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
<원더풀 라이프>(고레에다 히로카즈, 1998, 2018년에 재개봉)
살아 있는 동안 영생의 삶을 구체화시키려는 건 유토피아를 꿈꾸는 일이다. 유한이 무한을 결코 포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생의 삶은 이생의 삶과 비교할 때 차원이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낮은 차원의 세계에 있으면서 상위 차원의 세계를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각하길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비록 구체화시킬 순 없다 해도 각종 이미지를 동원하여 상상함으로써 영생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 대표적인 매개는 이미지이다. 특히 영화는 시청각 이미지를 통해 보이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할 뿐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여 새롭게 보게 하며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시키는 일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특수입체영상기술로 영화적인 현실을 체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영생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에 관해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현실에서 혹시 영상매체를 통해서 경험할 가능성은 없을까?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만일 죽은 후의 삶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삶을 꿈꿀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래나 불현 듯 떠올려지는 지난 과거는 대개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다. 그렇다면 죽은 후의 삶은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될까? 죽음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나,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고, 충분히 그럴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죽음 후의 삶을 상상하는 건 현실과 이생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임사체험을 해보지 않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대답을 시도했다. 예컨대 최근에 개봉된 <신과 함께>(김용화, 2017), <코코>(리 언크리치, 2018), <원더풀 라이프>를 들 수 있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1998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20년이 지나 2018년에 재개봉된 영화다. 이곳에서 그는 매우 흥미로운 상상을 영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살아 있는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은, 죽은 후 49일을 보내면서 기억해낼 수 있는 한, 사후 세계에서 현실이 될 것이라는 상상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만일 잊히지 않는다면 사후세계에서 새로운 삶으로 재현된다 함이다. 이렇게 되면 사후세계는 현실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의 재현 혹은 연장으로 이해된다.
엄밀히 말해서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는 살아있는 자를 위한 내러티브이다. <코코>와 <신과 함께>에서 볼 수 있듯이 교훈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경고를 위한 것이든 살아있는 자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이에 따르면 영화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기억’은 엄밀히 말해서 죽은 자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기억이 아닐지 싶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기억해주는 조건에서 죽은 자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함이다. 따라서 망자의 기억과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살아남아 있는 자와 그들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관해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자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며, 또한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를 어떤 방식으로 추모해야 할 것인지를 시사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한 행복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망자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와 상관없이 망자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내고 또 그것을 영원히 추모할 때, 망자는 그런 삶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영화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 수용하기 어렵지만, 이런 상상은 영생의 삶에 대한 기독교인의 상상에 매우 의미 있는 통찰을 준다. 예컨대 앞서 제기한 영생의 삶이 어떠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영생의 삶을 사후의 삶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하기 바란다. 영생의 삶은 이 땅에서 선취하여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록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확실하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후세계로만 이해하는 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건 어떤 모습의 삶일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길 기대하는 기쁨을 노래한 바 있다(시23:6). 하나님의 집에서는 예배와 찬양과 경배가 끊이질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런 삶이 실제로 어떤 느낌을 줄 것인지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알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부활 후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외의 누구도 그것이 어떠함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 바로 이런 질문과 관련해서 현실에서 선취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경험은 영생의 삶을 상상하는 일에 매우 큰 도움을 준다.
한편,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고 또 말하듯이 기독교에서는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 영생의 삶에서 재현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생에서 하나님 없는 행복한 삶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여 경험하였다면, 그는 그 경험이 영생의 삶에서 재현될 것을 기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곧 귀납적 외삽법(inductive extrapolation)에 따른 추리에 따르면, 이생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자주 또 더욱 다양하게 경험하면 할수록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대되는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나라의 경험을 교회에만 제한한다면, 영생의 삶은 언제나 예배와 찬양과 성도간의 교제에만 제한될 것이다. 이에 비해 교회를 넘어 일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면, 영생의 삶에 대한 기대는 더욱 다양해지고 또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관건은 이생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을 더욱 자주 또 더 다양하게 경험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우리가 왜 교회에서와 일상에서 하나님을 자주 예배하고 찬양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자주 기도해야 하는지는 바로 이런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여 경험한 것이 장차 임할 아버지의 나라에서 재현되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 말씀에 근거해서 말할 수 있다.(마26:29)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현될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여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여 경험하면 할수록 영생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이런 삶은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더욱 새롭고 또 풍성하게 재현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마지막 심판 이후에 정의롭게 회복되어 재현될 것이라는 의미의 비유도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대표적이다. 이생에서 부자는 호화스런 삶을 살았으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았고, 나사로는 가난했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며 살았다, 그들이 죽은 후에 상황은 역전되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6ff)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비록 힘들고 심지어 자신의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라도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자를 돌보며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나, 이런 작은 자들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영생의 삶에서 배제되는 삶을 살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반영한다.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에 따라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다면,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재편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하여 경험하였다면, 그 경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욱 새롭고 또 풍성하게 재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