 겸손에서 나온 초청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직접 룻에게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 매우 시장한 가운데 있던 룻은 그 음식을 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볶은 곡식을 남겼습니다. 룻은 그 남은 음식을 나오미에게 가져다 줄 생각을 하고는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사실 모세의 법이 정한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밭에 이삭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모세의 법을 훨씬 뛰어넘어 룻에게 자비와 은혜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호의는 모세의 율법의 강령이기도 합니다. 즉, 모세의 법은 율법주의자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등 어려움 당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은 율법 조문을 뛰어넘어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이루지만 그 법이 가리키는 사랑까지 이르려면 반드시 자비와 긍휼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긍휼은 모든 법을 성취하고도 남는 것이 됩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이제 룻은 보아스의 식탁에 함께 앉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립니다. 즉, 룻을 향해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아스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아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룻에게 흘러 넘치게 하는 멋진 채널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받은 룻은 진실하고 한없는 감사를 주 여호와 하나님과 보아스에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삭막한 이 시대에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오직 보아스의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과 사랑과 베풂과 나눔의 정신을 배워 서로에게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더욱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베풀며 나누는 자녀들에게 친히 풍성히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10; 고후 9:6, 8)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로부터 흘러 넘쳐 불신자들에게도 이르게 됩니다.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라](겔 47:8-9)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풍성하게 나타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아스의 정신을 따라 교회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풍성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의 공동체에서 받은 선대와 긍휼과 친절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누구든지 교회를 찾아오는 자들에게 관심과 친절과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맞이할 수 있어야 하고, 맞이하더라도 오직 은혜 가운데 풍성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심지어 보아스가 모압 여인을 그의 공동체에 맞이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혈통과 종족을 넘어서서 사람들을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혈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이방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 이방 여인이 믿는 우상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한 것입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4).
도리어 민족들에 대한 성경의 본질적인 개념은 서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의 선포에서 잘 나타납니다.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즉, 온 인류는 민족이 어떠하든 다 아담 안에서 한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민족이나 피부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성경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이 없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어둠과 교통하는 사람인지, 그 둘로 구분합니다. 즉, 참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는지 아니면 새생명이 없는 불신자인지, 오직 이 두 부류로 나눕니다.
아무튼 모세의 법이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한 본질적인 이유는 혈통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입니다. 만일 민족에 대한 금지였다면 보아스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기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모셨기 때문에 보아스는 자유롭게 룻을 여호와 하나님의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후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책망이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복이 되었음을 성경 전체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피부가 어떠하든 민족이 어떠하든 주의 공동체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불신자와의 결혼입니다.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만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게 확인해야 할 뿐 다른 것들은 다 포용하여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인종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사회에서 유명하고 지위와 권력이 있는 자가 아무 것도 없는 연약하고 미천한 자들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문제 외에 그 어떤 것도 결코 교회의 하나됨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결코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본 받아 결코 사람들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됩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5).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느니라”(갈 2:6).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죄 및 살인죄를 범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알려줍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1-4, 8-9)
이처럼 참된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세상에 속한 이생의 자랑으로, 또는 피부색이나 혈통 등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0-11, 14)
만일 보아스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가난한 이방 모압 여인 룻을 그의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보아스의 초청에 의해 룻은 그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룻이 보아스의 식탁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으로 보아스의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기준에 의한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된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공동체는 그 중심에 단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왕으로 모신 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의롭게 되고 또한 새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임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경건과 거룩이며 주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일한 목적은 새언약에 근거한 동일한 신앙 고백 및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 목적 외에 다른 이유로 분리되는 것은 당을 짓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 좋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파가 나뉘어도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성에 의해 교회를 찢지 않기 바랍니다. 정치 성향에 의해 교회를 찢지 않기 바랍니다. 학벌이나 재력이나 이생의 자랑으로 교회를 찢지 않기 바랍니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참 교회는 거짓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정당한 예로는, 중세 교회 때에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된 개신교이며, 20세기에 와서는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복음을 지키기 위해 프린스턴 신학교로부터 분리하여 나온 그래함 메이첸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많은 교회가 동성애 및 종교 다원화에 물들 것인데, 이러한 거짓 교회로부터 참 교회는 분리되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분리나 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가령, 가난한 자가 올 수 없는 교회, 흑인들이 올 수 없는 교회, 못 배운 자가 올 수 없는 교회 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는 사람을 세상 기준으로, 또는 피부나 혈통으로 차별하는 것으로서 복음의 정신에 크게 위배 되는 것입니다.
한편, 세대주의 신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심각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은 유대교 민족을 우월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을 축복해야 복을 받고 유대 민족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며 유대 민족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주장하길, 천년 왕국 시대가 오면 유대인들이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매우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정신을 오해하여 유대 ‘민족’이라는 외모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에 차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복음에 위배되는 매우 그릇된 신학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하나됨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누구든지 오직 복음과 함께 하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룻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께 나의 남은 삶을 의탁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아스가 이방 모압 여인 룻을 구원한 것은 보아스의 씨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모든 족속으로부터 주의 백성이 구원 받을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한편, 15절에 보니 보아스는 룻에게 풍성히 이삭을 거둘 기회를 줍니다. 그것은 자기 일꾼들에게 명하여 곡식 다발에서 곡식을 뽑아 땅에 떨어뜨리고 룻으로 하여금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룻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고 도리어 룻의 성실을 통해 풍성하게 거두도록 하기 위한 매우 지혜로운 조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 없는 하늘의 양식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양식을 풍성히 얻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성경에서 이삭을 주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영의 말씀을 받으면서 마치 내 자신의 수고를 통해 영의 이삭을 주웠다고 생각하고 만족합니다. 하지만 사실 주께서 우리가 풍성히 거두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풍성하게 거두려면 반드시 열심히 기도하며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배려와 섭리의 역사는 얼마나 기묘하고 깊은지요!
자, 이제 저녁이 되었고, 일꾼들은 어둠 때문에 일을 멈추었습니다.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주운 것을 채로 떨어보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룻은 곧바로 먹을 수 있는 보리를 가져가기 위해 이삭을 떨었습니다. 얼마나 착한 여인입니까? 저녁 어둠 속에서 대단히 피곤했을 텐데 시어머니가 고생하지 않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놓는 충성과 자상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한 에바는 22리터의 부피를 말하는데, 대략 1리터 콜라병 22개에 보리가 가득 찼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달 이상은 보리 걱정 안 하고 둘이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분량입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양을 단 하루 동안에 수고하여 얻어낸 것입니다. 이에 룻은 비록 신체적으로는 대단히 피곤할지라도 그 마음은 한없이 신난 상태에서 보리 자루를 등에 지고 돌아옵니다.
아침 일찍이 나간 룻이 어떻게 되었는지 염려하며 기다리던 나오미가 드디어 저녁 늦게 즈음에 저 멀리서 돌아오는 룻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등에 큰 보리 자루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우울했던 나오미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룻은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시어머니에게 점심에 먹다 남은 볶은 곡식을 드립니다. 그러자 배가 고팠던 나오미는 너무 신이 나서 그 곡식을 먹으며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우울증은 어느새 물러가고 아침까지 ‘마라’였던 나오미가 이제 다시 ‘나오미가 되더니’ 신이 나서 질문합니다. 그리고 룻 역시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때 그 둘의 대화는 감동과 신이 남과 호기심과 들뜸 등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룻은 감사와 사랑의 여러 감정을 섞으면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밤 늦게까지 시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어머니 역시 실컷 대화를 하는 가운데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서 내일을 향한 기대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나오미에게 있던 마라의 슬픔과 우울함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찾으며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받은 후에도 또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해 쉬지 말고 계속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무한하신 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고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주께서는 주의 약속을 믿고 행하면서 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룻처럼 하나님을 계속 믿고 의지하며 충성한다면 주께서는 하늘의 신령한 것들과 이 땅의 기름진 것으로 차고 넘치도록 부으실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마 7:11).
그리고 마침내 나오미와 룻이 한참 대화를 나누고는 그 남자가 누군지에 대해 말하게 됩니다.
“어머니! 그런데 그분 이름이 보아스라고 하던데요.”
그러자 나오미가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보아스! 아니, 이럴 수가! 그 사람은 네 시아버지의 친척이란다. 아, 그 분 너무나 훌륭하고 귀한 분인데, 아! 여호와께서 그 분에게 복 주시기를 빈다. 그 분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구나. 아! 너무 놀랍다. 며느리, 룻아. 보아스는 우리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우리 가문의 이름을 살려내고 또한 우리 가족의 땅을 사서 되돌려 줄 구속자란다.”
여기서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해 사용한 단어는 (헷세드)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가 주로 주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되기에 몇몇 성경은 보아스가 아니라 여호와로 오역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분명하게 이 단어를 보아스에게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친절과 자비와 긍휼이 차고 넘치도록 흘렀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이 살아있을 때에도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을 기억하며 또 다시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好意)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보아스의 호의를 “헤세드”라고 칭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밝히는데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으로써 엘리멜렉의 가문을 (가알)할 자라고 알려줍니다. 개역 개정은 히브리어 (가알)을 “기업 무를 자”로 번역되었고 권위 있는 영어 성경들은 kinsman-redeemer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주신 기업을 영원히 보존하고 또한 혈족을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고엘이 된 자는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 25:25,26), 대가 끊어지면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 주어야 했습니다. 한편, 고엘의 자격으로는 혈연 관계에 반드시 있어야 하며, 충분한 재력이 있어야 했고, 고엘하겠다는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고, 친족의 대를 잇기 위해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해야 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설명하기 전까지는 자신과 보아스가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경건하고 자비가 많은 귀한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엘 제도를 설명하면서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고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자 룻은 보아스가 자신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값을 치러줄 구속자를 만나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리디머, 곧 구속자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만일 공의로운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값을 치르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저주는 영원한 멸망이며 지옥 형벌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자들은 가알, 곧 구속, 속량,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5-17)
그러나 만일 가알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
그러므로 우리의 죄값을 위해 영원한 고엘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속히 믿고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힘써 남은 삶은 주 예수님께 순종하기 바랍니다.
룻은 보아스가 그들의 고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어머니에게복된 소식을 알려줍니다.
“시어머니, 보아스는 저에게 자기 일꾼들 가까이에서 계속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추수가 다 마칠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21절).
지금 룻이 한 말을 보면 룻은 초실절부터 오순절까지 이삭 줍기를 하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칫 큰 복이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당장 처음의 마음을 버리기 쉬운데 룻은 무엇보다 겸손을 유지하는데 훈련되어 있었고 이에 현재의 이삭을 풍성히 줍는 상태에 대해 끊임 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룻에게 분명하게 못을 박아줍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22절).
이 권면은 룻을 가장 사랑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깊은 믿음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즉, 지금부터는 자나깨나 보아스에게 마음을 두며 보아스만 바라보고 보아스에게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에게 속한 사람들과 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이 말씀을 연결해 본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맛본 참 신자라면 항상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바라보며 소망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참된 교회 공동체에 늘 속하여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서 이삭을 주었습니까?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삶의 변화를 맛보았습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사랑을 맘껏 누린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밭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씨가 있는 그 밭을 결코 떠나서는 안 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따라서 룻은 계속 보아스의 밭에서 풍성한 이삭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룻 2:23).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길을 주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기 바랍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의 삶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따라는 자들마다 반드시 안전한 진리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떠나 다른 고엘을 찾지 않기 바랍니다.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다 마칠 때까지, 항상 우리의 보아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리 추수에 해당하는 초실절에 우리 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으신 것을 압니다. 또한 밀 추수인 칠칠절 곧 오순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심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모압 여인과 같은 수많은 룻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고엘의 복음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내시고 또한 믿어 순종케 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보아스를 알기 전에 이미 자신이 룻을 고엘하게 될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룻도 이제 보아스가 그녀를 고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리 추수에서부터 밀 추수 때까지 대략 50일 동안 보아스와 룻은 서로를 더욱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룻의 겸손과 감사와 근면한 성품은 더욱 깊어갔을 것이며, 보아스의 자상함과 그의 공급과 보호와 사랑 역시 한없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이제 곧 사랑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룻은 그녀에게 맡겨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늘 가까이 모셨습니다. 이는 권위 질서에 대한 바른 인식 및 하나님을 향한 룻의 경외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 모두가 룻처럼 여호와의 날개 아래 피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남은 삶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긍휼을 계속 누림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지날 때에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