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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옥저의 비밀을 밝히다.
무척이나 오랫동안 비밀에 숨겨져있던 남옥저가 드디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름조차 듣기가 생소하던 남옥저는 동옥저의 남쪽 해변을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함경도의 원산 남쪽을 남옥저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였습니다.
당시의 창해나 동해는 한반도의 서쪽에 있던 평양의 서쪽바다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옥저는 요동반도의 남쪽바다에 임한 대고산(大孤山)이었습니다.
압록강의 서쪽으로 단동에서 서쪽으로 약 100키로미터 거리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곳입니다.
이곳은 호강하(胡康河)라는 강을 경계로 하여 동고려와 서고려가 갈라져 있습니다.
청국과 일본이 각각 다르게 제작한 지도에 이 고려땅이 기록되어 있는것입니다.
더구나 이곳을 옛날 북부 마한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도를 놓고 요동반도를 살펴보시면 남쪽 대련에서 단동사이에 장하시라는곳이 있습니다.
그 장하시에서 북서쪽으로 국도가 나있는데 개마대산을 넘어 개주로 통합니다.
대장산도는(남옥저) 장하시의 서쪽에 있고, 북쪽으로 벽류하라는 제법 큰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의 중류에 물을 담아둔 큰 수고가 있습니다. 이 수고의 주변으로 요동반도에서는 가장 많은 고인돌
집단지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대략 여기쯤이 동옥저의 중심지쯤 될것입니다.
그리고 개주에 있던 난민들은 탁장군을 따라 이 산을 넘었다고 봅니다.
6.25전란을 상기하면 줄줄이 늘어서서 이고 지고 남쪽으로 피란하던 행렬들이 떠 오릅니다.
여기를 구산은 고구려 개마대산으로 봅니다.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에 이르고 피구라는 포구가
나오는데 단기고사에 의하면 이곳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조선소가 필요한 여건을 갗추고 있습니다. 주변에 산림이 울창하여 조선자료를 조달하
기가 편리하고 만이 깊어 해풍을 막아 주며 목적지로 건너려면 반드시 배가 필요한것입니다.
후한의 광무제가 재침하여 낙랑군을 수복하고 살수의남쪽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살수가 이 벽류하라는
주장을 구산은 줄기차게 하여왔습니다.]
청국대지도 1911년 동경일일신문제작 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소장
대고산항(大孤山港): 이곳을 남옥저라 하고 북부 마한이라고 한 기록은 요지음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질타를
받고있는 <남당유고>의 <백제왕기>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어떤사서도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지 못한 남옥저의 위치를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하고 또
방향까지 병기하여 현재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켜놓은 배려는 참으로 감명깊은 행동이 아닐수
없습니다.
남옥저는 비교적 기록도 많지 않지만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해석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게
사실이고 따라서 무리한 억지 주장이 난무하였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설전과 토론으로 피차의 가슴을 멍들게하였던 사연들일랑 깨끗이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각
으로 흩어진 역사의 조각들을 복원하는데 열쇠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초대부통령 이시영선생께서 일제에 잃었던 조국을 수복하기위하여 전 재산을 쾌척하여 설립한
만주신흥군관학교를 세웠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6.25동족상쟁때 소련의 공군이 중공군으로
가장하여 한국전에 참가하였던 바로 그 비행장이 이곳에 있습니다.
특히나 당시 경상북도 안동땅에 계시던 동포들께서 신흥군관학교에 재정적 후원을 많이 하셨다는 기록과
이곳이 단동 이전에 안동이었다는 사실은 경북의 안동과 끈끈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곳이
기도 합니다.
또하나 간과할수없는 사실은 항일독립운동과 더불어 역사광복운동을 벌리던 <한단고기>의 주인공들이
이곳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사실입니다.
초대주인공인 계연수선생은 일제 경찰에게 암살되어 압록강에 시체가 유기되었고, 그의 제자 이유립선생은
수차에 걸쳐 나포되어 수감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월남하여 한단고기를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자유지를 발행하여 역사찾기 운동을 벌리던 박창암 장군은 간도출신으로 이유립.안호상. 임승국.문정창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이들이 서로 얼키고 설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그들의 활동은 비밀이었습니다.
<동사강목><지리지>에 소개된 남옥저에 대한 기록입니다.
<동사강목의 지리지>>에서 안정복은 남옥저의 위치를 알수 없다고 하면서 사료들을 검토할때 요동의
경계는 압록강으로 한계를 이루었을것이라고 하면서도 압록강의 남쪽인 함경도의 삼수.갑산.위원 근처가
남옥저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요동의 해주가 본옥저라는 <성경통지>의 본옥저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옥저가 무순에 있었다면 무순의 남쪽으로 800여리가 어디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통설대로 남옥저가 원산의 남쪽 지방이라면 북옥저인 무순에서 방향도 맞지않고 거리도 800리가 훨씬
넘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근거로 삼을수 없을것입니다.
더구나 삼수갑산에서 바다에 배를 띄우기는 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청나라 해안도: 이 지도에는 동고려와 서고려가 경계를 이루던 호강하(胡康河)라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이 호강하는 대양하와 벽류하 (필리하)의 중간 지점이며 동옥저와 남옥저는 같은 지역이지만 남쪽으로
해안에 가까운 지역을 남옥저로 불렀습니다.
이곳이 남옥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은 자료들을 동원하여 이미 올려두었습니다.
서한만을 고려도경에서는 요해라 부르고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남해라 불렀습니다.
삼국의 강역을 기록한 <신,구 당서나 통전등>에서 백제나 마한을 해도지상이라고 부르던 기록들은 모두가
이곳에 근거를 두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료 제공:향고도]
아시아동부여지도 1875년판 일본국제작 일본육군참모국
일본은 이 지도를 제작할 당시 고려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더구나 동고려(東高麗)와 서고려(西高麗)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은 청국에서 만들었던 위의 <청나라
해안지도>에서도 밝혀졌습니다.
대고산(大孤山) 즉 남옥저를 왜 북부마한(北部馬韓)이라고 하였는지는 남쪽으로 마한도(馬韓島)가 있었고,
또 장자도(獐子島)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지도자료 제공:향고도]
사서의 기록에 남옥저가 등장하는 대목
<남당유고><백제왕기>남옥저의 주석부분에서 남옥저는 북부마한 땅이었고 현재는 압록강의 서쪽에 있는
대고산 땅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출전:라디오만들기]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 43년(서기 25년) 그 해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호가
부양(斧壤)에이르러 의탁을 원하니 온조왕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삼국사기>#23卷-百濟本紀1-溫祚王-43年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 百餘集王宮. 日者曰: "鴻 , 民之象也, 將有遠人來
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그러나 <삼국사기>의 온조왕 43년은 비류왕의 13년을 합한 년대이기 때문에 온조왕의 실재 연대는 30년이
되는것입니다.
30년 (AD25년) 을유 8월에 왕이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자가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집이 부양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남당유고의<백제왕기><온조27>
二十七年 乙酉 八月 田牙山(咸從)之原 五日 九月 鴻雁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雁者 民之象也 將有遠人
來投者乎” 十月 南沃沮(鴨綠江西 今大孤山之地 時爲北部馬韓) 仇顔(頗백제본기)解等二十餘家 至斧壤
(平壤 斧山院也) 納款 命置漢山之西
*남당유고의 <백제왕기><온조>27년은 <,삼국사기>>와 다시 3년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남옥저
가 당시 북부마한이었던 압록강 서쪽에 있는 지금의 대고산 땅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27년 (AD25년) 을유 8월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日者가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장차 멀리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10월에 남옥저(압록강의 서쪽, 지금의 大孤山 대고산의 땅, 이때는 북부 마한.)
구안(파)해 등 20여 가가 斧壤부양에 이르러 귀순해오니 명하여 한산의 서쪽에 살도록 하였다.
*부양(斧壤)은 고려의 전신 대진국을 건설한 궁예가 도망하다가 최후를 마친 지명입니다.
이 부양이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었다는 얘기이지요.
그리고 북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와 싸우던 고구려의 동천왕이 쫓겨 도망한곳도 남옥저였습니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산성모 파소가 배를 탄곳도 동옥저(남옥저)였고, 실성왕이 볼모에서 풀려나 배를
탄곳도 남옥저였습니다. 따라서 아슬라주의 위치도 요동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기 어려운것입니다.
이들이 배를 타고 떠난곳을 대고산항으로 추정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음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갈때 배를 탔던 기록중 일부입니다.
*<琉璃光明>二十二年癸亥,十二月,上以<陜父>初附於<沸流>有蘊意至是罷之. < 陜父>以瓢浮海入<新羅>.
*<琉璃光明>二十三年甲子,二月,....<鵲>太子浮海入<新羅>.
*<琉璃光明>二十七年戊辰,三月,....<新羅>以女妻<鵲>太子.
*<琉璃光明>二十九年庚午,六月,....<鵲>太子爲<新羅>太輔.
*요동반도의 남쪽에 삼한의 근거를 두고 배를 타고 왕래하던 기록은 적은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기록
으로 남은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은것이 있습니다.
낙랑국의 최숭으로 부터 계산하면 기원전194년~.[주1] 이곳은 주몽이 동순하여 낙랑에 이르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가 시길의 딸 작부인을 아내로 맞어 대려왔으며, [주2] 대무신왕 역시 배를 타고 바다
를 건너 들어가 최리의 내외를 사로 잡았다고 하였습니다.[주3]
이후로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이곳을 칠때도 역시 배를 타고 건넜으며[주4] 위(魏)나라경초때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어 낙랑,대방 이군을 평정할때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주5] 낙랑국은 시작하는 당시부터 최숭이 배로서 준왕의 보물들을 사전에 배에 싣고 옮겨왔고,
해성에 300석의 쌀을 바치는가 하면 이후로 마한도 왕검성(馬韓都王儉城)으로 옮겨와 한왕이 된 준왕을
보좌하였습니다.[주6]
*주석에 대한 자료
[주1][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
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
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한단고기>><북부여기 상>
[주2]**◎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
#14卷-高句麗本紀2-大武神王-20年
[주3]○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삼국사기>는 이 대목에서 <고구려사략>에서 보이는 도해(渡海)기록과 죽령군 설치기록을 제외시켰습
니다. 그렇다면 상세한 부분에서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보다 훨씬 신빙성이 높은것을 알수 있습니다.
도해 기록과 죽령군 설치기록은 숨겨진 강역을 추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3]**◎二十七年甲寅,四月, <好童>太子將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女爲之
破鼓角而迎, 王師大軍自<沃沮(尼古□)>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歸, 以其地爲<竹苓郡>.
<樂浪>自<柴吉>四世八十餘年而國除. 七月,<大解>太子薨.<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
[주4]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三國志/魏書/卷三十 魏書三十/東夷/韓]
#14卷-高句麗本紀2-大武神王-27年
[주5]○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삼국사기><고구려본기>
[주6]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
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
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한단고기><북부여기상>
궁예(躬乂)는 개주성(봉황성) 남쪽 부양에서 살해되었다.
궁예가 살해된 부양(斧壤)은 어디인가.
태봉국을 세웠던 궁예에 대한 평가는 근래에 들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그것은 강진의 무위사에 세워져있는 선각대사비를 재판독한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들어났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요동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밝혀진게 없다.
모든 사실을 한반도의 중원땅인 철원을 근거지로 전해오고 있으며 그가 최후를 맞었던 장소를 강원도의
부양(斧壤)이라고 한것이다.
그러니까 기록대로 라면 서해안에 있는 개성에서 동남쪽으로 철원의 부양까지 달아났다가 민초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하였다는것이다. 통설이 그렇다는 얘기지 과학적인 신빙성은 바닥이다.
그런데 궁예에 대한 기록이 《독사방여기요》에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궁예가 건국한 마진국은 개성이 아니라 요동반도의 봉황성인 개주성(開州城)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려말 이 개주성을 한반도로 옮겨간 주인공은 고려말 구테타로 공양왕으로 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이성계라고 밝힌것이다.
그렇다면 궁예가 최후를 맞은 부양(斧壤)은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이 부양(斧壤)은 남옥저에 있었고,
부양에 살던 20여가가 탈출하여 백제의 한산으로 귀부했다는 기록이 백제전에 전한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왕이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차림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부양 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
라고 하였고,
《고려사》(1451년)에는
"(달아난 궁예는) 이틀 밤을 지내고 몹시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었는데 얼마 안 있어 부양
지역
백성들에게 죽었다" -라고 하였다.
내용이 각색이 되어 보리이삭 내용이 추가된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틀밤이란 시간까지 추가 되었다.
이와 같이 918년 왕건의 '쿠데타' 로 축출돼 숨진 궁예에 관한 역사기록에도 미스테리가 있다.
그의 죽음에 비참함을
덧씌운 '보리이삭을 훔쳐먹었다'는 대목이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없었는데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나타난 것이다.
역사기록은 어차피 승리자의 몫. 세월은 거기에 윤색까지 더해 사실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전 기훤의 부하가 되었을때 머물렀던곳이 죽주(竹州)라고 하였다.
이 죽주와 죽령군(竹嶺郡)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즉 《삼국사기》에 나타난 죽령군(竹嶺郡)이란 남옥저라는 말이다.
그는 죽주(竹州)에서 양길의 북원으로 옮기기전에 머물렀던 어릴때 살았던 죽주로 피신하였다가 최후를
맞은것이다
그런데 《남당유고》에는 죽령군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그 유명한 낙랑공주가 살았던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망하자 그곳에 죽령군을 세웠다고 하였다.
◎ 二十七年甲寅, 四月, <好童>太子, 将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其)女, 為之,
破鼓角, 而迎王師大軍. 自<沃沮>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皈, 以其地為<竹岺郡>. <樂浪>, 自
<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 七月, <大解>太子薨.
○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호동{好童}>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崔理)>의 새 도읍(압구)(=남옥저)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좋아지냈다.
그녀는 <호동>을 위해 북과 나발을 망가뜨리고, 왕이 거느린(또는, 왕사의) 대군을 받아들였다.
옥저<옥저(沃沮= AD47년 3월까지는 최리 낙랑의 도읍)>에서부터 대군을 이끌고 배로 물을 건너 들어가서
그 도읍을 빼앗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그 땅은 <죽령군{竹岺郡}>으로 삼았다. <낙랑>은
<시길{柴吉}>로부터 4대 80여년에 나라의 문을 닫은 것이었다. 7월, <대해(大解)>태자가 죽었다.
三國遺事1卷-1紀異-北帶方-00 에는 북대방을 본래 죽담성이라고 하였다.
三國遺事1卷-1紀異-北帶方-00
北帶方. #三國遺事1卷-1紀異-北帶方-01
北帶方, 本竹覃城. 新羅弩禮王四年, 帶方人與樂浪人投于羅. [此皆前漢所置二郡名, 其後僭稱國今來降.]
#三國遺事1卷-1紀異-南帶方-00
南帶方. #三國遺事1卷-1紀異-南帶方-01
曹魏時, 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 故云. 帶方之南, 海水千里, 曰瀚海. [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
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이것은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郡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
되이 나라라고 불러 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마한
(馬韓)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북대방(죽담성)은 최리의 낙랑국이 있던 대장산도로 고구려 대무신왕이 정벌하여 죽령군으로
삼은 곳이고, <백제의 온조왕이 "국가 동유 낙랑 북유 말갈">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그리고 남대방은 대방고지로 부르던 소주산(小珠山)원시유적지가 있던 백제가 탄생한 광록도다.
그리고 <대방의 남쪽으로는 바닷물이 천리나 되고 그곳을 한해(瀚海)라고 하였다.> 라고 한 이
바다는 요동반도의 남쪽해안, 즉 장산군도가 펼쳐진 서한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여기에 속방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설명은
왜와 삼한이 모두 이 장산군도 안에 있었다는 은어(비밀)이었던 셈이다.
이 외에도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죽령얘기가 있다.
신라가 요동의 철령지방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다. 철령 이남 죽령까지의 사이에 고구려의 십여개 군을
빼앗았다는 기록을 왜 브리테니카 사전에서 확인해야 되는가.
그것은 원문의 주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사료와 비교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참고로 한반도의 철령을 강원도의 통천으로 비정한다면 그 남쪽에서 경상도의 죽령까지는 신라의 강역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죽령이북에서 철령까지는 신라의 땅이기 때문에 죽령이북의 10개군은 한반도에 해당
되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라 진흥왕 12년(서기551)에 신라,백제,고구려는 참으로 크나큰 전쟁을 치룬적이 있다.
그동안 실로 국세가 막강하던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와 백제가 연맹하여 유린한 대단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고구려는 요동반도의 10여개군과 남평양을 잃었다.
신라의 거칠부장군이 여덟명의 신라의 명장들을 대동하고 고구려 공격에 나섰던 출발점에 죽령(竹嶺)이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 죽령의 위치를 《삼국사기》는 한반도의 경기지방이라고 왜곡시켰다.
사실 죽령은 요동반도의 남단에 있었던 남옥저와 낙랑국 그리고 후한의 낙랑군이 있던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신라본기>의 진흥왕 12년조에는 이 전쟁기록을 단 두줄로 처리하여 축소
은패를 시도한 흔적이 보이는것이다. 본기를 통하여 전쟁 기록을 본다.
본기 본문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千勒{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
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12년 봄 정월,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었다.3월, 왕이 순행 중에 낭성에서 묵으며, 우륵과 그의 제자인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초청하였다.
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에 앞서 가야국의 가실왕이 열 두 달을 음률로 상징하는 12현금을 만들고, 우륵으로 하여금 이에 맞는
악곡을 짓게 했었다. 그러나 가야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 나라로 귀순해왔었다.
이에 따라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고 하였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본기에는 단 한줄로 고구려 10개군을 빼앗은 내용을 기록하고있다.
뿐만 아니라 죽령얘기는 아예없다.이렇게 큰 사건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한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참고 551년 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포위하고 백암성(白巖城)을 침공하였으나 패배함 ...
당토황여전도(唐土皇與全圖) 이 지도의 특이한 점은 이 지도에는 한반도에 경상도가 없다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의 위치도 경기도의 아래로 내려와 있다.
이것은 잘못그린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얘기다.
당시 신라는 장산군도에서 상륙하여 벽류하를 북상하며 철령,지역까지 진출했던것이다.
이때가 라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110여년 전 일이다.
이후 이 지역을 고구려에게 다시 빼앗겼다는 기록은 아직 확인을 못했다.
거칠부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정치가.
居柒夫 或云荒宗 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湌 居柒夫少 跅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覘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惠亮問曰 “沙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
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
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
鷰頷鷹視 將來必爲將帥[주석67]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皦日”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湌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湌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迊湌·非西迊湌·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
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惠亮法師 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
日 願致之貴域” 於是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삼국사기》<열전>거칠부 원문
죽령에서 북쪽으로 철령까지 사이에는 고현의 주변이었던 요양이 포함되어있다.
이때가 고구려가 망하기 100여년 전이었다.이 사건 이후 고구려가 이땅을 회복하였던것으로 추정된다.
이 땅은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가 다시 당나라와 싸워 수복하였다.
주석에서 278) 평양(平壤)
여기서의 평양은 이른바 南平壤, 곧
北漢山城이다(이병도,《國譯 三國史記》, 644쪽).
*평양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북한산의 남평양이라고 주석한 대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279) 고현(高峴)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확실한 지명은 알 수 없다. 高峴은 철원 북쪽의 황해도 谷山에 있는
고개로 확인되어 혹 이 곳이 아닐까 한다(《海東地圖》 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영인본, 1995, 82쪽).
高峴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2 谷山郡 山川條에 나오는 高達山으로 생각되며 이 산은 郡東五十里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鐵嶺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위와 같음).
죽령이북의 10군을 생각할 때 철령은 적절하지 않다.
*고현에 대한 첫 주석은 처음에 나오는 지명이므로 모르겠다고 하였다가 황해도 곡산에 있는 고개로 확인
이 되어 혹시 이곳이 아닐까 한다고 횡설 수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박사의 철령에 대한 주석은 경상도 죽령에서 강원도 철령사이에 10개군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철령설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고현은 요동의 요양 서쪽에 있었으니 당연한 말이다.
과연 이병도박사가 그 사실을 몰랐을까?그렇다면 철령은 요동의 개원 근처에 있어야 맞다.
그 후 명나라와 고려의 국경선이 설정되었던 봉집보(奉集堡)의 범하(汎河)를 말하는것이다.
*《후한군국지》현도군조에 상은대와 고현(高顯)이 있다. 그리고 고현,후성.요양등 3현은 본래 요동군
소속이었는데 안제 즉위 2년에 현도군에 속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음 글들은 통설에만 의지하여 고대사를 믿고싶어하는 독자들께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내용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거부감을 정면으로 수용하며 되도록 거부감들을 바로잡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앞서 소개드린 삼한의 장산열도설의 연장인 셈이다.
궁예의 죽엄에 이은 왕건의 고려 건국에 대한 비화이기도 하다.
앞서 남옥저와 부양. 죽령군. 낙랑국.남대방.북대방등의 위치를 대강 설명드렸다.
참고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건국지는 개주성이 아니다.
개주성은 고려의 동경으로 궁예가 마진국을 세웠던 장소다.
이 봉황성은 고구려때 경주로 불렸고,신라때는 동주 낙랑부로 불렀었다.
대동강 북쪽으로는 진출한 사실이 없다고 하던 신라는 고구려의 강역들을 수복하여 길림지역까지 진출
하였고,신라구주를 설치한곳도 바로 요동반도다.이후 신라의 강역을 이어받은 고려는 당연히 요동에서
활동하였지만 발해와 거란,몽골.금.여진등과 충돌하며 전쟁이 그칠날이 없었다.
따라서 고려의 강역은 고정되기가 어려웠고,줄었다 늘었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독사방여기요》권38
平安、咸镜二道,北接,俗尚弓马,兵卒精强,亦地势使然也。江原、黄梅,居京畿左右,差为狭小。
而京畿在诸道之中,襟带山海,称为雄胜。其地东西二千里,南北四千里,八道分统郡凡四十一、府凡三
十三、州凡三十八、县凡七十。
*여기에서 중요한점이 발견된다.평안,함경2도가 북접(靺鞨)이란 본문 이메지를 사료의 원문에서는 말갈을
삭제한 문제다. 왜 삭제하였을까?
평안도가 성경까지,함경도가 길림까지 진출하였던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전자사료는 왜곡이
진행중이다.
京畿道治王京。朝鲜都也,亦曰汉城。明初,高丽王旦自开州徙此,居七道之中,称为四塞,领郡三,
曰杨根、丰德、水城。府三,曰汉城、开城、长湍。州七,曰杨州、广州、润州、骊州、果州、谷州、
坡州。县三,曰交河、三登、土山。
*경기도는 조선의 왕경인데 한성이라고도 부른다.
명초(1394년)에 고려왕 단(旦)이 개주(開州)로부터 옮겨온곳이다.
왜 이렇게 분명한 기록들을 외면하고 한사코 왜곡된 자료들만 인용하여 고려의 요동 진출설을 부정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요동의 개주성에서 조선땅의 경기도로 왕경을 옮겨간 고려왕 단(旦)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고려말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이어받은 이성계를 말함이다.
혹자는 개주를 한반도 경기도의 개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개성을 어떻게 고려의 동경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수없이 등장하는 사료들을 이성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미 골수에 밖혀버린 통설에 함몰되어 있으니
그러한 사료들이 올바로 보일리가 없을것이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
조선의 제1대 왕.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수가
없었던 시대 분위기상, 쉬운 이름을 버리고 단(旦;아침)
으로 개명.동북면(함경도)의 천호(수장, 수령)였던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함주(함흥) 태생.(함주는 당시
함흥이
아니라 요동의 함주다. 필자 주)
고려말 장군으로 여러 전투에 걸쳐
맹활약을 하였고, 1388년 최고 재상인 수문하시중에 임명.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획득.(당시 위화도는 요동의 의주 서쪽에 있었다>필자 주)
창왕, 공양왕을 세우고, 영삼사사, 삼군도총제사가 됨.1392년 7월 왕으로 즉위하여 조선을 세움.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도성 건설, 개혁 조치 단행.
불행하게도 재위 7년 만에 아들 이방원에 의해 실권, 1408년 5월 24일 74세로
사망.
현재 구리시 동구릉 내 건원릉(乾元陵)에
계신다.
开州城在王京西南二百里,高丽所置州也,左溪右山,称为险固,亦曰松岳。唐天初,眇僧躬据此。
朱梁贞明五年,入贡于淮南杨隆演。后唐清泰末,王建杀躬而代之,仍都于此,谓之东京,亦曰开京。
宋大中祥符三年,高丽臣康肇弑其主诵,立诵兄询而相之。契丹主隆绪讨高丽,渡鸭渌江,康肇战败,
退保钢州,契丹进擒肇等,追亡数十里,钢、霍、贵、宁等州皆降。进攻开京,询弃城走平州,
契丹遂焚开京宫室府库,民庐俱尽。兵还,询复葺开京而居之,诸城亦复归高丽,今曰开城府。
개주성은 왕경 서남 200리에 있다.고려가
이곳에 주를 설치하였다.좌측에 시내가 흐르고,우측에 산이 있다.
이를 험고라고 불렀다. 또한 송악이라 하였다.당 천복초(901)에 사승 궁예가 이곳에 살았다. 후량 정명5년
(919)회남 양융연에게 입공하였다. 후당 청태말(935) 왕건이 궁예를 살해하고 이곳에서 대를 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동경으로 삼았다.역시 개경으로도 불렀다.
*만약 개주성이 경기도 개성이라면 왕경의 서남 200리란 말이 타당할 수가 있는가? 지도에서의 개성은
평양의 동쪽 대동강 남쪽에 있다.따라서 송악이라고 부르던 개주성(봉황성)은 경기도의 개성이 아니고
궁예가 왕으로 행세하던곳이고,왕건에게 축출당한 곳이다.
그러나 왕건이 살던 촉막군은 당시 고려의 왕경으로서 개주성(봉황성)의 동북 200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궁예는 살해당할 징조를 알아차리고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성을 탈출하여 성의 남쪽인 부양(斧壤)(남옥저지)
지역을 배회하다가 민초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송 대중상부3년(1010) 고려의 신하 강조가 그 주군 용을 살해하였다.용(涌) 이 죽자 순(洵)을 세웠다.
이때 거란의 군주 융서가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자 강조는 패하여 보강주로 후퇴하였다.
거란이 추격하자 금조등은 수십리를 도망하였다.동,작,귀,영주등이 항복하였다.
개경을 공격하자 순은 성을 버리고 평주로 도망하였다. 거란은 궁실과 부고등을 불태우자 민호는 그대로
겨울울 났다. 병력이 물러가자 순은 돌아와 개경을 복원하고 그곳에 살았다.
여러성들 역시 고려로 복원되었다. 지금의 개성부다.
*이상은 모두 요동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다.개주성을 지도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반도를그린 지도위에 철령위를 그려놓고 강원도나 함경도가 철령위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님들께서는
다음의 명사기록을 참고하시라.
지도상으로 철령위를 한반도로 옮겨놓을 수 있겠으나 요하,범하,소청하까지 옮겨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명사明史 / 지志 / 第十七 지리地理 二 / 철령위鐵嶺衛
철령위鐵嶺衛는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 옛 철령성鐵嶺城에 치소를
세웠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4월, 옛 은주古嚚州 땅으로 치소를 옮기었다. 바로 현재의 치소治所이다.
서쪽으로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으로는 범하泛河가 있으며 다시 남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다 요하(遼河)로 유입되어 들어간다.
의로성(懿路城),봉천,무순성등은 모두가 철령성의 남쪽에 있다
또한, 남쪽으로 의로성懿路城이 있으며 홍무洪武 29년(1396년)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철령위鐵嶺衛-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말한다.
명明 영종英 주기진宗朱祁鎭 정통正統 4년(1439년)에 범하천호소泛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으로는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바로 옛 철령성鐵嶺城-철령위鐵嶺衛사건의 무대-으로 고려高麗와
국경을 접한다. 홍무洪武<1368~1398년> 초엽에 현縣을 두었다가 폐지하기에 이른다.
또한, 함평부鹹平府가 있으니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Dai Ön Ulus>때의 직례요동행성直隸遼東行省
이다.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혜종惠宗<이칭 순제順帝> 지정至正 2년(1342년) 정월에 항복하여
현縣이 되었으며 홍무洪武 초엽에 폐지되었고 남南으로 도사都司-치소治所 요양현遼陽縣-와의 거리는
240리 떨어져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
南有泛河。 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
又范河城在衛南,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
洪武初置縣,尋廢。又有鹹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
四十裡。
《성경강역고》5
奉集 【 今承德縣東南四十五里】
原注遼集州懷遠軍奉集縣本渤海舊縣有渾河
명나라가 철령위를 봉집현에 설치하게 된 원인은 명
홍무21년,고려우왕14(1388)년에 일어났다.
그것은 강계만호로 있던 김완가가 치소인 봉집현을 들어 명에 투항했던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왕이 직접 신하들을 대동하고 현지까지 출동하여 요동정벌 대책을 세우는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때의 국경선은 혼하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는것이다.
그렇다면 봉집현이 있던 강계는 혼하를 경계선으로 하던 봉집현이라야 맞다.
그러니까 현 철령성 동남쪽 혼하에 있어야 할 강계(江界)가 압록강의 남쪽까지 남천한것이다.
당시 강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위에 제시한 《독사방여기요》의 조선국도다.
따라서 현재의 강계(江界)는 진짜의 강계가 명나라에 빼앗기자 한반도로 옮겨진것이다.
봉집현은 그대로 둔체 말이다. 이곳에는 동단국(東丹國)의 능들이 보존되고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건을 기록하였던 《고려사》47권에서 55권까지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이때가 고려 우왕14년 1388년의 일이었다.
《고려사절요》우왕 14년조(1388)는 명나라의 부당한 침략을 물리치기에 부심하던 우왕의 행동을 부정적
으로 보고 우왕을 폄하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무력을 써서라도 강력하게 명나라를 몰아낼려고 하던 우왕은 드디어 신하들의 반란으로 불발에 그치고
패위의 쓴맛을 보게 된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역사가 증명할뿐 후학으로서는 판단할 능력이 있지못하다.
그러나 고려의 국경은 개원,철령,심양.무순등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수 있었다.
<남당유고><백제왕기>남옥저의 주석부분에서 남옥저는 북부마한 땅이었고 현재는 압록강 서쪽 지금의
대고산(大孤山)이다 이곳이 북부 마한이다.구원해등 20여가가 부양(斧壤)에 이르렀다.
*요동반도의 남쪽을 북부마한이라고 한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이 대목을 이해하면 신라의 요동진출을 이해하게 될것이다.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 《삼국사기》열전 궁예부에는 그의 최후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궁예는 모반군이 닥쳐온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변복하고는 궁중을 빠져 나간다.
'열전'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이렇게 되자 궁예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변복을 하고
궁중을 빠져 나와서 산림 속으로 도망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부양(斧壤)(평강)의 백성에게 죽임을 당하
였도다."
《송사》<고려열전>
《자치통감》권 271 태종왕 궁에는 성질이 포악하여 해군통수 왕건이 살해하고 자립하여 고려왕을 복칭
하였다.개주를 동경으로 삼고,평양을 서경으로 남았다.그의 성정이 근검하여 백성들이 안정을 찾았다....
《요동통지》권 22 고개주(古開州)
옛 개주는 요 즉 고구려 경주땅에 세워졌다.
개주 진국군 염,목,하주등 3주를 두었다.개원1년 금이 모두 폐하였다.
《요지》에 의하면 산위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봉황산 고성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고평양성은 《명일통지》에 의하면 압록강 동쪽 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라고 하였다.지금은 계외에 있다
《요동지》권 1 지리 개주성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쪽에 있다 일명 왕험성 즉 기자의 옛나라다. 성밖으로 기자묘가 있다.
한나라는 낙랑군을 다스렸다.
진(晉)나라 의희(405)후 그왕 고련(장수왕)은 이 성에 살기 시작하였다.
후 고려때는 서경이라 불렀고, 원나라때는 동령로를 두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그러나 한반도의 평양성은 압록강의 남쪽에
있고 대동강의 서쪽에 있다.고구려의 왕이 평양성에 처음 입성한 때는 동진의 안제1년 서기 405년 부터다.
그렇다면 압록강과 평양성은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지 기록과 맞지않는 대동강 평양성에 마추
려고 하면 억지가 뒤따른다.
참고로 평양의 서쪽으로 흐르던 압록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진으로 가라앉아 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않는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명말청초의 학자 고조우(顧祖禹)가 지은 역사지리 명저이다.
전서는 130권으로 따로 《여도요람(輿圖要覽)》 4권이 덧붙여져 있는데 모두 287만 자요, 단열 조목의
지명만도 3만여 개나 된다.
현재 중화서국에서 《중국고대지리총지총간(中國古代地理叢刊)》 12권짜리로 표점본으로 펴냈는데
제38권 《외국부고(外國附考)》에 우리나라에 관한 자료를 싣고 있다.
작성자 봉오선생
*그런데 왜 이러한 명저를 불신하고 기록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것인가.
뿐만 아니라 《송서》<고려열전》도 마찬가지로 기록을 불신하고 있다.
이유는 이들 모두가 고려의 동경.남경.서경등의 기록을 담고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만주원류고》나 《요사》<지리지>《고려도경》등도 역시 신라의 요동설을 담고있다고
하여 불신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면서도 국내에서 발행된 고려시대 사료나 조선시대에 발행된 사료들을 동원하여 중국측의 사료들을
비판하고 있는것이다. 때문에 개주성 사료는 여러가지 사료들을 동원하여 비교가 되도록 제시하였다.
거의 모두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가.
왕조(王調)의 반란으로 보는 낙랑군 위치
(서기 23년) 유수는 왕망이 실정을 거듭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하남성 완현
출신의 이통(李通)과 함께 군사를 모아 궐기하였다.
마침 맹위를 떨치던 신시(新市), 평림(平林)의 도둑무리를 불러들였으나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신시와
평림의 무리들은 실력있고 다루기 어려운 유씨형제를 피하고 인품도 보잘 것 없고 다루기 쉬운 유현(劉玄)
을 옹립한다.
반란의 대의명분을 뚜렷이 하기 위하여 유현을 경시제(更始帝)로 받들고 왕망과의 대결을 위해 북상하였다.
유수는 왕읍(王邑)의 40만 대군을 곤양에서 대파하였다. 이후 천하군웅들은 너도나도 반란군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평소 유연을 경계하던 경시제는 유연에게 군령위반의 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렸다.
유수는 형인 유연의 억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울분을 삼키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해가고 있었다.
한편 곤양대전 이후 왕망은 전의를 상실하고 방어에만 급급하다가 결국 경시제의 부하인 신도건(申屠建)과
이송(李松)에게 공략당하여 궁궐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로써 신나라는 멸망하고 경시제 세력은 수도 장안으로 입성하여 실질적인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천하는 산동의 적미군과 하북지방의 왕랑(王郞)의 삼대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기 24년) 경시제는 왕랑을 격파하는 임무를 유수에게 맡겼다. 유수가 왕랑을 토벌하러 나서자 상곡
태수 경황은 즉시 아들인 경감에게 군사를 주어 유수의 토벌군에 합류 한다.
어양군의 팽총(彭寵)도 합세한다.
팽총은 유수가 한단(邯鄲)을 공격했을때 군량 보급의 중책을 맡았다. 유수는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만회
하여 결국 한단을 함락하고 왕랑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유수는 군대 해산과 장안복귀를 명하는 경시제의 요구를 묵살하고 한단에 잔류한다.
이때 적미군은 경시제를 공격하여 참살하였다. (서기 25년) 6월 유수는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후한을
건국하였다.
<왕경전(王景傳)>
갱시(更始)가 실패한 뒤에 낙랑 토착인 왕조(王調)가 낙랑의 군수를 살해하고, 자칭 대장군(大將軍) 낙랑
태수(樂浪太守)라고 하였다.
건무 6년(A.D 30)에, 후한 광무제는 태수 왕준(王遵)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왕조(王調)를 치도록
하였다.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욍굉은 군부(郡府) 결조사(決曹史) 양읍(楊邑)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였다. 천자는 그들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였는데, 유독 왕굉(王閎)은 관작(官爵)을 마다했다.
황제는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렸으나, 누가 알았으랴 올라 가던 도중에 병이 나서
죽었다
왕조의 반란 시기는 경시제가 죽은후라 했으니, 아마도 유수가 후한을 건국한 이후일 것이다.
왕조가 살해한 낙랑군수 유헌(劉憲)이 유수와 관계가 있는 인물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유수가 봉기하였을때, 어양군의 팽총이 가담 하였던바 당시 낙랑군의 상황이 한나라 통치력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유수가 후한의 황제로 즉위하여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이때 팽총은 자신의 노력에 비하여 터무니
없는 대우를 받자 불만을 품고 어양군을 중심으로 후한 조정에 반기를 든다.
어양군의 팽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조 또한 이를 틈타 낙랑군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왕조는 낙랑군을 장악하고 왕을 참칭하지 않고 대장군(大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라고 하였다.
이는 팽총이 (서기 27년) 우북평, 상곡과 유주의 중심인 계성을 함락하고 연왕(燕王)으로 즉위한 것과는
달리 낙랑군의 규모가 왕을 참칭할만큼 크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광무제는 (서기 26년)에 팽총을 진압하기 위해 등융을 보내 대장군 주부(朱浮)와 함께 공격 하게 하였으나
대패 하였다.
후한군을 격파한 팽총은 군대를 나누어 우북평, 상곡의 수 현을 함락한 후 결국 계성마저 함락하여 3월
연왕(燕王)으로 즉위 하게 된다. 팽총의 공세에 놀란 광무제는 (서기 28년)에 이르러 경감, 경황 부자와
제준(祭遵), 유희(劉喜) 등으로 총 공격을 시작한다. 후한군의 공격을 오환(烏桓)과 연합하여 잘 막아내던
팽총은 (서기 29년) 결국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여 반란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팽총과 광무제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때 낙랑군을 장악한 왕조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앞서 낙랑군은 왕조가 반란을 일으키기전에 이미 한나라의 통치력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왕망의 신나라가 들어선 (서기 12년) 왕망은 12장군을 보내 흉노를 공격하였다.
이때 엄우는 토예장군(討穢將軍)으로 어양(漁陽)으로 나갔다고 한다.
토예장군이란 예(濊)족을 토벌하라는 의미의 장군 직책을 말한다.
따라서 엄우가 토벌 하려는 대상은 왕망정권에 등돌린 낙랑군이 아닐까 싶다.
고구려는 대무신왕이 정권을 잡은 이후 (서기 14년)에 양맥을 복속시키고 현도군까지 이르렀다.
현도군에 근접 했다는 것은 남쪽의 낙랑군도 가시권안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낙랑군이 왕조에게 장악된 이후 <삼국사기>에 “(서기 28년) 요동태수가 침략하여 왔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마치 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당시에는
광무제와 팽총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상황이라 요동군 독자적으로 결코 고구려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기록의 후한(後漢) 군대는 누구일까?
아마도 자립하고 있었던 한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왜냐하면 왕조가 반란으로 낙랑군을 장악하였지만 토착세력들중 상당수가 예맥족으로 왕조의 통치에 거부
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낙랑군의 일부 예맥족들이 부여를 흡수하고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고구려에 복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왕조가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기 29년) 팽총의 반란을 진압한 광무제는 처음부터 왕조가 장악한 낙랑군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을 것
이다. 낙랑군은 왕망시기에도 한나라의 영향권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팽총의 반란을 제압한 광무제에게 뜻밖의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왕준(王遵)이라는 사람이다.
왕준이 낙랑군 토착인인지, 아니면 후한 조정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다만 후한 조정에 이름도 없던 사람을 광무제가 낙랑태수에 임명한 것으로 보면 낙랑군 토착인에 가깝지
않나 싶다.
<왕경전(王景傳)>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욍굉은 군부(郡府) 결조사(決曹史) 양읍(楊邑) 등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였다.
천자는 그들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였는데, 유독 왕굉(王閎)은 관작(官爵)을 마다했다.
황제는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렸으나, 누가 알았으랴 올라 가던 도중에 병이 나서
죽었다
낙랑군 토착인인 왕준은 반란을 일으킨 왕조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
래서 낙랑군 한나라 사람인 왕굉(王閎) 등과 협력하여 왕조를 몰아내기로 하였던 것이다.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사전에 모의한대로 왕굉 등은 왕조를 죽인다.
낙랑군 결조사인 왕굉에 대해 알아보자. 전한 마지막 왕인 애제 시기에 정치의 실권은 할머니ㆍ어머니의
외가에게 돌아가고 그는 방탕에만 빠져 있었다.
이에 포선, 왕선, 정숭 등과 함께 간절히 충고를 하기도 했으며 애제가 특히 총애하던 동현(董賢)이라는
인물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할때에도 왕굉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학을 숭상한 왕굉은 이렇듯 전한 조정에서 나름대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왕굉이 어떠한 계기로 낙랑군 결조사가 되었는지 알수가 없다.
아마도 왕굉은 왕망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자 정치에 혐오감을 느껴 자신의 고향인 낙랑으로 가지 않았나
싶다.
왕경전을 살펴보면 왕경의 아버지는 왕굉이라고 하였다. 왕경의 8대조가 제나라 왕중이라고 한다.
왕중은 제나라 유흥거의 반란때 바다를 건너 낙랑지역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왕중이 낙랑 지역으로 망명했던 시기는 위만조선이 득세 하였던 시기이다.
그렇다면 왕중이 망명한 낙랑 지역은 어디일까?
어떤 사람들은 요동반도라기도 하고 지금의 평안도 지역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제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신성시 하였고,
또한 연안항해 수준밖에 안되었던 시기에 요동반도나 평안도 지역으로 갔을 것이라고 말할수 없다.
왕중이 망명한 낙랑이라는 지역은 위만조선의 강역인 대능하 이남인 발해연안 어딘가에 상륙해 정착 하였
다는 결론이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킬 당시 한나라에 내응하였던 위만조선 사람들중에
장군 왕겹(王頰)이 보인다.
왕중의 후손중에 문헌에 나타난 인물은 왕굉뿐이다. 왕겹이 왕중의 후손인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왕중의
후손인 왕굉이 한나라 조정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위만조선을 배반한 덕을 보았
던 것이다.
또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에 낙향한 것을 보면 왕겹이 왕중의 후손일
가능성은 크다.
제나라 사람으로 위만조선에 망명한 왕중의 후손인 왕굉은 한나라의 개가 되어 다시한번 토착 예족들을
배반하여 왕조를 죽이고 낙랑군을 들어 바친다.
따라서 왕굉 등이 들어바친 낙랑군은 요동반도나 평안도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요하 남단 서쪽인 발해
연안 지역임을 추정 할 수가 있겠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등장하는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과는 별개이라는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건무(建武) 6년(서기 30년)에 변군(邊郡)을 정리하였고 도위(都尉)도 이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 뒤 현(縣)의 거수(渠帥)를 모두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 여러 현
(縣)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광무제가 팽총을 진압한 기세로 왕준을 보내 왕조를 토벌하고 낙랑군을 재장악 하였다.
이때 변군을 정리하고 도위를 폐지 하였다고 한다. 이는 낙랑군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옥저 지역을 포기한
것이며, 낙랑군의 일부 현(縣)을 폐지 또는 조정한 것이다. (동명)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