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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荀子. 勤學篇)
빙출어수 한어수(氷出於水 寒於水)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그 빛깔이 남색보다 더 짙다는 뜻이다.
지혜와 덕망을 갖춘 훌륭한 스승 문하에는 반드시 수많은 제자들이 따르고 스승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스승은 이를 질투하지 아니하고 더욱 기뻐한다는 뜻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운 바람 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스승보다 제자가 더 훌륭하게 되었을 때를 이르는 말로 筍子(순자)가 쓴 '靑出於藍而 碧於藍(청출어람이 벽어람)이요, 氷出於水而 寒於水(빙출어수이 한어수)'라는 글귀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를 직역하자면,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더 차갑다, 라는 뜻이다.
(352) 청한(淸閑)
청아하고 한가함을 이르는 말이다. 일찍이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소인(小人)은 한가하면 잡된 생각으로 일관하고 군자(君子)는 위대한 학문을 낳는다고 하였다. 철학은 한가의 소산이란 말이 여기에 부합된다.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쓰느냐에 따라 인간의 성패가 가름 난다.
(353) 총명. 인지. 웅략(聰明. 仁智 .雄略) <三國志>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을 앞세워 날로 강성해지는 촉한의 유비를 당할 길이 없는 오나라 손권은 위나라 조조(曹操)와 강화하기 위하여 사신으로 납작 코 조자(趙咨)를 보냈는데 그가 자기나라 군주 손권을 조조에게 설명하는 내용으로 총명. 인지. 웅략을 들었다.
“오의 대자 노숙을 보통 인종 중에서 등용한 것은 그의 총이요, 여몽을 하급 군졸 대오에서 발탁한 것은 그의 명이요, 우금(于禁)을 형주 감옥에서 죽이지 않은 것은 그 인이요, 형주를 취함에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그 지요, 삼강을 웅거하고 천하를 호시(虎視)함은 그 웅이요, 몸을 굽혀 위에 복종함은 그 약이니 이를 보면 총명. 인지. 웅략을 알 수 있다 함이다.”
(354) 춘향전(春香傳) 중에서 이몽룡(李夢龍)의 詩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
옥반가효 만성고(玉盤佳肴 萬姓膏)
촉루락시 민루락(燭淚落時 民淚落)
가성고처 원성고(歌聲高處 怨聲高)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여 백성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대에서 촛농이 떨어질 때마다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 높더라.
춘향전에서 탐관오리 변사도의 생일 축하연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읊은 명시조이다.
(355) 출문 여견대빈(出門如見大賓) 사민 여승대제(事民如承大祭)<論語>
논어의 가르침이다. 공자께서는 문을 나설 때에는 큰 손님을 만날 듯이 하고,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봉제사를 받들듯이 하라. 는 가르침으로 정치를 뜻에 둔 사람들은 필히 익혀 두어야 할 가르침이다. 내가 원하지 아니하면(己所不欲) 남에게 베풀지 말라(勿施於人)라고 일렀다. 내게 필요하지 아니한 것을 남에게 바라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보다 적극적 표현으로 '네가 남의 대접을 받기를 원하거든 네가 먼저 대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356) 칠거지악(七去之惡)
여자가 가져서는 안 되는 일곱 가지 악을 말한다.
옛날 모든 제도나 관습은 여자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들 수 있다. 일명 '칠출(七出)' 또는 '칠거(七去)'라고도 하는데 지금 말로 하면 합리적인 이혼사유가 되는 셈이다.
이런 좋지 않은 제도는 놀랍게도 2천5백여년전 공자(孔子)의 입에서 나왔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보면 부도(婦道)를 밝힌 본명해편(本命解篇)이 있다. 칠거지악(七去之惡)도 그 중 하나다. 즉 시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것(不順父母), 무자식(無子), 부정(不貞), 질투(嫉妬), 못된 병(惡疾), 수다(多言), 훔치는 것(竊盜) 등. 하지만 아내를 함부로 내쫓지 못하는 이른바 '삼불거(三不去)'도 있다. 첫째 돌아갈 친정이 없을 때. 둘째 아내 가 부모의 삼년상(三年喪)을 치렀을 때. 셋째 집 안을 일으켰을 때 등이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아무리 남성 상위 시대였지만 가족제도의 기본이 되는 부부관계는 여전히 중시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까닭 없이 이혼을 하는 자(者)에게는 태형(笞刑) 80대를 쳤으며 삼불거(三不去)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강행하는 자(者)에게도 비슷한 벌을 내렸다.
(357)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칠금(七擒)'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인 유비(劉備)는 제갈량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위(魏)나라를 공략하여 생전의 유비의 뜻을 받들어야 했던 제갈량은 먼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유선이 아직 나이어리고 철이 없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제갈량은 적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썼다. 과연 반란군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서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등장한 반란군이 바로 맹획이라는 장수였다. 맹획이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노강 깊숙이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맹획을 생포한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촉한의 무장인 마속(馬謖)도 '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으로, 군사전은 하책일 뿐 심리전을 펴 적의 마음을 정복하라'고 했다. 제갈량은 오랑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북벌(北伐)도 한결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여 맹획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부하가 되기를 자청했다. 여기서 '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으며, 오늘날 이 말은 '상대편을 마음대로 요리한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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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타면자건(唾面自乾) <十八史略>
남이 나의 낯에다 침을 뱉을 때 이를 바로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당(唐)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측천무후는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독차지하여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탄압책을 쓰는 한편, 유능한 신흥 관리를 많이 등용하고 명신을 적절히 등용하여 정치를 담당시켰기 때문에 천하는 그런 대로 태평했다.
그 무렵, 측천무후의 유능한 신하 중에 누사덕(婁師德)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고 관인(寬仁)하여, 아무리 무례한 일을 당해도 그 자세에 흔들림이 없이 항상 똑같았다. 하루는 그의 아우가 대주자사(代州刺史)로 임명되어 부임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동생을 불러 "우리 형제가 다 같이 출세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만큼 남의 시샘도 크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시샘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동생이 "비록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상관하거나 화내지 않고 잠자코 닦겠습니다. 만사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응대하여 결코 형님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생의 대답을 듣고 누사덕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내가 염려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침을 뱉는다면 그것은 네게 뭔가 크게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침을 닦아버린다면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그는 틀림없이 더 크게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니, 그런 때는 웃으며 그냥 침을 받아 두는 게 제일이다.
(359) 탐천지공(貪天之功)
춘추 시대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오랜 유랑 끝에 진(秦)나라의 원조로 귀국하여 즉위한 후 논공행상을 했다. 망명을 함께 한 자나 자금을 제공한 자에게는 토지를 내리고 가봉(加封)이 있었으며, 귀국을 환영한 자로부터 일반백성에게까지 상이 미쳤으므로 모두가 기뻐했다. 문공은 행여 빠진 자가 있을까 염려해 해당자는 신고하라고 포고했다.
망명을 함께 한 개자추(介子推)라는 충신이 빠져 있어서, 그 이웃 사람이 포고를 보고 개자추에게 고했다. 개자추는 문공이 귀국한 후에 병이 나서 집에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벼슬을 하려 하지 않고 모친을 지키며 청빈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웃 사람의 권유에 개자추가 웃으며 상대하지 않자, 그의 모친이 말했다.
"너는 굶주린 문공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바칠 만큼의 공로가 있었는데, 왜?" 개자추는 웃으며 말했다.
"뭘 바라고 충의를 다한 건 아니니까요." 이웃 사람은 기가 막혔다. "신고만 하면 이런 가난은 면할 텐데." "헌공(獻公)의 9공자 중 문공님은 가장 현명한 분이시니 오늘날의 즉위는 당연하다. 그런데 다들 그것을 모두 자신의 공로인 듯이 말하고 있다. 볼꼴사나운 일이다. 군주에 대해 탐천지공(貪天之功)을 다투는 것은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행위다. 차라리 짚신을 삼는 편이 훨씬 즐겁다." 모친도 개자추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라리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
그날 밤 개자추는 지체 없이 어머니를 업고, 때마침 환하게 비치는 달빛을 의지하여 면산(綿山)으로 깊숙이 들어간 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안 문공은 개자추를 찾아 온 장안을 뒤져 그가 산속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나올 것을 권유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나오게 하려고 산까지 태웠다. 개자추는 그래도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불에 타 죽었다. 문공은 슬피 여겨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날을 기억하여 제사 지내고 그날만큼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게 했다고 한다. 바로 한식(寒食)의 유래다.
(360)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太祖 王建의 訓要十條)
1.불교를 숭상하고, 사원의 폐단을 엄단하라.
2.사원을 함부로 짓지 말라.
3.장자가 왕위 계승을 하되, 어질지 못하면, 신망 있는 자에게 정통을 잇게 하라.
4.고려의 특성에 맞게 예약을 발전시켜라.
5.지맥의 근본인 서경을 중시하여, 서경에서 1년에 100일간 머물라.
6.연등(燃燈)과 팔관(八關) 등을 소홀히 하지 말라.
7.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라.
8.차령이남 금강 밖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 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
9.백관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마련했으니, 함부로 증감하지 말라.
10.경전과 역사를 널리 읽어 온고지신의 교훈으로 삼아라.
(361) 토사구팽(兎死拘烹) <史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로 이는 마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甘呑苦吐)와 뜻이다.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 (劉邦)은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韓信)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高祖)는 지난날 종리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高祖)에게 '한신은 반심(反心)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 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이 나오면 진(陳)에서 포박하고, 만약 나오지 않으면 진(陳)에 집결한 다른 제후들의 군사로 한신을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反旗) 를 들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서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활한 가신(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 주지. 하지만 그땐 자네도 망한다는 걸 잊지 말게."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 당하자 한신은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조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교토사양구팽) 高鳥盡良弓藏 (고조진양궁장) 敵國破謀臣亡 (적국파모신망) 天下已定 我固當烹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킨 뒤 주거를 도읍인 장안(長安) 으로 제한했다. 烹 삶을 팽. [동] 狡兎死 良狗烹(교토사 양구팽)의 준말. 狡兎已死(교토이사) : 교활한 토끼가 이미 죽었다. [유] 得魚忘筌(득어망전) : 고기를 잡고 나서 통발을 잊는다. [출전] 史記 淮陰侯列傳 十八史略
(362) 투편단류(投鞭斷流) <晉書>
진서의〈부견재기〉에 나오는 말로, ‘강을 건너는 병사의 수가 많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진(前秦)의 제3대 왕인 부견은 전연(前燕)과 전량(前凉)을 항복시켜 강북을 통일하였다. 부견은 이 기세를 몰아 남방의 동진(東晉)을 공략해 천하를 통일하려고 융졸(戎卒)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출발했다.
그러나 신하들 중 권익은 ‘동진에는 현신(賢臣)이 많다’는 이유로, 또 석월(石越)은 ‘동진은 양쯔강의 험란함에 의거하고 있고 그 조정에 혼란의 증후도 없으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불리하다’며 출병을 반대했다. 그러자 사기가 충천함만을 믿고 부견은 “우리 대군의 채찍으로도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投鞭斷流].”라고 호언장담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부견은 사현(謝玄)이 이끄는 동진군에게 비수(水)에서 크게 패해 뤄양[洛陽]으로 도망쳤다. 결국 부견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전진은 서진(西秦)에 의해 멸망하였다. 전쟁이란 단지 군사의 수가 많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주는 이 ‘비수(페이수이)의 싸움’에서 ‘풍성학려(風聲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363) 퇴고(推敲) <故事成語> <事成語>
문장을 다듬고 고친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가 장안(長安)으로 과거를 보러갈 때에 일이다.
나귀를 타고 가는데 문득 시상(詩想)이 떠올라
인가 드문 곳에 한가한 집이 있어서 (閑居少隣竝)
풀에 묻힌 길이 정원과 통하고 있네. (草徑入荒園)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자려고 깃들 고, (鳥宿池邊樹)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鼓月下門)
이 시에서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를 두들긴다(鼓)고 할까. 민다(堆)고 할까 고민을 하다가 도중에 귀인의 행차에 부딪치고 말았다. 행차는 공교롭게도 경조윤(京兆尹) 한유(韓愈)의 행차였다.
가도는 행차의 길을 침범한 죄로 한유의 노여움을 사서 그 앞에 끌려 나가 부딪친 연유를 고하게 되었다. 당송팔대사의 한사람인 한유는 노여움을 거두고 그와 나란히 행차를 계속하며 ‘퇴(堆)를 고(鼓)로 고처라’ 일러 주었다. 그 이후 문장을 다듬고 고치는 일을 후세 사람들은 퇴고(推敲)라 부르고 있다. 한유와 가도는 귀한 인연으로 대화의 아름다운 벗이 되었다고 전한다. 뜻으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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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파경(破鏡) <故事成語>
흔히 부부가 이혼할 때 파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러나 <깨진 거울>이란 뜻을 갖는 이 말은 원래 깨진 거울을 다시 합쳐 완전해짐을 의미하는
파경중원(破鏡重圓)에서 나온 말이다. 파경중원은 헤어져 있던 부부가 다시 만나 합치는 것을 말한다. 출전은 《태평광기》.
남조(南朝)의 신하인 서덕언(徐德言)의 아내 낙창공주(樂昌公主)는 미모와 글 솜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러나 남조는 수나라 대군의 공격으로 멸망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예로부터 멸망한 나라들의 여자들은 적국의 권력자에게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서덕언은 수나라 대군이 임박했을 때 아내를 불러 말했다.
「당신의 미모와 재주를 보아하니 나라가 멸망하면 반드시 적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나,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때를 위해…….>
그리고 서덕언은 옆에 있던 거울을 두 조각으로 깨뜨려 한쪽을 아내에게 주었다.
「이 거울을 소중히 간직했다가 정월 보름날 시장에 내다파시오. 내가 살아 남는다면 반드시 그 거울을 찾을 것이오.」
결국 남조는 수나라에게 멸망하고, 낙창공주는 수나라의 일등공신 양소(楊素)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타고난 아름다움과 재주로 이내 양소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결코 남편이 주었던 거울을 잊지는 않았다.
한편 서덕언은 거지 노릇을 하면서 1년이 지나서야 장안에 도착했다. 약속한대로 정월 보름날 시장에 가보니 소리를 지르면서 반쪽 거울을 파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러나 한 푼 가치도 없는 반쪽 거울을 누가 사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지나갔다. 서덕언은 이내 그 거울을 사겠다고 한 후, 그 사나이를 자기가 머무는 곳에 데려가 거울에 얽힌 내력을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거울을 꺼내 맞춰보니 두 조각이 딱 들어맞았다. 서덕언은 거울 한쪽 편에 시 한수를 써서 그 사나이에게 돌려보냈다.
거울과 사람 모두 가버리더니
거울은 돌아왔는데 사람은 오지 않네.
더 이상 항아(姮娥)의 그림자 보이지 않는데
밝은 달빛만 무심히 비추누나.
사나이가 건네 준 거울을 본 낙창공주는 그 뒤부터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소는 두 사람의 애정에 감동해, 즉시 서덕언을 불러 낙창공주를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365) 파부침선(破釜沈船)
진(秦)나라가 말기 증세를 보이자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가 하면 제후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나라 때부터 장군의 전통을 이어온 항우(項羽)와 그의 삼촌 항량(項梁)도 반기를 들었다. 호응하는 사람들로 세력을 크게 불린 항량과 항우는 곳곳에서 진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봉기군은 정도(定陶)에서 진나라 장군 장한에게 크게 패해 봉기군 총수 항량도 목숨을 잃었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을 격파하고 조왕이 있는 거록(鋸鹿)을 포위했다.
조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초왕은 송의(宋義)를 상장, 항우를 차장으로 앉혀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송의는 군대를 안양(安陽)까지 진격시키고는 40여일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작전상 그렇게 했지만 몇번이나 진군을 재촉해도 송의가 듣지 않아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었다.
상장이 된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넜다. 전군이 강을 건너자 항우는 '타고 온 배를 전부 가라앉히고 가마솥과 시루를 부수고(皆沈船破釜甑·개침선 파부증)' 진영을 불태운 뒤 사흘 분 군량미만 지급함으로써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지시했다. 과연 전장병은 결사의 각오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항우군은 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조왕을 구원하러 온 다른 제후들의 군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나자 제후의 장군들이 항우의 진영에 모였는데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반진(反秦)연합군 가운데서 항우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366) 파죽지세(破竹之勢)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진(晉)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晉)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 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읍(建業 : 南京]으로 쇄도(殺到) 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晉)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옛날에 악의(惡毅)는 제서(齊西)의 한 번 싸움에서 승리하여, 강한 제(齊) 나라를 합쳤다. 지금 아군은 위세를 이미 떨치고 있다.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 몇 마디를 쪼갠 다음에는 다 칼날을 맞아 쪼개어질 것이니, 다시 손을 댈 곳이 없다."
(367) 폐문즉심산 독서 수처정토(閉門則深山 讀書隨處淨土) <陣繼儒.唐詩人> 문을 잠그면 깊은 산속이요, 책을 읽으면 어디나 정토다. 라는 뜻이다.
(368) 포호빙하(暴虎馮河) <論語>
논어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말로, '포호빙하지용(暴虎馮河之勇)'과 같은 뜻이다. 공자는 군자(君子)란 마음에 어떤 집착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등용되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고, 등용되지 않으면 자신의 자취를 감출 뿐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이처럼 집착함이 없이 무심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안회(顔回:顔淵)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공자가 안회에게 "권력 있는 자가 써 주면 행하고 버리면 물러나 마음속에 감출 수 있는 이는 나와 너 두 사람뿐일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이때 곁에서 듣고 있던 자로(子路)는 자신을 제쳐두고 한참 후배인 안회를 인정하는 스승의 말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도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만약 선생님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무용(武勇)에 관한 한 자신 있는 자로는 은근히 기대하며 공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공자는 자로의 기대와는 달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발로 황하강을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즐겨 도모하여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暴虎馮河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포호빙하 사이무회자 오불여야 필야임사이구 호모이성자야)]."
공자의 이 대답은 자로의 경솔한 태도와 만용(蠻勇)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제자에 대한 깊은 배려가 들어 있다.
(369) 풍래소죽 풍과이죽불유성 안도한담 안거이담불류영
(風來疎竹 風過而竹不有聲 雁渡寒潭 雁去而潭不留影) <菜根談>
성근 바람이 대에 오매 바람이 지나가자 대나무엔 소리가 남지 아니하고, 기러기가 찬 못을 건너는데 기러기 가고나니 못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370) 풍수지탄(風樹之嘆)
부모가 살아 있을 때 효도하지 않으면 뒤에 한탄하게 된다는 말이다. 공자가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공자의 귀에 들려왔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곡성의 장본인은 고어(皐魚)라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우는 까닭을 물어보았다.
울음을 그친 고어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세가지 한(恨)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났다가 고향에 돌아가 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는 저의 경륜을 받아들이려는 군주를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고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바람이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불어온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子欲養而親不待).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이제 이대로 서서 말라 죽으려고 합니다."
고어의 말이 끝나자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해 두어라. 훈계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이날 충격과 함께 깊은 감명을 받은 공자 제자 중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섬긴 사람이 열세명이나 되었다.
(371)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뜻으로 사물이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노여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비유하는 사자성어입니다. ‘풍전등촉(風前燈燭)’이나 ‘풍전지등(風前之燈)’으로도 쓰이죠. 위급한 상황을 바람 앞에서 언제 꺼질지 모르게 껌벅거리는 등잔불이나 촛불의 모습으로 표현한 말이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다.’처럼 쓸 수 있다.
이처럼 위급한 처지를 비유하는 사자성어는 포개 놓은 달걀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일컫는 ‘누란지세(累卵之勢)’ ‘누란지위(累卵之危)’ ‘위여누란(危如累卵)’과 100자[尺]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 있는 것처럼 위태롭다는 뜻인 ‘백척간두(百尺竿頭)’ ‘간두지세(竿頭之勢)’ 등이 있다.
(372) 표사류피 인사유명(豹死留皮 人死留名) <明心寶鑑>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재물보다도 명예가 소중함을 비유한 것이다. (虎死留皮 人死留名) 당나라가 멸망한 뒤, 오대(五代)가 교체하던 시기의 양나라에 왕언장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우직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싸울 때마다 항상 쇠창을 들었으므로 와철창이라고 불렸다. 산서(山西)에 위치한 진나라가 국호를 다시 당으로 고치고 양나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 때 왕언장은 출전하였다가 크게 패하여 파면되었다. 그 후 당나라 군사가 다시 침입하였을 때, 또 다시 기용되었지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당나라 임금이 왕언장의 용맹성을 아까워하여 귀순할 것을 종용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는 양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진나라를 섬기는 일은 할 수 없소." 결국 사형을 당했다. 왕언장은 평소 속담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이러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왕언장은 비록 학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 나라의 장수로서 지켜야 할 명예만은 소중히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당나라 임금의 제의를 주저 없이 거절하고 죽음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373) 필강자복(必强自服)
강 한자 앞에서는 스스로 몸을 낮추고 숨는다는 뜻이다.
사색당쟁이 난무하던 풍토에서 회오리바람을 피하는 편법으로 사용된 수법으로 생각된다.
(ㅎ)
(374) 하등인(下等人)
사불숙려(思不熟慮) 언불충신(言不忠信) 행불독경(行不篤敬)은 하등인 이다.
생각에 깊고 곰곰한 사려가 없으면, 언행에 도탑고 공손함이 없으면, 행함에 성실을 다하지 않고 거짓이 있으면 이는 하등인 이다.
인간은 만민이 평등하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할 때 세상은 평화롭고 화목하다.
언불충신과 행불독경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고 사불숙려는 내가 만들어 붙였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인간 삶의 3대 고귀한 덕목이다.
(375) 학습(學習)
학습이란 말을 제일 처음 쓴 분은 공자이다.
학습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예습(豫習)은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하는 것이요, 복습(復習)은 배운 것을 다시 반복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성현 공자는 배우고 익히면 이 아니 기쁜가(學而時習之 不亦說呼)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아니 즐거운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 알지 못하던 것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과연 군자답지 아니한가(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고 하였다.
한편 맹자(孟子)도 그의 세 가지 즐거운 중에 천하에 영재를 얻어 교육함이라(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이라 하였다.
(376) 학위인사 행위세범(學爲人師 行爲世範)
출전은 잘 모르겠다.
학문은 다른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야하고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어야한다.
스승을 양성하는 사범학교의 의미가 여기서 유래되지 않았나 생각 된다. 참으로 귀한 명언이다.
(377) 해로동혈(偕老同穴) <시경(詩經) 「패풍(邶風)」위풍(衛風>
부부간의 사랑의 맹세.
『시경(詩經)』의「북을 침(擊鼓)」「군자해로(君子偕老)백성「백성의 시에서 ‘해로(偕老)’가 나온다.‘동혈(同穴)은「쿤수레(大車)」라는 시에 나온다.「북을 침」은 아내 생각에 한탄하는 시이다.’죽음과 삶, 만남과 헤어짐을 그대와 함께 언약했으니 그대의 손을 잡고서 그대와 함께 늙으리로다(生死契闊 與子成說 執子之手 與子偕老).’「군자해로」는‘군자와 늙도록 함께 하니 쪽지고 여섯 구슬 박은 비녀를 꽂았으며(君子偕老 副笄六珈)’이고, 「백성」은‘그대와 더불어 늙고자 했더니, 늙어서 나로 하여금 원망케 하도다(乃爾偕老 老使我怨)’라는 내용이다「대거」는 수레를 타고 가는 대부(大夫)를 옛 애인이 보고 부르는 노래로써,‘살아서 곧 집이 다르나, 죽어서는 곧 한 구덩이를 같이 하리라. 나를 미덥지 않다고 말한다면,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리라(穀則異室 死則同穴 謂予不信 有如曒日)’라는 의미이다.
(378) 행원필자이(行遠必自邇) 등고필자비(登高必自卑) <中庸>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부터 시작해야하고, 높이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부터 오르기 시작하여야 한다. 라는 뜻이다.
(379) 화기치상(和氣致祥) 장락무극(長樂無極)
마음이 고를 때 상서로운 일을 이루고, 즐거움이 끝이 없도다.
(380) 화룡점정(畵龍點睛)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 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 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장승요는 금릉[金陵:남경(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 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은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 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 가 그려져 있지 않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원문 : 張僧繇於金陵安樂寺 畵四龍於壁 不點睛 每曰 點之則飛去 人以爲誕因點其一 須臾雷電破壁 一龍乘雲上天 不點睛者見在.
(381) 화사첨족(畵蛇添足) <三國志>
쓸데없는 군일을 하다가 도리어 실패함을 의미한 예화다. 전국시대인 초(楚)나라 회황(懷王)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제사를 지낸 뒤 여러 하인들 앞에 술 한 잔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이런 제안을 했다.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마신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하세." 하인들은 모두 찬성하고 제각기 땅바닥에 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뱀을 다 그린 한 하인이 술잔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 술은 내가 마시게 됐네. 어떤가, 멋진 뱀이지? 발도 있고." 그 때 막 뱀을 그린 다른 하인이 재빨리 그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세상에 발 달린 뱀이 어디 있나?" 술잔을 빼앗긴 하인은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楚有祠者 賜其舍人?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 右手畵蛇曰 吾能爲之足未成一人蛇成 奪其?曰 蛇固無 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終亡其酒.
(382) 화이부동 동이불화(和而不同 同而不和) <論語>
논어(論語)에 나오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자.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
(383) 화호화피 난화골 지인지면 불지심(畵虎畵皮難畵骨 知人知面不知心)
< 明心寶鑑>
범을 그리면 가죽은 그리되 뼈는 그리기가 어렵고, 사람은 알되 얼굴은 알지만 속마음은 알기가 어렵다.
(384) 환골탈퇴(換骨脫退) <冷齋夜話>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뼈를 바꾸고 胎를 벗긴다는 뜻으로 본디 도가(道家)에서 나온 말이다. 그들에 의하면 사람과 신선이 외형상에서 다른 점은 뼈와 胎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神仙이 되기 위해선 人間이 가지고 있는 속된 뼈(俗骨)와 평범한 태(凡胎)를 일신(一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神仙術을 익히면서 神靈스런 단약(丹藥)을 먹어야 가능하다. 또 이상한 술을 마셔도 되었다. 왕자교(王子喬)는 본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직간(直諫 )을 서슴지 않아 평민으로 폐위(廢位)되고 말았다.
어느 날 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는데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배가 두둥실 떠내려 오고 있었다. 배 위에는 모두 일곱 명의 도사(道士)가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道士가 그를 끌어 올려 배에 태우더니 이상한 술병을 가져 왔다. 둘은 실컷 술을 마셨는데 王子喬가 따르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술이 道士가 따르면 끝없이 흘러 나왔다.換骨奪胎되는 술이었던 것이다. 물론 후에 그는 神仙이 됐다고 한다. 여기서 換骨奪胎는「면모를 일신하다」는 뜻을 가지게 됐다. 즉 종전의 낡고 평범한 틀을 모조리 갈아치움으로써 보다 새롭게 재탄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환골탈퇴(換骨奪胎)-모습이 전보다 아름다워짐.
남송(南宋) 때의 승려 혜홍(惠洪)이 쓴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실린 이야기로 시나 글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더욱 좋아진다는 뜻이다. “황산곡은 시의 뜻은 깊은데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시를 좋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환골법(換骨法)과 뜻을 본받아 형용(形容)하는 것을 가리키는 탈태법(奪胎法)있다고 했다.”
(385) 해고종견저 인사 불지심(海枯終見底 人死 不知心) <明心寶鑑>
바다는 마르면 그 바닥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386) 허장성쇠(許張盛衰)
허장성세(虛張聲勢)란 실력이 없으면서 허세만 떠벌림을 말하며, 허허실실(虛虛實實)은 서로 재주와 꾀를 다하여 다툼. 을 의미한다.
(387) 허정무위(虛靜無爲) <李 植>
이식(李植)이 아들에게 써준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근래 고요한 중에 깊이 생각해보니, 몸을 지녀 세상을 사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천금의 재물은 흙으로 돌아가고, 삼공(三公)의 벼슬도 종놈과 한가지다. 몸 안의 물건만 나의 소유일 뿐, 몸 밖의 것은 머리칼조차도 군더더기일 뿐이다.
모든 일은 애초에 이해를 따지지 않고 바른길을 따라 행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실패해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순순히 바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만약 이해를 꼼꼼히 따지고 계교를 절묘하게 적중시켜 얻으면 속으로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고, 실패하면 후회를 못 견딜 것이다. 그때 가서 무슨 낯으로 남에게 변명하겠느냐."
또 말했다. "'원유부(遠遊賦)'에서는 '아득히 텅 비어 고요하니 편안하여 즐겁고, 담박하게 무위(無爲)하자 절로 얻음이 있다(漠虛靜而恬愉, 淡無爲而自得)'고 했다. 이 말은 신선이 되는 첫 단계요, 병을 물리치는 묘한 지침이다. 늘 이 구절을 외운다면 그 자리에서 도를 이룰 수가 있다."
이의현(李宜)이 말했다. "재물은 썩은 흙[糞土]이요, 관직은 더러운 냄새[臭腐]다. 군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할 것조차 못 된다. 온 세상은 어지러이 온 힘을 다해 이것만을 구하니 슬퍼할 만하다. 탐욕스럽고 더러운 방법으로 갑작스레 부자가 되거나, 바쁘게 내달려 출세해서 건너뛰어 높은 자리에 오른 자는 모두 오래 못 가서 몸이 죽거나 자손이 요절하고 만다. 절대로 편안하게 이를 누리는 경우란 없다. 조물주가 분수 밖의 복을 가볍게 주지 않음이 이와 같다. 구구하게 얻은 것으로 크게 잃은 것과 맞바꿀 수 있겠는가? 이는 아주 사소한 것일 뿐인데도 보답하고 베풀어 줌이 이처럼 어김이 없다.
하물며 흉악한 짓을 멋대로 하고 독한 짓을 마구 해서 착한 사람들을 풀 베듯 하고서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던 자라면 마침내 어찌 몰래 죽임을 당함이 없겠는가? 하늘의 이치는 신명스러워 두려워할 만하다."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할 사람이 적지 않겠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믿고 세상을 농단하던 자들의 말로는 늘 비참했다. 지금까지 제 눈으로 확인한 것만도 수없이 많았을 텐데 자신만은 예외일 것으로 믿다가 뒤늦게 땅을 친다. 아! 너무 늦었다.
(388) 현부 영부귀 악부 영부천(賢婦 令夫貴 惡婦 令夫賤) <明心寶鑑>
어진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만들고, 악한 아내는 남편을 천하게 만든다.
(389) 형설지공(螢雪之功) <李瀚. 蒙求>
진(晉)의 손강(孫康)은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얻을 길이 없어서 대청마루에 큰 함지박에 겨울눈을 가득 담아 달에 반사되는 빛으로 글을 읽어 후에 어사대부(御使大夫)가 되었고 , 차윤(車胤)은 성근 베주머니에 반딧불을 수 십 마리 잡아넣어 그 반사되는 불빛으로 책을 읽어 뒤에 관직이 이부상서(吏部)가 되었음을 일깨우는 권학의 말로서 형창설안(螢窓雪案)이라 한다.
진(晉)나라 효무제 때, 어렵게 공부하여 크게 된 인물 가운데 차윤(車胤)과 손강이 특히 유명하다. 차윤은 자(字)가 무자(武子)이며,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생각이 깊으며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뒷받침해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차윤은 집안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서 낮에는 밖으로 나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 되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그것 또한 여의치 못했다. 그는 무슨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하기로 했다. 엷은 명주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수 십 마리의 반딧불을 잡아 그 속에 넣고는, 그 빛으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차윤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끈기 있게 공부하여 이부상서의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다. 지금 사람이 서창(書窓)을 형창(螢窓)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車胤武子 幼 恭勤搏覽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盛數十螢火 照書讀之 以夜繼日 後官至 尙書郞 今人以書窓 爲螢窓由此也. [출전] 진서(晉書) 차윤전(車胤傳)
또한 손강(孫康)도 차윤과 마찬가지로 집이 너무 가난하여 밤을 밝힐만한 기름이 없었다. 그는 겨울이 되면 창가에 앉아 밖에 쌓인 눈빛에 책을 비춰 가며 공부를 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청렴결백하여 친구를 사귀어도 함부로 사귀는 일이 없었다. 뒤에 어사대부에 까지 벼슬이 올랐다.
지금 사람이 서안(書案)을 설안(雪案)이라 함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晉孫康 少 淸介 文遊不雜 嘗映雪讀書 後官至御史大夫今人 以書案爲雪案 由此也.
[출전] 후진(後晉) 이한(李瀚이 지은 몽구(蒙求) 라는 책 이 이야기에서 고학하는 것을 '형성'이니 '형설지공'이니 말하고 공부하는 서재를 가리켜 '형창설안(螢窓雪案)'이라고 한다.
반딧불 창에 눈(雪)책상이란 뜻이다. 눈빛과 반딧불로 글자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글자가 굵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들이 그만큼 눈의 정기를 남달리 좋게 타고났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가난(역경)을 이겨내고 꾸준히 학문을 닦은 보람'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동의어] 형창설안(螢窓雪案). 차형손설(車螢孫雪). 영설독서(映雪讀書).
(390) 호가호위(狐假虎威) <戰國策>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다른 짐승을 놀라게 한다.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림에 비유하는 말이다.
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 초엽, 초(楚) 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선왕은 위(魏:梁)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가 그의 신하가 된 강을(江乙)에게 물었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 제국이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북방 제국이 어찌 일개 재상에 불과한 소해휼 따위를 두려워하겠나이까. 전하, 혹 '호가호위'란 말을 알고 계시옵니까?" "모르오." "하오면 들어 보시오소서. 어느 날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이렇게 말했나이다.
'네가 나를 잡아먹으면 너는 나를 모든 짐승의 우두머리로 정 하신 천제(天帝)의 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천벌을 받게 된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당장 내 뒤를 따라와 보라구.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호랑이는 여우를 따라가 보았더니 과연 여우의 말대 로 만나는 짐승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 을 달아나게 한 것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였는데도 호랑이 자신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지금 북방 제국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소해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軍勢), 즉 전하 의 강병(强兵)이옵니다." 이처럼 강을이 소해휼을 폄(貶)하는 이유는 아부로 선왕 의 영신( 臣: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이 된 강을에게 있어 왕족이자 명재상인 소 해휼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원문 :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 今子食我 是逆天帝命也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觀 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故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 以爲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而專屬之 昭奚恤 故北方之畏奚恤也 其實畏王之甲兵也 猶百獸之畏虎也.
(391) 호연지기(浩然之氣) <孟子>
맹자에 나오는 말씀이다.
하늘과 땅 사이 혹은 사람의 마음에 차있는 넓고 굳고 맑고 올바른 기운을 이름이다. 과연 대장부가 가슴에 품고 세상에 나타날만한 호탕한 기개가 아닌가.
(392) 호시탐탐(虎視眈眈) [출전] <주역(周易) 경문(經文)>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다는 말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형세를 바라보며 기회를 노린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비하여 방심하지 않는 모습을 말한다. <주역> 64괘에 이괘가 있다.
이괘에서 '이'란 아래턱을 가리키는 말인데, 기른다는 뜻이 있다. 괘형은 두 양이 위아래로 있고 마음이 가운데 끼어 있는 형상으로 마치 사람이 입을 벌린 모습과 비슷하다.
따라서 괘덕으로 보더라도 이것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의 몸이 길러진다는 뜻이 생겨난 것이다. 이 괘의 효사에 이렇게 되어 있다.
"거꾸로 길러지는 것도 길하다. 호시탐탐하여 그 욕심을 좇아가면 허물이 없다."
이괘는 인간 세상의 계급에 비유한다면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르는 위치인 대신에 상당하다. 따라서 혼자의 힘으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백성들을 기르는 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몸조차도 추스르기 어렵다. 천자와 백성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사람이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것처럼 하여 위엄을 갖추고 행동한다면 아랫사람들 또한 그를 받들게 될 것이다.
(393) 호접지몽 [胡蝶之夢] <莊子>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되어 있었다.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피상적인 구별, 차이는 있어도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 장주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주라는 경지,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물아의 구별이 없는 만물일체의 절대경지에서 보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이처럼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는 것,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394) 홍일점(紅一點)
우리는 흔히 수많은 남성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을 홍일점이라고 한다. 그럼 홍일점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쓴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그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을 따져 올라가면 중국 송나라의 변법가 왕안석임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이 살던 중국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 전쟁과 반란의 역사를 끊어 버리고자 송나라 태조가 실시한 <문치주의> 때문에, 송의 국방력은 너무도 허약했다. 송의 국방력이 허약한 것과 비례하여 주변국들은 송나라를 업신여기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가 겪은 치욕 중에서 가장 큰 치욕인 정강의 변을 겪게 된다. 중국 황제가 이민족에 의해 끌려가고, 주변 민족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 왕조를 유지해나간 것이다. 김용의 원작소설로 알려진 사조영웅전도 바로 이 정강의 치욕에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거란의 요나라, 탕구트족의 서하, 여진족의 금나라, 훗날 몽골족의 원나라까지.... 송나라는 주변국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의 보수 세력들은 하나같이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주변국에 내야 할 세금은 백성들의 고혈이었지만, 백성들을 위한 획기적인 부국강병책은 없었다.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이 이민족의 군대에 의해 잡혀가고 송나라(북송)는 곧 망한다. 그러나, 정강의 변보다 앞서 신종 치세 때 등장한 왕안석은 약해빠진 송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왕안석은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법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그는 전통적 유학 사상에 얽매여서는 국가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공자 사상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요순시대의 초기 태평사상과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왕안석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려고 했다. 그의 진보적인 정당을 역사에서는 <신법당>이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도 과감한 진보적 신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법당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구법당>과 대립하면서 왕안석은 백성들을 위한 과감한 대책들을 쏟아내었다. 송나라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한 시기이면서도, 가장 활발하게 붕당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신법당은 끊임없이 개혁안을 던져놓았고, 구법당은 신법당의 개혁이 부당하다는 것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이 두 당의 공존 시기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등장한 수많은 학자와 문예가들이 있었고, 제법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들도 구법당에 들어가 왕안석과 논쟁을 하곤 하였다.
신법당은 국가 인력 확충을 위해 과거제도를 개방적으로 확대하고, 신분보다는 태학의 유학생 등 지식을 우선으로 하는 인재 등용을 논의하였다. 또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싼 이자로 농기구와 물자를 대여해주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반 농가에 군용 말을 키우게 하여 국방을 강화시키는 대신 농민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자고 하였으며, 농촌 사회를 군 행정구역과 일치시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대 유명한 지식인이자 학자들인 사마광, 구양수, 소식 등은 왕안석의 획기적인 방법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어난 개혁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좌절하였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자신의 본문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는 <도덕성>이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일반 민중들이 수긍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패하고 망해 가는데 도덕성도 없는 보수에게 무엇을 믿고 맡긴다는 것인가?
그렇게 망가진 보수주의자들이 왕안석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 모나게 튀어나온 못이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 사상이 결국 좌절될 것임을 알고 비통해했다. 국왕의 신임이 얻고 있는 동안에야 개혁이 가능하겠지만, 왕이 바뀌고 자신이 죽고 난다면 누가 또 굳이 힘들게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겠는가?
왕안석은 자신의 시 <석류>에 <홍일점>이라는 말을 남긴다.
수없이 푸르고 푸른 것들 중에서
홍일점이 있구나.
사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색은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아니구나.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붉은 점이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눈에 띄는 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붉은 점이 많았다면, 흔했다면 관심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안석이 생각한 홍일점은 수많은 꽃 중에 눈에 띄는 하나의 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어서 질투를 받아야 하고, 홀로 걸아야 하며, 그 색이 바래지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닐까? 왕안석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붉은 색들이 많았다면, 붉은 색들이 푸른색들을 압도한다면... 세상을 바뀌지 않을까?
결국 송나라는 왕안석이 죽은 이후 얼마 못가 금나라에게 국토의 절반을 강탈당하고, 몽골제국에게 멸망하게 된다. 그 북방민족들은 왕안석이 그토록 가지고자 했던 강력한 기마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395) 화기치상(和氣致祥) 장락무극(長樂無極)
마음이 고를 때 상서로운 일을 이루고, 즐거움이 끝이 없는 뜻이다.
(396) 환골탈퇴(換骨奪胎) <南宋. 冷齋夜話>
모습이 전보다 아름다워짐.
남송(南宋) 때의 승려 혜홍(惠洪)이 쓴 <냉재야화(冷齋夜話)>에 실린 이야기로 시나 글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더욱 좋아진다는 뜻이다. “황산곡은 시의 뜻은 깊은데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시를 좋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환골법(換骨法)과 뜻을 본받아 형용(形容)하는 것을 가리키는 탈태법(奪胎法)있다고 했다.”
(397) 효(孝)
공자께서도 효(孝)는 만행의 근본(萬行의 根本) 이라고 가르치셨다.
예로부터 효(孝)는 백행지원(百行之源), 백행지도(百行之道)라 해서 인간 행동규범 가운데 으뜸으로 삼아왔다.
(398) 효시(梟示)
효시(梟示)란 효시경중(梟示警衆)의 줄임말로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의 목을 베어 매달아 군중 앞에 공시함으로써 대중을 경계시키던 일이다. 효수(梟首)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시작년도는 알 수 없지만 기록상으로 고려시대에 실시된 것으로 추측된다. 주로 동아시아에서 참수 후 저자거리나 성문 등에 그 수급을 매달아 놓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으나, 올리버 크롬웰역시 죽은 후 무덤이 파헤쳐지고 부관참시 된 후 효시된 것으로 미뤄본다면, 서양에서도 효시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효시 자체는 사형이 아닌 명예형이다.
(399) 훈민정음 서문(訓民正音 序文)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 불상류통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를 가지고 서로 흘러 통하지가 않는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고우민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몯핧 노미 하니라)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내가 이를 위해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내 이랄 위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짜랄 맹가노니)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矣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의)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배워 매일 사용함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사람마다 해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져 핧 따라미니라)
(400)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論語>
시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과 감흥을 일으키어 인간의 감정을 풍성하게하고, 예는 인간의 행동의 규범을 가르치고, 음악은 인간의 정서를 부드럽게 하고, 인간성을 순화 시킨다. 시서예악(詩書(藝樂)은 공자의 인격교육의 핵심이다.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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