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뛰고 있었다. 뒤에는 놈들이 소리치며 쫓아오고 있었다.
"서어! 서어! xxx야!"
"저 xx 잡앗!"
그날, 햇살 좋았던 가을 날에 나는 묵호 삼거리를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휴일 날 지나가던 사람들은, 관중이 되어 달려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정처없이 맑았다. 햇살의 파편들이 내 눈에 뛰어 들어 따가울 정도였다. 방파제에 나갔다가, 앞 묵호 깡패새끼들을 만난 것이 실수였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강릉고에서 전학 온 내가 괜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놈들은 나에게 복종을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를 묵살했고, 나의 선방에 싸움은 시작되었다. 도저히 놈들의 떼거리를 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도망을 친 것이다.
삼거리에 다달았을 때, 앞에서 놈들의 다른 일행들이 길을 막았다. 도망 칠 수가 없었다. 독 안에 든 쥐였다. 뒤에는 놈들이 숨을 헐떡이며 사냥개 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앞에서 발길질 했던 한 놈의 발을 잡아 삼거리 양복점 쇼윈도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대형 유리창은 박살이 났고, 나는 잽싸게 유리조각 두 개를 잡았다.
양 손에 유리조각을 잡고 나는 소리쳤다.
"덤벼! 덤벼! 덤비란 말이야! xxx들아!"
놈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관중들의 표정도 경악을 하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쌕쌕이가 하얀 그림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갑자기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나는 애써 눈물을 참고 다시 소리쳤다. 놈들에게 약점을 보이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빨리 덤벼 xxx들아!"
그러면서 나는 유리 조각 두개를 양손에 들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놈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관중들도 하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역시, 시골 날깡패새끼들은 순진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앞 묵호 깡패새끼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 학원가로 도망갈 때까지 놈들과 술이나 빨면서 지낼 수 있었다.
1978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정지된 화면 처럼 나의 머리 속에 화석처럼 남아있다. 그 가을 날의 햇살의 파편과, 나를 쫓아왔던 묵호시내 날깡패 새끼들의 욕설과,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관중들과, 하늘을 날았던 쌕쌕이의 하얀그림, 그리고 피가 흐르는 줄 도 모르고 유리조각을 들고 서 있었던 내 모습과, 그때 흘렸던 눈물.......그때, 나는 강릉고에서 묵호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상태였다. 지금은 북평과 묵호가 통합되어 동해시로 되어, 시내 중심이 천곡동으로 옮겨갔지만, 그 당시는 기차역 굴다리를 빠져나와 삼거리가 중심지였다. 묵호는 영동선 기차역의 중요 정차역이었고, 동해안의 유명한 어항이었고, 외국 사람이 들락거렸던 국제항이었다. 대낮에도 묵호극장은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로 시끄러울 정도였고, 앞 묵호 목욕탕과 미용실도 그녀들이 없으면 장사를 못 할 정도였다. 밤이면 삼거리의 카바레는 외항선 탄 남편을 둔, 바람 난 유부녀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굴다리 위 기찻길을 석탄을 실었던 기차가 지나가면, 바람에 까만 먼지가 날아오르곤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묵호는 석탄의 검은색과 술집 아가씨의 빨간 루즈 색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도시였고, 바람 난 유부녀들과 니나노집 한복 아가씨들의 싸구려 향수 냄새와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가 기가 막히게 섞여서, 강한 자극을 주던 도시였다. 어판장의 아줌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고, 항구 위의 달동네에서는 아이들이, 그 밑의 니나노 집에서 쓰레기통에서 뒤진 콘돔을 풍선으로 불면서 노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징어 배가 들어오는 날에는 온 도시가 흥청거렸다. 지나가는 개새끼들 조차 돈을 물고 다닌다고도 했다. 비린 내 나는 돈은 온 도시를 점령했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아이들도 그 당시 학생으로서는 만지기 힘들었던 천원짜리 돈으로 짤짤이를 했고, 그런 돈으로 고등학생이 시내 호프집을 돌아다녀도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때 순진했던 깡패새끼들이 그립다. 얼띠기 사춘기 소년의 유리조각과 내가 흘렸던 빨간 피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박한 권력마저 순순히 내주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작은 권력으로 나를 내리누르려 했지만, 나는 그 당시 그들의 작은 권력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와 기차역에서 번져나왔던 까만 석탄가루,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가 정답게 다가온다. 콘돔을 불고 놀았던 아이들과 악다구니 싸움을 했던 어판장 아줌마들이 사랑스럽다.
분명, 1978 년 그 당시의 묵호의 표정은 십 대 후반의 고등학생에게는 좋지 않는 교육환경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 조차 보수적인 교육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터부시 될 일이다. 나 역시 이성적으로는 바람직한 환경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때의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다녔던 명문고에서의 기억에 대한 억한 심정일 지도 모른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학교는 대학이 전부였다. 네모난 공간에 아이들을 가두어놓고 새벽부터 밤까지 감시를 하며 채찍질 했다.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은 전혀 자율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참지 못하면 문제아가 되었다. 나는 그것에 반항을 하며 뛰쳐나왔다. 그것은 거대한 폭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힘이 아이들을 내리누루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대학을 가야지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교육이었다. 박정희의 파시즘이 교실에도 지배하고 있었다. 깡패새끼들의 작은 권력은 그에 비하면 조죽지혈이었다. 차라리 그 당시 묵호시내의 천박한 표정이 학교의 이성적으로 포장된 네모난 공간보다 인간적이었다.
권력으로 교육을 시키고, 권력을 잡는 것이 최상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 교육이 아니다. 나는 비록 깡패새끼들에게서 작은 권력은 취할 수 있었지만, 학교의 커다란 폭력 앞에서는 어쩌지 못했던 순진한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1978 년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 날의 화면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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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1978년 그 가을날의 그곳에 와있다. 그러나 많이 변해있다. 묵호는 동해시로 이름도 변했고 중심가도 과거 야산이었던 천곡동으로 옮겨갔다. 과거의 중심지 묵호동 발한동은 이제 과거의 중심지에서 퇴색된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묵호 어판장 앞의 색시집 골목에 이제는 한복 입은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 아가씨들의 껌 씹던 소리가 요란했던 묵호극장은 이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형할인점이 들어섰다.
그러나, 묵호항은 그곳에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때 앞묵호 오징어 덕장에 마치 만국기 처럼 널려있던 오징어는 사라지고 빈덕장만 남아있다.
나는 이제 이곳 묵호항에서 그 귀한 오징어를 사서 판매하는 장사치고 되고 말았다.
세월은, 철모르고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을 늙은 장사꾼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제, 나는 이곳에 서있을 것이다.
이제, 나의 유일한 희망은 이렇게 사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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