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집 12
- 상구 형 -
이준희
구불구불하고 먼지가 폴폴 나는 신작로 대신 들판을 곧게 지른 철둑길로 다니기도 했지요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가야 했으니까요
완행열차가 지나간 철둑 길 철로에 앉아 열차 뒤꽁무니를 향해 하모니카를 열심히 불어대던
사내는, 음악처럼 슬픔에 밴 얼굴로 하모니카에 얼굴을 파묻곤 했지요
스쳐 지나간 열차에 타고 있을 매일 밤 꿈속에 나타나는 그녀를 위해
어둠이 깔릴 때까지 이마에 핏대를 내며 입술을 깨물면서 하모니카를 배가 고프도록 씹어댔지요
가슴이 침목처럼 타들어 가고 기름먹은 자갈들이 실없는 뒷말을 했지만
사내는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휘돌아 보이지 않는 철로의 끝은 항상 서울, 서울의 끝으로 어둠이 내리고
암흑을 가로지르는 하모니카 방마다 아기자기한 사연들이 채워졌지만
두 줄기 선로(線路)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사내에게 아쉬움의 손만 흔들고 있지요
70을 바라보는 사내는 아직 허물어가는 고향 집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홀로 기다리고 있을 테지요
허무한 집 13
- 정육점 지 씨 -
이준희
가난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던 시절 아무도 잡으려 하지 않던 칼을 잡고 가슴을 후벼 파듯 살점을 발라내고 세월 먹은 움푹한 숫돌에 쓱싹쓱싹 가슴에 하얀 칼날을 세웠다 어린 나이에 시장 바닥을 누비게 된 철부지 아닌 애어른으로 제 이름을 잃고 셋방 냉골에 가슴을 처박고 꿈을 버린 날 문지방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마저 소리 없이 비웃었다 백열전구 불빛은 늘 추웠고 졸고 있는 진열장 빨간 형광등은 늘 따스했다
자주 빈혈이 있었던 양팔 저울로 균형을 잡기까지 고단했던 하루하루들 전자저울의 파란 숫자가 가리키는 세월의 나이가 철봉대에 걸친 S자 갈고리에 굴곡처럼 휘어져 걸린 등뼈 줄거리와 세월을 뒤집고 순서를 기다리는 핏빛 몸뚱아리를 보면 지 씨는 자신의 심장까지 오려 내 진열장 한편에 처박아 넣고 팔고 싶었다 백정이란 손가락질이 가슴을 후비고 무학의 설움이 응어리질 때마다 정육점 고기처럼 지 씨는 온몸이 고기가 되었다 뼈를 추리는 손놀림과 손님의 주문에 따라 단 한 번에 저울의 눈금을 맞추는 지 씨는 늘 칼끝의 상처에 밤을 설친다
어린 날 대못을 기차 길 레일 위에 올려놓고 숨어서 기차를 기다리며 마음을 조아리다 저 멀리 지나간 기차에서 튕겨져 나온 대못을 주워 숫돌에 갈아 만든 칼들이 밤마다 나타나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