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그의 삶은 기독교적인 윤리와 사랑이 드러나고 실천되는 숭고한 것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특히 불신자들은 선량한 의사를 슈바이처 같다고 칭찬할 정도이다. 슈바이처의 이력을 보면 신학을 먼저 공부하고, 선교와 전도를 위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최소한 그의 마음에는 마 5:16의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신앙적 실천의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다른 신자들에게도 존중받을 만한 믿음의 모습이다.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글을 올린다.
알베르트의 아버지 루트비히(1846-1925)는 알자스의 목사였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태어날 당시 알자스는 독일제국에 속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카이저스베르크였고, 태어난 뒤 곧 가족은 귄스바하로 이사했다. 어릴 적에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은 그는 곧 오르간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이 악기는 그의 평생을 함께했다. 탁월한 바흐 해석자였던 알베르트는 자신이 계획한 삶을 위해 즉 아프리카 랑바레네 밀림병원을 세우기 위해 연주회로 돈을 벌었다. 알자스의 뭘하우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뒤, 1893년 슈트라스부르에서 신학을 전공하기 전, 파리에서 오르간의 대가 샤를-마리 비도르Charles-Marie Widor(1844-1937)에게 수업을 받았다. 1898년 신학 국가시험에 합격했고 이어 1899년에는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학자로서는 동시대인들의 ‘삶-예수-연구'에 대한 견해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런 연구를 소설 같으며, 예수의 종말론적 복음에 대한 오해라고 비난했다. 이런 활동과 함께 의학을 전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의사가 된 뒤 1913년 아프리카 가봉의 도시 랑바레네로 갔다. 유럽으로 여행하느라 자주 랑바레네를 떠나기는 했지만,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고, 도덕의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는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이미 의문시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식민주의자로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1953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거의 같은 시기 핵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세계정치 세력의 전투지역에 빠져들게 되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했던 의학적 사회 참여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가 세계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소신의 결과였다. 이런 것은 진보 신학적인 부모님 집에서 받은 유산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슈바이처가 훗날 피조물에 대한 자비와 존중을 중시하는 자신의 윤리학(《삶에 대한 경외 Erfurcht vor dem Leben》)이 종교적 기반 위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에게는 실제적 사회정신이었다.
클라우스 핏셴, 『1세대 목사가정 이야기』, pp. 212.
첫댓글 신학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헌신한 분 같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먼저 신학을 공부한 분이 선교와 선행을 위해서 의학을 공부했군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제자의 삶을 살았고요. 좋은 포스팅입니다.
노벨평화상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겠죠. 기독교 정신의 훌륭함을 잘 보여 주셨네요. 밀림병원을 세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오르간 연주를 했다는 것에서 진정성을 느낍니다.
네, 그 부분이 특히 포인트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좋은 내용입니다. 기장이나 감신이 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지만 정작 목회 현장으로 나아가면 의외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슈바이처도 조금 그런 경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슈바이처는 복음 중 이웃 사랑을 잘 알고 실천한 사역자입니다. 포스팅에 공감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