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 그 철학적 문제의식
공부란 나를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깨기 위해서 해야 한다
논어 ‘언유종 사유군’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철학, 인문학은 주요 고전이나 사상가 등을 중심으로 접근되는 경향이 예나 지금이나 뚜렷하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방식으로는 철학은커녕, 철학의 어느 하나의 조류에 대한 총체적 시각도 획득되기 힘들다. 해석학은 자신의 긴 역사를 관통하며 흐르는 논점과, 이 논점의 전개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 상당히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석학 소개 서적들 간에 형성되는 연관성이나 주제 공유 정도는, 다른 철학 분야를 소개하는 서적들의 경우보다 현저히 낮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강좌는 해석학의 전개 과정을 다루며 해석학적 철학의 정신이 어떻게 심화되어 왔는지를 그리고 무엇이 쟁점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나 말의 의미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때 해석은 필요하다. 신화시대 인간들에게 이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신들의 말을 이해하여 받아들이고, 그 말을 해독하는 기술이 요구되었다. 이 기술을 소지한 전문가가 고대 희랍신화에도 등장한다. 제우스의 아들 헤르메스(Hermes)가 신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해석학 즉 hermeneutics(허:메니랙스) 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다. 헤라클레이토스적인 학문 경향이, 나중에는 해석학으로 이어진다.
*명품 쇼핑사이트 헤르메스가 나온다. 샤넬 루비통 그리고 헤르메스,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헤르메스가 아니다. 헤르메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이유로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티에리 헤르메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돈이 없었던 티에리 헤르메스는 임대료가 현저히 낮은 상제리에 1837년 마구상을 시작했다. 그래서 말 안장과 용품을 만들었는데, 바퀴의 개발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마구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죽을 다루던 기술로 가방과 여러 가지 용품을 나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명품 헤르메스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울을 헤르메스라 불렀다. 그 이유는 바울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쉽게 잘 해석해 주었기 때문이다. 수필창작의 출발점은 인식에 있다. 인식이란 신발견, 재해석이다. 저는 여러분들이 수필계의 헤르메스가 되길 바란다. 제우스의 전령인 헤르메스는 모자와 장화에 날개가 달려있을 만큼 신속하게 제우스의 뜻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해석학을 hermeneutics라고 한다. 헤르메스가 해석학의 어원이 된 것은 제우스의 뜻을 잘 전달할 뿐만 아니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원래 해석학이라는 것은 서구의 신학에서 발달한다. 성경에 나타난 문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오류가 많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런 이야기들. 아브라함의 가족사와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기를 비교해 계산해 보니 거짓말이더라.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 등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상징한, 상징적인Symbolic 이야기이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가 아닌, 심볼릭한 이야기. 이처럼 해석학은 서구 신학에서 비롯되었는데 나중에 일반화 된다. 시적언어로 해석한다든가 대표적인 예가 꿈이다. 꿈을 해석하는 데도 상징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돼지꿈이 대표적. 돼지를 돈으로 해석하는.
인생은 해석이다라는 말이 있다.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청소부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 라고 물었다. 그때 청소부는 먹고 살기 위하여 청소를 하고 있다고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환경미화원 시인-쓰레기가 사랑스럽다)
똑같이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힘든 청소를 하는 사람으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왜 이런 큰 차이가 나고 있는가? 결국 해석의 문제였다. 자기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삶의 질과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최고의 방법은 금수저로 나타난다. 7번째 답이 재미있는데, 다시 태어난다 였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은 망쳤고 다음생에 기대를 건다는 것이다.
리터럴한 의미가 아니라 심볼릭한 의미를 찾는 학문을 해석학이라고 함. 해석학의 정신이 바로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문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 언어가 가진 강력한 힘을 명확히 깨달음. "판타 레이" 만물은 흐른다 라고 말함으로써 생성의 사유를 제시하였으나 동시에 모든 흐름은 하나의 로고스에 의해 지배된다고 함으로써 세계의 이중적 구조를 강도하였다. 만물은 흐른다. 유명한 말이죠. 판타 레이라고 말함으로써 생성의 사유를 제시. 생성..Becoming이죠. 만물은 흐른다. (흐름은 생성이지만) 동시에 모든 흐름은 하나의 로고스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이중적 지배구조를 강조했다. 그 생성은 아무런 이유도, 법칙도, 근거도 이법도 없는 흐름이 아니라, 어떤 로고스에 의한다.
로고스, 주역의 사상과 유사하다. 역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역은 생생불식이다. 생생. 더없이 생생한 것. 비가 오고, 구름이 흘러가고 장미꽃이 피고, 살고 죽고 부단히 생생불식한다. 이 책상도 견고해보이지만 뭡니까? 사실은 아니죠. 천년이 지나면 썩어문들어진다. 책상조차도 변하고 있다. 눈에 안보여서 그렇지 지금 이 순간에도 썩고 있죠. 이 생생불식이 그냥 무댓뽀가 아니라 어떤 이법, 로고스가 있어서 이를 관장한다는 사상이 바로 생성의 사유죠. 헤라클레이토스는 바로 이런 생성의 사유를 제시합니다. 만물은 흐른다에서 만물의 실체가 앞서서 얘기했던 아르케.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르케를 불이라 하였다, 탈레스 물, 아낙시만드로스 아페이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피타고라스는 수라고 했는데 아르케가 불이라는 말은 아르케라고 하기에는 좀 신선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어떤 에너지, 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 충만한 기, 에너지를 불. 불은 언제나 타고 있으며 그는 우주의 탄생을 부정함.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불멸의 변화로 보았다. 이 세계는 끝없이 타는 불과 같다고 보았다.
모슨과 대립이 서로 부딪히는. 모순과 대립이 사물을 파괴하거나 정지시키는 게 아니라 모순과 대립으로 만물이 창조되고 자라는 것으로 보았다. 모순과 대립으로 이 세계의 운동이 있고 이 운동으로부터 만물이 나왔다. 헤겔과 변증법으로 이어진다.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만물의 왕이다" 투쟁, 싸움, 갈등이 파괴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이로부터 만물이 생기고 진화한다는 생각. 하모니, 조화 편안한 안이한 조화가 아니라 항상 싸움과 갈등이 균형을 이룰 때. 활을 잡아늘인 상태. 이 탁자가 안 꺼지는 이유. 병이 나는 이유. 병이라는 게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일종의 발현. 건강할 때의 균형이 무너지면 병이 생기는 것. 조화라는 것은 안이한 편안한 상태가 아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가져온 두번째 영향력은 "인식론"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사유, 학문, 지식의 탐구 못지않게 지식 자체에 대해서 사유해야 한다. 일 더하기 일은 이다. 일 더하기 이는 삼이다. 이건 수학적 지식이다.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명제가 맞았다"에서 "맞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뭐냐? "일 더하기 일은 삼이다라는 명제가 틀렸다"에서 "틀렸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맞다"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고 "틀렸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물음은 인식론적이다. 인식론적인 물음은 메타적인 물음이다. 메타는 after라는 의미이다. 인식론과 과학(수학)의 관계는 비평가와 예술가의 관계와 비슷하다.
어떤 화가가 영감이 떠올라 그렸다. 이 그림의 의미가 무엇이냐? 화가는 대답을 잘 못한다. 그 의미는 비평가가 후에 대답한다. 과학은 실제로 탐구하는 것이고, 과학은 무엇일까? 지식,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 Truth가 무엇이냐? 메타적인 수준에서 이런 걸 따지는 게 인식론이다. 이런 씨앗이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차원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피타고라스학파를 비꼰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박학주의자들이라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끌어모은다. 요즘의 백과사전이나 위키피디아처럼. 그럼 피타고라스학파는 할 일이 없어진다. 진짜 지식은 사실들을 잔뜩 쌓아놓은 게 아닌다. "로고스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눈과 귀는 나쁜 증인이다". 감각자료들은 로고스에 의해서 그 근저를 포착해야 지식이지, 지식을 모아놓는다고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난해한 내용과 심오한 표현 때문에 잘 이해되지 않았다.
주류진입에 실패. 엘레아 학파가 주류로 자리잡고,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다지 자리잡지 못했다. 엘레아학파의 존재(Being)의 사유가 서구철학의 주류.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becoming의 사유는 묻히게 됨. 니체, 베르그송 등 19세기가 되어야 다시 등장.
해석학이란 어떤 문제에 대해 ‘이런 것이 있었다.’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개과정이나 심화과정, 특별히 고민스러운 부분을 캐려 애쓰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석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이성이나 언어 같은 것만 중요시했지만, 200년쯤 지난 후에 보면 이성이나 언어, 해석은 그 자체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 속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번 강의에서는 철학적 문제에서 청계천 복원, 대통령 탄핵, 군대와 병역체험, 서울의 아파트값 등 우리 현실의 문제와 함께 그 심화과정을 다섯 명의 철학자들과 더불어 따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