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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은 바로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구리가 뱀에게 발각돼 잡아먹히는 것은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이며, 꿩의 울음소리는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 또한 물고기는 입으로 낚인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잘못 쏟아진 말은 항상 재앙을 부른다. 목소리가 큰 사람은 허풍과 과장이 많고 애매하게 말하는 사람은 거짓이 많다. 수다를 떠는 사람은 진실성이 약하고, 과격하게 말하는 사람은 억지가 많다.
음수(-)는 그 힘이 상당히 막강하다. 음수(-)와 양수(+)를 곱하면 결과는 항상 더 큰 음수가 나온다. 부정적인 말 역시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말은 전체 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태도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선조들과 말
옛 선조들은 말에 관하여 지혜의 말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말은 아끼되 잘해야 됨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고 있고,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라는 우리의 옛 속담은 항상 입조심을 해야 함을 잘 나타낸다. 사람이 하는 말에 발이 있을 리 없지만 말이란 것은 한 번 하고 나면 순식간에 퍼진다. 또한, ‘침묵은 금’이라는 속담은 상처를 주는 나쁜 대화나, 의미 없이 쏟아놓는 말보다는 차라리 무언(無言)이 낫고‘금’처럼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말이란 자칫 잘못 나오면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역전시킬 경우가 비일비재하기에 ‘구화지문’(口禍之門) 즉, ‘입은 재앙의 문’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구화지문과 비슷한 뜻의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라는 고사성어도 있는데, 그 뜻은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와 같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현대인들의 말과 언어
현대인들은 아무 의미없는 말을 하루 동안도 수없이 남발한다. 어떤 때는 도무지 아무 쓸데없는 말을 할 때도 있다. 말이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다 먹고 책가방에 넣어 메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달그락’하고 소리가 난다. 뛰면 ‘달그락 달그락…’ 더 요란한 소리를 낸다.
오늘날 인간의 말은 거의 소음처럼 변해버렸다. 말을 안 해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이다. 각종 공해로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 우리의 마음과 주변에 온갖 오염물질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진 섬뜩한 표현의 말들이 청소년들과 심지어 중,장년층들에게까지 사용되고 있다.
자녀들과의 관계나 남녀관계에서 혹은 부부관계에서 실망을 주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대부분의 원인도 ‘말’에서 시작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고 신뢰의 양분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말’인데, 이를 소홀히 하고 잘못 사용하면 마음의 끈이 느슨해지고 결국 파손되어 버린다. 한번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또한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정치권에 휘몰아 쳤던 태풍의 발단도, 말에서 비롯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음을 떠나서 말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하다. 좋은 말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향기로운 말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말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냄새 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연습해야 할 ‘하늘의 언어’는 과연 무엇인지 심사숙고 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사용되어야 할 하늘 가나안의 언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인정과 포용의 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앙숙이었다. 그들은 서로 피해 다녔으며 떡 한 조각이나 물 한 모금도 서로에게 구하지 않았었다. 사마리아인에게 호의를 구한다거나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한다거나 하는 일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고 영혼의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수를 주셨다.
그때 예수님은 하늘의 놀라운 기별로 이 이방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로 인해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셨고, 오히려 편견을 깨뜨리시고자 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을 듣는 사마리아 여인의 생각을 형식과 의식 문제나 쟁론의 문제들을 초월하게 만드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라고 인정과 포용의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우물에 나온 용무도 잊어 버린 채 물동이를 버려 두고 다른 사람에게 기별을 전하기 위하여 동네로 돌아갔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왜 떠나갔는지를 아셨다. 그녀가 물동이를 버리고 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의 감화가 어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영혼의 간절한 소망은 생수를 얻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서 자기가 받은 귀한 빛을 남에게 전하기 위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그리고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었다.
만일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신 인정과 포용의 말이 없었다면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정과 포용의 말을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산 도구가 되어야 한다.
2. 희망과 용기의 말
성경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성품의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을 비춰준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고 구원하시려 노력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세상은 이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죄는 사랑하면서도 죄인은 미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고 죄인은 사랑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비난의 말을 하는 데는 느리고, 용서와 격려를 하는 데는 신속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말이다.
우리는 상처 받은 사람에게 치료하는 향유가 될 수 있는 믿음과 용기의 말을 하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큰 투쟁에서 용기를 잃고 낙담해 왔다. 그러나 이 때 한마디의 친절한 격려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들은 승리할 힘을 얻었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하는 영혼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처럼 위로를 나누어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3. 지혜의 말
어느 장님이 팻말을 목에 걸고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팻말에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 라는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 장님에게 동전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 날, 장님이 쪼그려 앉아 빵조각을 먹는 것을 보고 한 청년이 장님에게로 다가와서는 불쌍했던지 그 장님을 위해 팻말의 글귀를 바꿔주기로 했다. 그 청년은 팻말에 있던 글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저는 봄이 와도 꽃을 볼 수 없답니다.” 그 후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 사람들은 장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장님 앞에 놓인 깡통에 동전을 아낌없이 넣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글자 몇 개 바꿨을 뿐인데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말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주고,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다.
때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한번 더 생각하고 현명하게 판단하여 발하는 지혜로운 말 한마디는 상대방을 구원하는 하늘의 언어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 19:7)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죄로 인하여 우둔해진 인간은 지혜의 하나님께 접 붙인바 되어야 하고 지혜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4. 친절과 동정의 말
예수님은 순결하고 흠이 없으셨을 뿐 아니라 인내, 온유, 쾌활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불쌍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언제나 친절한 얼굴로 대하시고 또 위로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예수님이 방문했던 가정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신선한 공기가 감돌았다.
깨끗하고 흠이 없으신 주님께서는 무지 몽매하고 무례한 백성들과 부정직한 세리, 불의한 사마리아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군대, 무례한 농부, 그 밖의 여러 무리들 속에서 생활하시며 어느 곳에서나 늘 동정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애쓰는 사람을 보실 때에 그 짐을 함께 져주시고, 그에게 천연계에서 배운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과 선하심에 관한 교훈의 말씀을 거듭거듭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가장 사납고 도무지 장래성이 없어 보이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러움이 없는 품성에 달할 수 있음을 제시하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힘쓰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아무리 완고하고 거친 성격이라도 부드럽게 만들며, 행실이 아무리 포악하고 괴팍할지라도 상냥하게 만든다. 또한, 말과 태도를 온순하고 우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순결하고 고결한 정신과 명랑한 기질을 결합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친절과 예의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가장 힘있는 논증이다.
친절한 말은 사람의 마음에 내리는 고요한 이슬과 부드러운 빗줄기와도 같은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입술에 은사를 주심으로 그가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사 50:4) 하셨다고 하였고, 또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골 4:6)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하셨다.
5. 감사의 말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江本勝)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눈(雪)의 결정에는 모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착안, 물도 분위기에 따라 또 다른 형태나 얼굴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얼린 물의 결정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8년동안 사진을 찍고 실로 놀라운 결과를 발견했다. ‘사랑과 감사’라는 글을 보여준 물에서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고, ‘악마’라는 글을 보여준 물은 중앙의 시커먼 부분이 주변을 공격하는 듯한 형태를 보였다. 또 ‘고맙습니다’라고 했을 때는 정돈된 깨끗한 결정을 보여 주었지만 ‘짜증나네’ ‘죽여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폭력을 당하는 듯한 형상을 보였다. ‘그렇게 해주세요’라는 말에는 예쁜 육각형의 결정을 이루었지만 ‘하지 못해!’라는 명령조 말투에는 ‘악마’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다.
음악에도 색다른 반응을 보였다. 쇼팽의 ‘빗방울’을 들려주자 정말 빗방울처럼 생긴 결정이 나타났고 ‘이별의 곡’에는 결정이 잘게 쪼개지며 서로 이별하는 형태를 취했다. 또한 컴퓨터와 핸드폰, 전자레인지, 텔레비전을 곁에 둔 물의 결정은 모두 육각형의 결정을 얻지 못하고 파괴되었는데, 저자는 “인체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전자파가 얼마나 해로운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강조한다.
물 결정사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 것은 바로 사랑과 감사라는 말을 들려주었을 때인데, 이는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에너지를 보내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사람 몸의 70%가 물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또 단백질 분자 1개가 약7만개의 물 분자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을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말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은 ‘사랑과 감사’의 말이라는 것을 물의 결정분석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런 말만 할 때, 지구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찾고 인간은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6. 격려와 칭찬의 말
쿠퍼스미스라는 연구자는 아이들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를 하였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 앞에 목표물을 놓고 콩이 든 작은 주머니를 던지게 하는 실험이었는데, 더 멀리 있는 목표물을 맞출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콩 주머니를 던지기 전에 아이들에게 어떤 목표물을 맞추고자 하는지, 얻고 싶은 점수는 몇 점인지, 그리고 실제로 몇 점을 얻으리라고 예상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신감이 있는 아이일수록 목표를 더 높게 잡는 경향이 있었고, 또 이들은 실제로 목표달성에도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반대로 자신감이 없는 아이일수록 목표를 낮게 잡았고, 낮게 잡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실패가 더 많았다. 즉, 자신감의 정도가 실제로 아이들이 콩 주머니를 던져 목표물을 맞추는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결국 자신의 기대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능력이 있는 아이들이 자신감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아직 서투른 아이들의 조그만 시도를 놓치지 않는 부모의 따뜻한 시선과 말 한 마디가 자신감 있는 아이를 만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말들은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며 우리의 주변에 좋은 감화를 끼칠 수 없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격려와 칭찬은 우리의 인생의 발걸음을 좀더 가볍게 하고 힘있게 한다.
7. 사랑의 말
‘마라스머스’라는 이상한 병이 있다. 이 병은 주로 전쟁 고아나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나타나는데,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몸에 힘이 빠지고 환자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이 병은 영양부족이나 병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바로 사랑의 결핍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부모의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고 어머니의 살내음을 맡아야 할 어린이가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할 때 이 병은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속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남들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라스머스’와 유사한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의사들이 밝히는 이 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너무도 간단한데 그것은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의 말 한 마디가 최상의 묘약인 것이다. 사랑은 만병을 치유한다. 진실한 사랑의 말은 가정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사랑은 키워야 할 나무이다. 우리의 가정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결한 애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들에서 사랑의 나무는 조심스럽게 길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고 말 것이다. 그 나무가 우리의 심령에서 번창하게 하려고 한다면 모든 선한 원칙들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사단이 우리 마음에 심어 놓은 시기, 질투, 억측, 나쁜 말, 조급함, 선입관, 이기주의, 탐욕 그리고 허영심과 같은 것들은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만일 이런 나쁜 것들이 심령에 남아 있도록 용납된다면 그것이 장차 많은 사람을 더럽히게 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값진 열매들을 절멸시키고 심령들을 더럽히는 해로운 나무들을 가꾸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말이 우리 가정과 우리 주위에 늘 메아리 칠 수 있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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