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하오! 중국] 4. 푸젠성-이주의 문화
푸젠성-이주의 문화
양쯔강 이남, 이른바 중국 강남(江南) 의 문화는
그 근간을 '이주(移住) 의 역사' 에 두고 있다.
진(秦) .한(漢) 이후 남송(南宋) 대까지 참혹한
전란과 살육, 전제왕권의 학정을 피해 중원지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문화다.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움직였던 이들의 현실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다. 산간 벽지를
개간하고 원주민들과의 융합에도 적극 나섰던 이주민들의 문화는 해외로 뻗어 오늘날
세계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해외 화교권 세력을 구성했다.
강남문화의 대표격이라고 하는 상하이(上海) 와, 이같은 측면에서 다시 구별되는
푸젠(福建) 성은 광둥(廣東) 과 함께 해외 화교의 본향(本鄕) 이라 일컬어진다.
"차라리 태평성세의 강아지가 될지언정, 난세(亂世)
의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 " 푸젠성의 성도(省都) 가 있는 푸저우(福州) 사람들이
예전에 자주 하던 말이다.
그만큼 푸젠성으로 옮겨 온 사람들의 생활은 고단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오늘날의
푸젠에는 '태평면(太平麵) ' 을 먹는 습속이 아직 남아 있다.
먼 곳에서 집으로 온 가족과 친구, 손님에게 대접하는 국수다. 끓는 물에서 건져
올린 면에 삶은 오리알을 얹어 내놓는 음식인데, 귀한 친척이나 친구에게는 두터운
정을 표시하기 위해 오리알 두개를 얹는다.
오리알은 중국어로 '압단(鴨蛋) ' 이다. 이 압단은 푸저우말로 '압란(壓亂 : 난을
진압한다) ' 과 발음이 같다. 난세에 대한 혐오감과 생존을 희구하는 푸젠 사람들의
심리가 엿보이는 음식이다. 난세를 누른다는 오리알과 말 그대로 태평성세를 바란다는
뜻의 태평면.
이 음식은 어찌 보면 푸젠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창(窓) 이다.
이들이 자리 잡았던 푸젠의 땅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푸젠성 중부를 흐르는 민(□)
강 이남(강 이북은 민베이, 이남은 민난이라고 말한다) 지역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동(華東) 에 비해 물산이 턱없이 적었고 땅은 말할 수 없이 척박했다. 따라서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살아가야 했다.
샤먼(厦門) 경제특구 '첨단과학기술연구회' 황훠취안(黃泉) 이사장은 "농업적
여건이 좋지 않아 푸젠은 예부터 화동지역에 공급하는 수공업 제품의 생산기지가
돼 왔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주에 의지해 살아가야 했다. 특히 푸저우
사람들은 요리사와 이발사, 재단사로 성장한 사람이 많았다" 고 말한다.
이 때문에 푸저우 사람들에게는 '세자루의 칼(三把刀) ' 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요리.이발.재단에 쓰이는 세개의 칼이 푸저우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실제 중국의 푸젠성 인근 지역 등에는 주방장.이발사. 포목점 운영업자가
된 푸저우 출신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7세기 세계적인 무역항이었던 푸젠성 취안저우(泉州) . 쌓이는 토사로 수심이
낮아져 지금은 샤먼 등에 자리를 내줬지만 한 때 이곳은 장저우와 함께 해외로 나가는
화교들의 출발지였다. 취안저우 항구 부근에는 지금도 거대한 불상과 웅장한 동.서탑이
서 있는 개원사(開元寺) 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우샤오(吳曉.여) 씨는 "개원사 등 거대 사찰과
도교의 절이 취안저우에 많이 발달해 있는 것은 현지 주민들의 해외진출과 관련이
있다. 바다로 나가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생명의 위협을 피하고 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 이라고
말했다.
푸젠성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해외로 진출한 화교들과 관련이 있는 특이한 습속들이
많다. 우선 '번객(番客) 의 예' .번객은 화교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항상 다른 나라를 '오랑캐의 나라'
라는 뜻의 번방으로 부른 데서 나온 말이다. 해외, 즉 다른 나라인 번방에 살았던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거나 다시 출국할 때면 이들은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송별연 자리는 일반적으로 '송순풍(送順風:순풍을 불어준다) ' 이라고 하며 여기서는
숟가락과 생선요리를 뒤집는 게 금기다.
해외로 배를 타고 떠나는 상대방에게 불길함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한국인에게
간염을 포함한 염증에 잘 듣는 것으로 알려진 장저우의 편자황도 푸젠성 해외 이민사의
소산이다.
명대 궁중 비약(藥) 이었던 편자황은 이를 처음 만들었던 어의(御醫) 가 장저우의
한 사찰에 피란온 뒤 전했던 것인데, 후에 푸젠성의 민간에 이 약이 효험이 있다는
게 알려져 해외로 떠나는 가족들에게 각종 염증에 잘 들었던 편자황을 필수품으로
챙겨주면서 후대의 명약으로 자리잡았던 것.
이렇게 바다로 나간 푸젠인들은 우선 대만에 대거 정착했고 이어 교역을 위해 동남아에도
진출해 그곳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을 잊지 않았다.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落葉歸根) ' 는 회귀에 대한 강한 본성이 화교들을 고향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샤먼시에서 샤먼대교를 건너면 오른편에 지메이(集美) 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푸젠성
출신 화교를 대표하는 천자겅(陳嘉庚) 의 묘소와 그가 직접 일군 교육촌이다.
천자겅은 싱가포르에서 재벌로 성장한 뒤 1910년대 고국으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전재산을
쏟아 부은 사람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은 생전에 천자겅에 대해 '화교를 대표하는
깃발이자 민족의 빛' 이라고 극찬했다.
뿌리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화교들의 역량은 근세기까지 한낱 빈곤한 지역에 불과했던
푸젠성을 현대 중국 개혁.개방의 선두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차라리 '태평시대의 강아지' 가 되고자 했던 푸젠인들은 해양으로 나아가 가난을
이겨낸 뒤 이제는 조국의 개혁.개방에 순풍을 불어주고 있는 셈이다.
중앙일보:특별취재반 유광종 문화부 기자·유상철 베이징특파원·진세근 홍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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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젠의 맛 …불도장
푸젠요리는 중국 8대 요리의 하나로 일명 민채다. 푸젠성은
산지와 구릉지가 성 전체 면적의 80%를 차지하며 바다에 접해 있어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한(漢) 대에 이미 특유의 풍미를 갖추고 있었으나 당.송대에 푸저우.취안저우 등지가
해외무역항이 되면서 요리도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됐다.
푸젠 요리는 '탕이 없으면 안된다 (無湯不行) ' '한가지 탕이 열 가지 맛을 낼 수
있다(一湯十變) ' 는 말이 상징하듯 탕을 매우 중요시한다.
한국에서 고급 '보신음식' 쯤으로 잘못 알려진 불도장(佛跳牆) 은 그 중 하나다.
불도장은 청(淸) 대 광서(光緖) 2년(1876) 한 민간인이 현지의 가장 높은 행정관
주연(周蓮) 을 집으로 초대해 그 부인이 요리를 해 대접하는 과정에서 유래했다.
닭.돼지.오리와 소흥주(紹興酒) 를 넣어 만든 요리를 먹고 난 周는 향기에 감탄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周는 자신의 주방장에게 요리의 비법을 전수해 줄 것을 부탁했다. 관아로 돌아온
요리사 정춘발(鄭春發) 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해삼.삭스핀.돼지 뒷다리 근육.전복
등 20여종의 주재료와 10여종의 부재료에 육수와 소흥주를 붓고 약한 불에 서너 시간
끓여내는 요리로 발전시켰다.
1877년 鄭은 '취춘원채관(聚春園菜館) ' 이라는 식당을 차렸다. 어느날 몇명의 고관대작과
문인들이 요리를 먹기 위해 뚜껑을 열고 나서 방안 가득 퍼진 향(香) 에 모두 취하고야
말았다. 손님들이 요리의 이름을 묻자 주인은 "아직 없습니다" 고 대답했다.
그 중 한 시인이 '뚜껑을 열자 사방으로 퍼지는 향(香) , 참선하던 부처도 담을 넘겠네'
라는 시를 지어냈다. 절묘한 시구가 계기가 돼 이 요리는 이후에 '부처도 담을 뛰어
넘겠어(佛跳牆) ' 라 불리게 됐다.
푸젠 요리에 자주 사용되는 조미료는 홍조(紅糟) 와 하유(蝦油) 다. 홍조는 찐 찹쌀에
누룩의 일종인 홍국(紅麴) 과 백국(白麴) 을 섞어서 항아리에 담아 한달 정도 지난
다음 체로 걸러 사용하는 조미료로 장어.닭.오리.생선.돼지고기 등을 조리할 때 쓴다.
하유는 새우 액젓으로, 간을 맞추는 조미료로 사용한다.
푸젠 요리의 특징인 연피(燕皮) 는 신선한 순살 돼지고기에 녹말가루를 더하여 짓이긴
뒤 눌러 종잇장처럼 얇게 편 다음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 것으로, 탕 등의 고급요리에
사용한다. 생선을 갈아서 둥글게 만든 어환(魚丸) 도 빼놓을 수 없다.
신계숙 <중국요리전문가. 배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