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의 특징 중 하나는 몇몇 작곡가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작곡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쇼팽의 경우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폴란드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1787년에 그곳으로 이주한 프랑스인의 아들이었다. 프랑스 파리는 쇼팽의 나이 21세 때부터 고향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곳을 떠나 음악적 행운을 찾기 위해 서유럽으로 떠나간 것은 맞지만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파리에서 베를리오즈, 리스트, 멘델스존, 알칸, 그리고 후세보다는 당대에 더 잘 알려진 작곡가와 명연주가들을 알게 된다. 작가와 화가, 특히 데라크와 사귀었고 독일을 방문해 슈만과도 친분을 맺었다. 이런 환경들이 오로지 20대 시절에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쇼팽의 작품 대부분이 파리로 온 이후에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보다 2~3년 전에 쓰인 음악들, 예컨대 2개의 피아노 협주곡, 첫 번째 연습곡집(Op. 10)의 대부분의 곡들과 21개의 녹턴 가운데 7개(1~5, 19~20번)는 이미 완성된 음악적 언어와 피아노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쇼팽에게 있어 이후의 음악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난 것들이다. 다만 이후의 쇼팽 음악은 음악적 스타일에서 뚜렷해지고, 단지 구조적으로 끊임없이 세련되거나 혹은 대위법 같은 테크닉을 쓰게 된 것이다. 사실 바흐의 악보는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피아노의 한 장르로서 녹턴, 곧 야상곡은 원래 존 필드가 만들어냈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19세기 초 동유럽으로 이주했는데, 지리적으로 쇼팽과는 엇갈리는 이동이었다. 1812년과 1836년 사이 출판된 필드의 녹턴들은 화성을 채우는 베이스 패턴의 반주 위에 장식이 많이 있는 노래하는 선율의 형식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이는 쇼팽이 녹턴을 만들기 시작한 기준이 되었다. 쇼팽은 1832년까지 필드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필드의 녹턴을 바르샤바의 어린 시절에 들었거나 아니면 언젠가 이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쇼팽은 생애에 걸쳐 2개 또는 3대의 세트로 18개의 녹턴을 출판했다. 나머지 3개의 녹턴은 1827년과 1837년 사이에 발견된 뒤 그 다음 세기에 출판됐지만 매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 역사상 쇼팽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정확히 정의하기는 힘들다. 작품 대부분이 피아노 곡이기도 하고 그의 음악이 음악적임에도 분석적인 구성에 꼭 맞아 들어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아주 멋진 변주나 즉흥적 경향을 띠고 있는데, 대부분은 한 가지 형식, 예컨대 3부분 형식(녹턴의 기본) 또는 소나타 형식에 더해서 드라마틱한 장식을 요구한다. 쇼팽은 어떤 작품도 똑같은 방식으로 쓰지 않았다. 같은 곡에서 앞에서 나왔던 부분이 재현돼 나올 때도 그 선율이 장식되거나 변화할 뿐 아니라 아주 다른 화음으로 바뀌어 지기도 하고, 반주 형태가 바뀌어서 3부분 형식의 균형이 더욱 드라마틱해지는 진보적인 모습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쇼팽은 녹턴에서 서로 다른 장르 사이의 명백한 장벽을 없애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왈츠, 마주르카, 바칼로레(뱃노래)가 그의 발라드나 스케르초, 폴로네이즈에서 나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녹턴은 작은 마주르카를 나오게 할 수 있다(20번 C# 단조 녹턴). 예기치 못한 병행, 계획적으로 쓴 반음계적 화성이나 장조와 단조를 바꾸는 솜씨 역시 음악을 살아있게 하는 감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예는 작품 15의 5번이다. 마주르카와 같은 부분이 있고 그에 이어 장엄한 코랄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지 않고 갑자기 끝을 맺는다. 이는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경향으로, 이 작품 이전의 것들은 통례적 다 카포의 형식을 썼다(같은 사본의 이면에 연습곡 작품 10의 9번이 있다. 이는 이 녹턴의 일부분은 적어도 여기에 쓰인 1833년보다는 훨씬 전에 작곡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쇼팽은 이 작품을 햄릿과 연결 지었다.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문학적인 표현 중의 하나다.
이런 점에서 녹턴은 친근감이 있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는 쇼팽의 발라드나 다른 대곡들과 같은 타입의 소재 위에 작곡된 만큼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한 대조를 지닌다. 후기의 녹턴들은 그 안에서의 대조가 더욱 미묘해졌다. 지나친 강약의 사용은 작품 48의 1번과 같은 덜 세련된 곡들에 사용됐다(이 곡에서 ‘야상곡’이라는 제목의 한계를 넘었다). 점점 극단적이고 격정적인 열정을 띠는 장송행진곡은 쇼팽 당대의 괴짜인 알칸까지도 놀라게 했다. 또 다른 드라마틱함을 품은 작품들도 있다. 작품 32의 1번은 단조의 끝맺음이 악마적인데, 이것은 많은 해설자들에게 영웅적인 비극으로 들리게 했다. 쇼팽이 그런 표제들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명한 것이었다. 음악이란 그 자체로써 말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드뷔시의 표현대로 “피아노와 개인 사이의 대화”인 것이다.
참고로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쇼팽의 녹턴 연주를 녹음해 두 장의 LP에 나눠 실은 1982년 음반 <Chopin·Nocturnes>(도이치 그라마폰/성음)이 있다. 쇼팽의 작품 Op.9, 15, 27, 32, 37, 48, 55, 62, 72, post가 실렸다.
*다니엘 바렌보임
194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이다. 일가는 곧 이스라엘로 이주한 뒤 바렌보임은 곧바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음악원으로 유학해 대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를 사사했다. 에드윈 피셔는 바렌보임의 천부적인 음악성을 알아채고 피아니스트의 영역뿐 아니라 지휘자의 영역까지 발전해 나갈 것을 권유했다. 지휘는 이고르 마르케비치로부터 지휘법을 연마해 오늘의 바렌보임을 있게 한 기초 작업을 다듬었다. 1950년대에 피아니스트로 폭넓은 활동을 펼친 바렌보임은 1960년대 들어 지휘자로 전향한 뒤 마침내 파리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25세 되던 1967년에 데뷔한 그는 루빈스타인을 잇는 후계자로 여겨졌다. 20대 중반의 나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지적 성숙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렌보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렌보임의 음악적 모델이었던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다. 바렌보임은 푸르트뱅글러를 이렇게 말했다. “음 하나하나를 윤택하게 하는 푸르트뱅글러 선생의 통찰력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음악의 내적 논리를 정확히 이해했고 주제의 혼합과 미묘한 템포의 변화를 통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는 리듬을 창출했다.”
여러 나라에서 화려한 음악적 경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바렌보임은 피아니스트로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66년 영국 실내 관현악단English Chamber Orchestra을 맡아 풍부한 뉘앙스를 표출시킴으로써 그때까지 누구도 접하지 못한 피아노 협주곡을 들려주었다.
바렌보임의 매력은 연주와 생활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의 연주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결과였다. 각 선율은 듣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와 닿아 말할 수 없는 음악적 희열을 충족시켰다.
바렌보임은 냉철함과 강인함을 두루 갖췄다. 냉철함은 연주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억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쇼팽의 녹턴을 연주한 음반에서 그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다. 거기서 비로소 가슴으로 송두리째 느껴오는 슬픔, 혹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빚어지는 것이다. 연주 테크닉과 음악에 대한 확신 외에 그 어떤 외부 자극도 음악적 절정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의 연주는 뚜렷하게 증명한다. 한 순간을 사로잡는 격렬함이 아니라 세부적인 집중을 통한 작품의 전반적인 이해를 통해 모든 순간순간 쇼팽의 세계를 진지하게 풀어놓는 것이 그의 음악적 특징이다.
요컨대 다니엘 바렌보임은 음악의 수직적, 수평적 양면에 주목해 청중들을 음악의 내부로 이끌어가는 연주자다. 모든 음악적 요소들을 버무려 가장 적절하게 통일적 형상을 빚어내 생명과 활기를 음악적 연출의 영역으로 새롭게 주입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