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정과정(鄭瓜亭) / 정서
(나) 「정과정」이해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내님믈 그리와 우니다니
산(山) ⓐ졉동새 난 이슷요…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시리…다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가
과(過)도 허믈도 ⓒ천만(千萬) 업소다
힛마리신뎌
읏븐뎌 아으
니미 나 마 ⓓ니시니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나) 「정과정」은 고려 시대 내시낭중 정서가 지은 노래로, 『고려사』 악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서는 인종의 인척으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의종이 즉위하자 왕이 정서를 동래로 보내면서 이르기를, “오늘 가게 된 것은 조정의 의론에 몰려서이다. 머지않아 부를 것이다.” 하였다. 정서가 동래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왕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가 극히 슬펐다.
『고려사』의 기록을 믿는다면, 의종이 정서를 내친 것은 왕 자신의 뜻과 달리 결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정서의 부인은 인종 비인 공예 태후의 동생으로, 정서는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인종과 가깝게 지내면서 궁궐을 자주 드나들었다. 인종에게는 훗날 의종이 된 태자와 대령후 경이 있었는데 정서는 공공연히 대령후 편에 서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인종이 죽고 의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령후 편 에 서 있던 정서를 유배 보낸 것이다. 이에 정서는 유배지에서 자신의 생각을 노래에 담았다.
정서가 원래 지었던 노래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어떤 양식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정서가 죽은 뒤 대략 180여 년이 지나 이제현은 현재 전하는 노래의 앞 넉 줄에 해당하는 내용을 7언 절구의 한시 형태로 남겼고, 이로부터 다시 100여 년 뒤 현전하는 형태의 국문 시가로 『악학궤범』(1493)에 실리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이 노래는 궁중에서 처용무를 출 때 불리면서 전승되었으며, 민간의 사대부들은 정서의 처지를 이해하며 이 노래를 소재로 많은 [악부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이 노래가 충신연주지사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점과 정계에서 내몰린 슬픈 심정을 후세의 사대부들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01. (가)의 ⓐ~ⓔ의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이다.
② ⓑ: 화자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존재로 삼은 대상이다.
③ ⓒ: 화자의 결백을 표현한 것이다.
④ ⓓ: 화자가 임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⑤ ⓔ: 임에 대한 화자의 소망을 보여 준다.
02. (나)를 바탕으로 (가)를 설명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정과정」은 고려 때 창작된, 작가가 분명한 작품이다.
② 「정과정」은 충신연주지사에 속하는 노래로 볼 수 있다.
③ 「정과정」은 정서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④ 「정과정」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춤을 출 때 노래로 불렸다.
⑤ 「정과정」의 현전하는 가사는 정서가 처음에 지었을 때와 표기 형태가 같다.
03. <보기>는 [악부시]의 하나이다. <보기>의 화자에 대한 독자의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정서는 어느 곳에 정자를 세웠던가
鄭瓜亭何處(정과정하처)
화성과 옥당 부근인가
畵省與玉堂遠在(화성여옥당원재)
멀리 붉은 해 돋는 푸른 바닷가라네
赤日初昇之碧海傍(적일초승지벽해방)
부름의 교서는 내려오지 않고 세월만 빨라
徵書不下歲月忙(징서불하세월망)
개암나무 씀바귀 끝없이 무성한 하늘 한 모서리
無限楱苓天一方(무한주령천일방)
손에는 거문고 한 소리
手中琴一張聲(수중금일장성)
<중략>
악보 따라 부르는 소리 슬픔만 더해 가네
尋聲按譜增悲傷(심성안보증비상)
바라노니 이 곡조 천만년 전해지길
願將此調傳千想(원장차조전천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 계면조*로 맴돌까
幾人界面來彷徨(기인계면래방황)
- 이익, 「과정곡」
*계면조: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조.
① (가)의 작가가 처한 공간을 상상하고 있군.
② (가)의 작가가 처한 상황을 연민하고 있군.
③ (가)의 작가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군.
④ (가)의 노래에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 보고 있군.
⑤ (가)의 노래가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