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 감나무에도 봄은 어김없이 왔다. 제 안 빛깔들을 끌어내어 한 해를 보낼 푸른 집을 짓기 시작한다. 물새도 안전한 곳에 둥지를 틀고, 바지락도 번식을 위한 집을 지으며, 굴도 갯바위 여기저기에 다닥다닥 껍질 새집을 짓는다. 겨울을 이겨낸 청보리조차 견고한 초록 집터를 다듬는다. 곳곳에서 보금자리를 장만하느라 섬마을이 들썩거린다.
집은 안식처다, 작고 초라한 셋방일지라도 가족에겐 둘도 없는 보금자리가 된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 가족이 오순도순 나누는 대화. 때로는 소설 같은 촛불이 집안 분위기를 돋운다. 지친 몸을 녹이고 미래를 설계하면서 꿈을 키워가는 곳이 가정이고 집이다.
내 주민등록 초본을 떼면 두 장이나 된다. 어린 시절 주소는 완도군 소안면 가학리 하나였지만 결혼 후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점점 주소지가 늘었다.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할 때, 개구쟁이 아들 두 녀석이 시끄럽다고 집을 비워 달라 할 때, 주인집에 사정이 생겼을 때 이사를 가야만 했다. 이삿날이 되면 남동생 친구들이 올망졸망한 살림살이를 리어카로 실어주었다. 남편의 소지품이 별로 없는 조촐한 세간살이였다. 두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면 이사 가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서럽지도 않았다. 언제 또 이사 가야 할지 모르지만 작은 셋집일 망정 포근한 둥지가 되어 주었다.
수산대를 졸업한 남편은 운명처럼 배를 타야 했다. 배가 그의 일터이자 그곳이 밥 먹고 쉬는 집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과도 헤어져 살았다. 셋방을 전전하던 어느 해, 귀국한 그가 의중 깊은 말을 했다. “우리는 맨땅, 맨 바다에서 출발하지만, 자식한테는 기댈 집 언덕을 줍시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힘주어 맞잡은 내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믿음과 의지로 후끈 달아올랐던 열정의 시절이었다.
가장의 부재를 메워가며 두 이이를 보살피는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집 장만이 최우선이라 여겨 사치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그가 번 돈은 악착같이 알뜰살뜰 저축했다. 여유가 생가자 장남인 그는 시골 부모님께 논밭을 사드리자고 했다. 시골에서는 땅을 가져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팔았던 땅을 찾아드리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두말없이 논을 장만해 드렸다.
시부모님은 육십 년 동안 한집에서 살아왔다. 열두 식구가 비벼댔으니 곳곳이 탈이 나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흙으로 지은 집이니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 되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평생 고생한 두 분이니 좋은 집에서 그럴듯하게 한번은 살아 보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명의로 된 논을 일부 팔아 집 짓기를 착공했다. 부족한 건축비는 그가 열심히 더 벌고, 내가 더 아끼면 될 일이었다. 얼마 후 동네에서 최고로 아담한 양옥집이 완공되던 날, 시부모님은 어느 때보다 주름살 사이로 함박꽃을 피웠다. 부모님에게 집을 지어드리고 나니 마치 우리가 집을 가진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집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가장은 이름만으로도 어깨가 무겁다. 선장이 되면서 더 자주 바다로 나갔다. 거칠게 울렁이는 배 난간에 기대어 지붕 없는 캄캄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눌렀으리라. 큰 풍랑에 대책 없이 흔들릴 때면 편안하게 누울 이부자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족을 위한 집을 꿈꾸며 태평양, 남극해를 항해하며 더욱 힘차게 주낙을 던졌을 그를 상상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책임만큼 무거운 고독은 어디 있을까.
집을 드린 기쁨은 원했던 만큼 길지 않았다. 겨우 십여 년을 살다 시아버님이 먼저 먼 길을 떠나셨고, 삼 년 후 시어머님도 선장인 큰아들의 배웅도 없이 남편의 뒤를 따라가셨다. 자식 도리를 다하려는 냠편의 짐을 나누고 싶었다. 그의 좋은 의견에 힘을 실어주고 그가 뜻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내의 내조라 생각했다.
우리는 부산에 살고 있었기에 시부모님의 영가가 봉안된 김제의 암자에 자주 뵈러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편은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의 불효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님 안식처는 자식이 자주 뵐 수 있는 곳, 안락하고 편안한 곳, 차후에 함께할 곳이면 좋겠다고 넌지시 건네니 남편은 기다린 듯 흔쾌히 받아들였다. 길일을 택하여 부산 인근의 천주교 하늘 공원에 안장해 드렸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영원히 계실 집이 갖추어졌다.
큰아들이 가족 단톡방에 아버지에 대한 글을 올렸다. 늦은 결혼이었지만 곧바로 예비 아빠가 될 장남이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의 헌신을 본받으며 살아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의 마음을 읽은 남편은 지나온 삶이 헛되지 않았구나, 큰 위로를 받는 듯했다. 희끗한 머리카락에 얼굴 잔주름 사이로 잔잔한 미소가 가득했다. 어쩜 시아버님의 미소를 그토록 닮았을까.
집은 행복을 주는 공간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왔다. 가장이라는 이름은 집 짓는 남자의 역할과 동일했다. 요즘 그 남자는 항구와 항구를 오가는 항해를 마치고 집에 휴식의 닻을 내렸다. 헌신과 희생을 나눈 우리 부부는 결혼 13년 만에 부모님 집을, 3년 후에 우리 집을, 그 후에 부모님의 영원한 안식처까지 마련했다.
조그만 사글셋방이나 전셋집에서 오글거리며 살았던 육이오 세대들은 집이 행복임을 본능적으로 수긍한다. 어디선가 오늘도 가장의 이름을 단 남자가 집 짓기를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지는 해도 산 너머에서 밤을 새우며 집을 짓고 있으려나,
첫댓글 최 작가님은 마음도 얼굴처럼 고우신 분이군요. 가장없는 엄마의 노릇이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현명하게 살아내신 작가님의 앞날이 청청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