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도서관 - 이탈리아 프라토 문서고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중세 상인의 기록[ archivio di stato di Pra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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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29. 14:16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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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프라토 문서고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중세 상인의 기록
[ archivio di stato di Prato ]
프라토 문서고와 중세 프라토 상인 프란체스토 디 마르코 다티니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프라토. 시간이 멈춘 듯한 한가로운 이곳이 중세 말 유럽의 국제 교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불러모으는 이유는 다티니가 남긴 방대한 양의 문서를 보관하는 프라토 문서고 때문이다. 〈출처 : (cc) Massimilianogalardi at it.wikipedia.org〉
프라토(Prato)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시골 도시이다. 이 도시는 약 3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피렌체처럼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수많은 예술 작품들로 넘쳐나는 예술의 도시도 아니며, 이탈리아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역사적 도시도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피렌체와는 달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한가함이 느껴지는 시골풍의 전원도시이다.
하지만 중세 말 유럽 국제 교역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에게 프라토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못지않게 중요한 도시이다. 그렇다고 프라토가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처럼 중세 유럽 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이 프라토를 찾는 이유는 14세기 중엽 이곳에서 태어나 국제적인 거상으로 성공한 상인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Francesco di Marco Datini, 1335~1410)가 남긴 방대한 양의 문서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중세 이탈리아 상인들은 상업 편지, 송장, 투자 계약서, 보험 증서, 환어음, 회계 장부 등 다양한 종류의 상업 문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이 온존하게 보존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특히 철저히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던 제노바 상인들은 상업에 관한 편지와 장부를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상업문서는 극히 드물다.
다티니의 문서가 거의 통째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유언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프라토 시에 기부할 것이며 모든 자료를 유지ㆍ보존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프라토 사람들은 다티니가 남긴 막대한 재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가 남긴 문서를 소중하게 관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덕분에 그의 문서는 다티니 생가의 구석방에서 몇 백 년 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묻혀 있을 수 있었다. 쥐나 벌레들이 일부 갉아먹긴 했지만, 발견 당시 놀라울 정도로 많은 문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870년 프라토 출신의 몇몇 학자들이 이 귀중한 자료를 발굴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문서가 400년의 시공간을 넘어 빛을 보게 되었다. 12만 5천 통 가량의 상업 편지와 만 통 가량의 개인 서신을 포함해 다양한 종류의 상업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분량도 다티니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아니다. 그가 주고받았던 편지 중 상당수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티니 문서의 역사적 가치는 방대한 양뿐만 아니라 그 속에 언급된 정보의 질에도 있다. 다티니를 포함해 당시 국제적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사업에 활용했다. 경쟁자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는 것은 사업의 성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다티니 상사는 270여개 지역과 서신 교환을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주요한 국제 시장의 상황을 거의 다 포괄하는 것이다.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기록
다티니 동상. 국제적인 거상으로 성공한 그는 다양한 종류의 상업 문서를 비롯해 개인적인 편지들을 남겼다. 그가 남긴 문서에 대한 연구는 결국 중세 지중해 무역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인식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 말 유럽의 국제 교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다티니의 기록만큼 중요한 자료는 없을 것이다. 다티니 문서에 대한 연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중세 지중해 무역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인식이 바뀌었다. 지중해사 연구 초기에는 지중해 무역을 향신료, 비단 등의 고가품이 주종을 이루는 사치품 무역으로 간주했었다. 19세기 후반 독일 출신의 지중해 연구자들은 향신료와 같은 사치품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향신료 무역이 지중해 무역의 동력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다티니 문서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다티니 문서는 향신료 이외에 곡물, 면화, 명반, 산업 생산에 필요한 다양한 원료들 또한 중요한 거래 품목임을 증명해주었다.
중세의 일상생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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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프라토 문서고로 사용되고 있는 다티니의 생가. 〈출처: (cc) Sailko at it.wikipedia.org〉 2 1394년 지중해를 오가며 화물을 수송했던 4척의 선박에 실렸던 화물 목록을 적은 문서. |
다티니 문서는 중세 유럽인들의 일상생활을 엿보게 해주는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그의 기록은 정치, 문화, 언어, 복식, 음식 등 일상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기록을 읽다보면 우리는 600년 전의 프라토, 피사, 피렌체, 아비뇽, 바르셀로나, 제노바, 베네치아, 파리 등 유럽의 도시 골목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이리스 오리고(Iris Origo)는 다티니가 남긴 기록을 참조해서 쓴 책인 [프라토의 중세 상인] (앨피, 2007)에서 분주한 도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좁아터진 길에서 푸주한은 노상에서 양의 목을 치고 사람들은 그 옆에서 바로 잡은 고기를 사려고 줄을 섰다. 그 옆에서는 구운 비둘기와 거위, 자고새, 잉어와 뱀장어를 팔았다. 도시의 외침꾼은 이 골목 저 골목을 분주히 옮겨 다니며 그날의 소식을 전했다. 출생, 결혼과 사망, 파산과 노예해방, 잃어버린 재산과 가축 목록, 때론 유모 찾기, 추방과 벌금, 간혹 처형과 같은 소식이 이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도둑과 창녀들은 옷이 벗겨진 채로 회초리를 맞았고, 위조범이나 이교도들은 짐수레 끝에 묶여 끌려와 공개 광장에서 산 채로 화형 당했다.”
다티니의 개인 회계장부와 수첩에는 시시콜콜한 그의 일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하인과 노예를 두었는지, 그 노예들이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프란체스코가 첩이 낳은 딸의 지참금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임신한 여자 하녀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어떤 병을 앓았고 그 치유책이 무엇이었는지, 흑사병이 중세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주었는지, 종교와 구원이 중세 사람들의 삶에 특히 노년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다티니의 서신과 장부만큼 중세 이탈리아 도시의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했는지를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도 없을 것이다.
결혼 생활 백과사전
동시대의 다른 이탈리아 상인들이 남긴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티니 기록만이 가지는 또 하나의 예외성은 그가 아내와 주고받았던 많은 편지들이다. 당시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같이 사는 부부가 서신을 주고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또한 귀족이나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도 여성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이 남긴 편지는 많지 않은 편이다. 실제로 그의 아내 마르게리타도 처음에는 글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편지를 대필하다가 나중에 글을 배워 자신이 직접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남편 다티니는 아내에게 집안일에나 신경을 쓰라고 핀잔을 주기까지 했다.
이들 부부가 이렇게 많은 편지를 주기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부부의 별거 덕분이었다. 둘 사이 아이가 생기지 않자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편은 자주 집을 비웠고 아내의 불만은 커져갔다. 그렇다고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부부는 떨어져 있으면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부르주아 출신의 남편은 편지에서 젊은 아내가 못 미더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댔고, 몰락했지만 귀족 출신의 아내는 남편의 못마땅한 행동들을 질타했다. 부부가 주고받았던 편지가 남아 있지 않다면 중세의 결혼 생활을 이렇게 자세히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티니 부부의 경우 못지않게 중세 도시민의 결혼생활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예외적인 기록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다티니와 동시대에 살았던 파리의 부르주아가 자신의 젊은 아내를 훈육하기 위해 쓴 책이다. 하지만 다티니와 파리의 부르주아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다티니는 어린 아내를 하녀 취급했지만, 파리의 부르주아는 “당신이 정원에서 장미를 키우거나 바이올렛을 가꾸고 화관을 만들어 쓰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말할 정도로 젊은 아내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티니 부부의 편지와 파리 부르주아의 훈육서(아일린 파워, [중세의 사람들] (즐거운상상, 2010), pp. 215-261)를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욱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 프라토 문서고를 둘러보고 피렌체로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도시 피렌체. 프라토 문서고에 이어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피렌체를 둘러보는 것 또한 이곳을 방문하는 즐거움이다. 〈출처 : Gettyimages〉
프라토 문서고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홈페이지(www.archiviodistato.prato.it)에서 참조할 수 있다. 몇 년 전 프라토 문서고는 다티니의 편지를 모두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서신 이외의 기록들은 문서고에 직접 가서 열람해야 한다. 여권만 있으면 누구나 자료를 신청ㆍ열람할 수 있다. 하지만 다티니의 문서를 해독하려면 고문서 해독 기술을 우선 배워야 한다.
문서고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체적으로 프라토 시에는 볼거리가 별로 없다. 차라리 프라토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피렌체를 둘러보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필자는 프라토 자료조사를 할 때 항상 피렌체 역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했다. 개인적인 경험인데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피렌체를 감상할 것을 권한다. 아마 감흥이 한층 배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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