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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4일 / 11구간 신사임당길 집결지 송양 초등학교.. (09:45)
이 구간은 조선시대 여류 양대(兩大) 시인, 화가인
신사임당(1504-1551)과 허난설헌(1563-1589) 두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 가 함께 걷는 길이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강릉으로 토호(土豪) 집안이지만 두 사람의 살아 온 삶은 상당히 다르다.
이 구간은 오죽헌,선교장, 경포대,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등 ... 문화 역사 자료가 상당히 많다.
운동장 잔디도 신록(新綠)을 더 해 가고 있는 있는 송양 초등학교 교정....
위촌리 (渭村里), 우추리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위촌리는 약 400여 년 전 조선 인조 때 경상북도 풍기군수를 지낸
위촌(渭村) 김상적(金尙積)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살았기에 그의 호를 따서 지명이 생겼다.
위촌리를 우추리라고도 하는데, 우출(牛出)이는 위촌리 마을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골아우(鯨岩)에
소가 반듯하게 누워있는 와우형(臥牛形)에서 소나 나왔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위촌리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으로 우출이라 하다가
1916년에 골아우, 새잇말, 송두골, 항생골, 지암을 합하여 만들었다.
1955년 9월 1일에는 강릉읍이 강릉시로 승격됨에 따라 명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에 따라 강릉시에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촌리는 멍애재와 사실이재에서 내려온 줄기에 싸여 있고, 위촌리 가운데로는 황계와 위촌천이 흐르고 있다.
근처에 교동택지 및 유천택지가 조성되어 준 도심의 주거생활이 편리해지고,
근교농업 및 귀촌 귀농지역으로 각광받으면서 주택 및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위촌리의 송양 초등학교는 한때 폐교위기에 처했었으나,
도심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교사를 새롭게 증축하는 등 활성화되고 있다. 도배마을로 유명하다.
심오하고 난해한 철학자 (哲學者)....일반 범부(凡夫)들은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적어서 집에 가져 와 한참을 읽어 보아야 조금 이해 할까 ~ 말까...)
11구간지기 라몽님, 미네르바님...두분 수고하셨습니다.
서울서 내려 와 엄마와 바우길을 함께 한 이쁘고 착한 딸....
기숙사 사감 선생님 같은 근엄하고 도도한 표정의 실땅(?)님..
오전반...미네르바님의 리딩으로 신사임당 길 발 걸음을 시작한다.
(저 뒤에 하곤 형님 두 손 주머니에 집어 넣고 걷는 포즈가 무쟈게 불량스러워 보인다.)
따가운 햇살 .... 허나, 습하지 않고 그늘진 곳과 간간이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신록의 세상으로 들어 오심을 환영합니다...
그늘진 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
여기를 보세요 하나~둘 ~셋....(주디,신시아,새치미님)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
칭런님, 선덕님.
올만에 뵙는 반가운 스카이블루님과 그 옆 두분은 바우길에서 자주는 뵙는데....
닉도 없고, 카페 가입도 없고, 말도 없고 ... 참 이상한 두 분...(닉도 정하시고 카페 빠르게 가입 하시길...)
무더위를 개 무시하고 힘차게 리딩을 하고 있는 씩씩한(?) 아니 아름다운 미네르바님..
저수지 초입에서 시간을 낚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모습.....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명주사랑님 몰카...
최대한 그늘진 곳을 찾아서 밀착을 한다....
명월님과 찔레꽃님 모습...
죽헌저수지 (竹軒貯水池).경포저수지
죽헌동을 흐르는 운정천의 상류를 막아 조성하였다.
죽헌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경포호로 유입되는데,
경포호 주변의 넓은 들판에 조성된 농업용수로 주로 이용된다.
죽헌저수지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약 7년여에 걸쳐 관개 개선을 위하여 조성되었다.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인 곤신봉에서 동쪽으로 강릉 시내를 향하여 뻗어 내린
산줄기의 연장선상에서 강릉 시청의 북서쪽 약 2㎞ 지점에 땅재봉[120m]이 있다.
땅재봉에서 북쪽으로 성산면 위촌리와 강릉시 유천동·죽헌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분수계가 있는데,
그 동쪽 사면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지류들이 모이는 지점에 제방을 쌓아 조성하였다.
죽헌저수지로 인해서 혜택을 받는 농지 면적은 262ha이다.
저수지의 수원공(水源孔)은 제방 구조는 토제(土堤)이며, 제방 길이 115m, 제방 높이 17.3m이다.
따가운 햇살과 무더위에 아랑곳 않고 힘차게 걷고 있는 씩씩한 바우님들..
이 두분은 무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좋아 하는 동구 밖...저수지 길...
앗~ 하곤 형님 바지 무릎에 빵꾸가 .... 무쟈게 쉑쉬(?)해 보인다 ..ㅎ
모든 시공간이 멈춘 듯 한.....고즈넉한 한 낮의 저수지 풍경...
사모정(思母亭)
사모정(思母亭)은 고향을 떠나 삶을 영위해 온 언론인 덕전 권혁승이
희수(稀壽)의 나이에 이르러 고향 마을에 세운 정자이다.
농사일을 하던 부모를 따라서 농사짓던 어린 시절의 풍경은 사라졌지만,
희수의 나이에도 또렷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정겨운 모습을 기리며 고향 핸다리 마을에 조성한 것이다.
강릉시 죽헌동 핸다리 마을에 건립되었다. 사모정이 건립되면서 이 일대에 1,800㎡ 규모의 효공원이 조성되었다.
200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에 건립되었다.
사모정과 '아버지', '어머니', '고향길' 등의 시비와 기념비가 세워졌다.
효공원에는 백교 문학회의 활동을 선양하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그들의 작품들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사모정은 육각형 정자이다. 정자의 가장자리로는 계자 난간을 둘렀다.
전면에 덕전 권혁승의 ‘사모정’ 편액이 걸려 있고, 정자 안에는
강릉 출신의 서울 대학교 명예 교수 소천(小泉) 조순[1928~ ]의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의 시구 편액을 비롯하여 6개의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공원 내에는 다수의 시비를 비롯하여 모정탑이 세워져 있다.
사모정과 효공원은 출향 인사의 어머니와 옛 고향 마을을 기리는 정서가 담뿍 담겨 있다.
희수의 나이에 이 사업을 이끌어 낸 덕전 권혁승과
그가 회장으로 있는 백교 문학회의 정성으로 시민들의 문화 공간이 확보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모정 정자도 아름답고 고풍스럽게 디자인되어 그 격조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곳에 자신들의 작품을 출연한 문인, 학자, 예술가들의 역할에 힙입어
효공원은 문화 공간으로서 한층 드높은 격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지역의 인물인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율곡 이이(李珥)의 학문과 예술성,
그리고 그 효행을 소개하면서 강릉을 효행의 세계화를 위한 발원지로서 위상을 정립함으로써
정자와 공원이 가지는 공공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강릉오죽한옥마을
한옥은 예로부터 작위적인 형태가 아닌 자연을 관조하며 주위의 환경요소와 어울리도록 지었기 때문에
주위의 경관요소를 거르지 않는 곳에 집을 짓되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하여
그곳의 지세에 맞는 형태의 것이 되도록 하였다.
초가의 선은 뒷산의 모양을 닮았고 기와의 선은 양끝을 잡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새끼줄의 선을 표현하며,
처마는 후림과 조로를 두고 용마루의 가운데를 처지게 하여
자연스러운 형태를 나타나게 하여 유연성을 품고 있다.
강릉오죽한옥마을은 이러한 한옥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 자연스럽고 언제 보아도 정겨운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비록 기교 있는 장식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재료 본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담백함과 순수함을 나타내었으며,
마을 곳곳에 심어진 대나무의 경관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대표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유명한 오죽헌과 강릉한옥마을을 연계하여
율곡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인성 교육장을 운영하며,
다양한 전통문화체험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한옥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알리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신사임당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青 백운비하모산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어머니의 흰머리를 학의 머리(鶴髮)로 표현한 게
특이하고, 저무는 산위를 떠 도는 흰 구름(白雲)
조차도 어머니의 하얀 머리칼을 연상케하는
구절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사모곡의 시다.
사친(思親)
千里家山萬疊峰 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반쌍륜월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사상백구항취산
波頭漁艇每西東 파두어정매서동
何時重踏臨瀛路 하시중답임영로
綵舞斑衣膝下縫 채무반의슬하봉
천리 밖 우리집 첩첩 산 넘어 아득한데
가고 싶은 마음 늘 꿈속까지 가득하네
한송정 하늘과 물에는 둥근 달 떠 있고
경포대에는 한바탕 바람이 불고 있으리
바닷가 모래밭에는 갈매기들 모였다 흩어지고
수평선 위에는 고깃배들 이리 가고 저리 오리
언제 고향길 다시 밟아
비단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곁에서 바느질할꼬
제목의 ‘친할 親’은 어버이를 가리킨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가깝게 여기는 사람이 부모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는 1촌이 되고, 형제자매는 2촌이 된다.
나를 기준으로 할 때 아버지의 형제들인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3촌이 되고,
어머니의 형제들이 외3촌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친은 부모를 생각한다는 뜻이니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다.
신사임당은 한송정, 경포대, 동해 바다 수평선, 고기잡이 배, 모래밭, 갈매기, 달, 바람 등을 통해 고향을 떠올린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꿈속에까지 그곳의 풍경이 나타나고,
한송정에서 본 하늘의 달과 그 달이 물에 비친 정경까지 세세히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신사임당의 시는 〈사친〉, 〈유대관령망친정시(踰大關嶺望親庭詩)〉 두 편과 2행만 남아 있는 ‘낙구(落句)’가 전한다.
남아 있는 시의 편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신사임당은 본래가 시인이라기
보다는 포도, 산수, 풀벌레 그림에서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화가이다.
그는 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후대인에게 익히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위 두 사람은 화폐 인물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왼쪽 흰 옷을 입은 사람은 1원짜리 동전에 라도 나오고 싶어 발 버둥 치는 사람임...^^)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에 많이 나타나는 별당과 그 평면형식을 같이 한다.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
고택이라고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최응현의 집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는 딸이 다섯 있었는데,
둘째 딸인 신사임당은 덕수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넷째 딸은 안동권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분재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택의 소유권은 안동권씨 집안의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1938년 조선문화재보호령에 의해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다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와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안채와 곳간채 및 사주문이 해체되었다.
1995년 오죽헌 뒤의 고택이 다시 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포를 구성하는 방식이 주심포에서 익공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포의 변화과정을 짚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점심 식사 후....집결지로 모이고 있는 바우님들....
사임당길 후반은 라몽님이 리딩을 한다.
경포생태저류지 (鏡浦生態貯留池)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경포호 수량 조절을 위해 조성한 생태 저류지.
경포생태저류지 조성은 녹색 도시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경포 습지가 조성되면서
경포 호수로 유입되는 수량을 조절하기 위해 200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경포생태저류지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경포호 유입 하천인 경포천(鏡浦川)[강릉시 죽헌동 일원]에 생태 저류지를 조성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여 시민 편의 시설인 산책로, 꽃밭 등을 조성하였다.
사업비는 총 21억 9000만 원이 소요되었는데, 국비 13억 1400만 원, 시비 8억 7600만 원이었다.
2010년 31만 9000㎥에 호안 및 토공(土工) 공사를 실시하였고,
2011년 군정교(郡丁橋) 확장, 방류 수문 및 수량 조절보 설치,
2013년 저류지 조성 1단계 공사를 준공하였으며,
2014년부터 2015년 2단계 공사로 친수 공간 조성 공사를 진행하였다.
경포생태저류지는 오죽헌(烏竹軒)과 선교장(船橋莊) 사이에 있는
경포천과 경포천 주변 농경지에 조성한 생태 하천이다.
저류지 중심을 가로질러 메타세콰이어를 심어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유채꽃과 코스모스 등을 심어 봄가을로 만개한 꽃을 감상할 수 있다.
후미를 잠시 기다리면서...
신록과 함께 걸어 오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길 주변 풍경이 후에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 할 지 기다려 진다.
강릉 선교장 江陵船橋莊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 쪽으로 4km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 타고 건넌다"라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 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 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총 건평 1,051.24m²(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밖에는 수백 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은 열화당이라 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안채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 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동별당(東別堂)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 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 활래정(活來亭)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爲有頭源活水來" 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 기타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터가 있다
*
훠이~~훠이~~
윗녘새야... 아랫녘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말고
배다리 이통천 집으로 가라~~
하늘을 바라 보며 새를 쫒는 어느 노인네의 외침!
그냥 외치던 소리인 줄 알았는데 ...
배다리 이통천!
배선, 다리교, 선교장 이통천 집으로 가라 라는 말이었다.
선교장이라는 오랜 전통가옥...아흔아홉칸 대궐같은 집!
선교장, 배다리의 말 그대로 배를 타고 이곳에 왔다 하여 선교, 시골마을 장을 써서, 선교장!
지금이야 경포호가 4.3km 둘레로 작지만 과거엔 선교장 인근까지 경포호가 컸다 한다.
70년대 식량증산을 위해 호수를 메워 논을 만들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 효령대군 10세손인 이내번이 살던 집으로
대대로 인심이 후해 이웃은 물론이고 시인 묵객까지 정성으로 베풀었다 한다.
특히 14세손인 이의범이 과거에 급제하여 통천에서 군수를 지낼때
강릉이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울때 수천석의 쌀을 풀어 도왔는데,
그때 배다리 이통천댁이라는 택호가 등장한다.
그만큼 지역에서 최고의 부자였다하니...
저마다 새를 쫒으며 부잣집 이통천 집으로 가라고 외친게 아니였겠는가?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을 지나면서...
세종도 감탄한 천재소년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김시습 관련 유물·자료를 전시해 놓은 기념관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의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절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와 소설에 담긴 김시습의 고매한 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경포 도립공원 내에 전통 한옥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출처 : 강원도청)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까?
사람들은 그를 방랑한 천재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며,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
또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농민의 고통을 대변한 저항의 시인으로,
철저하게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한 성리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을 것이요 또 그는 이런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었다.
바우길에서 이 두 사람은 따로 모른 척 걷는 걸 보니....분명 아름다운 부부가 맞는것 같다.
(이 사진은 내가 강제로 붙어서 포즈를 취 하라고 했다...^^)
시루봉 근처에 다다르자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 간 가슴 아린 흔적들이 눈에 들어 온다.
시루봉에 올라서..(그나마 다행으로 시루봉 정상 근처는 화마의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았다)
江陵-四柱山
강릉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산봉우리.
모산봉, 월대산, 땅재봉, 시루봉인데, 이 4개의 산봉우리가 강릉을 떠받치고 있다.
강릉 시내로 흐르는 남대천을 기준으로 하여 내 남쪽에 2개, 내 북쪽에 2개가 있는데,
남쪽에는 모산봉(母山峰)과 월대산(月帶山)이 있고, 북쪽에는 땅재봉(堂齋峰)과 시루봉(甑峰)이 있다.
이 산봉우리들은 마름모꼴로 버티고 있어 강릉의 터를 단단히 다져 주는 역할을 한다.
모산봉
장현동에 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밥봉, 볏집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해서 노적봉,
인재가 많이 나게 한다 해서 문필봉이라고도 한다.
모산봉은 강릉의 안산이자 명산이어서 조선중기 중종 때 강릉부사인 한급(韓汲)이
강릉에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꼭대기를 세 자 세 치 깎아 내렸다고 한다.
월대산
두산동 남대천 하류 남쪽에 있다. 초저녁 보름달이 떴을 때
강릉대도호부 관아 동헌(東軒)에서 달을 바라보면 달이 산허리 걸린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월대산은 모산봉에서 동북쪽으로 내려온 줄기 가운데 제일 높은 봉으로 봉화터가 있으며,
청량과 하평들, 젠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젠주라는 뜻은 강릉 송정동 남대천 하구의 넓은 뜰을 부르던 옛 이름)
땅재봉
유천동에 있다. 옛날 이 봉우리에 당을 지어 놓고 당제를 올렸다고 하여 생긴 이름인데,
당재가 있어 당재봉이 변해 땅재봉으로 되었다.
땅재봉은 삿갓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으며, 동서남북으로 뻗어 내린 네 줄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또 땅재봉에는 좋은 묏자리가 많아 인근 마을사람들이 밤에 몰래 주검을 가매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루봉[甑峰]
강릉시 저동에 있는 산의 봉우리.
시루봉[甑峰]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경포지역에서 제일 높은 봉으로 서쪽에는 태장봉이 있고,
동쪽으로 이어진 줄기 끝에는 경포대와 경포호, 경호정, 금란정, 방해정 등 정자가 있다.
시루봉은 경포의 4주산, 강릉의 4주산 가운데 하나이고,
경포팔경 가운데 하나인 저녁 무렵 시루봉을 붉게 물들인
저녁 햇살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증봉낙조’(甑峰落照)에 해당된다.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이라고 붙여진 명칭이라한다.
그러니까 대관령 동쪽에 있는 손꼽히는 명승지 8곳을 관동8경이라 한다.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청간정(淸澗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하는데,
월송정 대신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를 넣기도 한다.
망양정과 월송정은 경상북도에 있고,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지역이다.
관동별곡은 조선 선조(宣祖) 때, 정철(鄭澈)이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산수미(山水美)를 읊은 가사이다.
관동에 관동8경이 있다면 경포에는 "경포8경'이 있다.
경포8경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인 경포대(鏡浦臺)는 실상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인데
다시 경포호수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수많은 정자(亭子)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경포팔경(鏡浦八景)이라고 하며 강원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빼어난 경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는데 누구의 작품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1.녹두일출 (菉荳日出)
녹두정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
2.죽도명월 (竹島明月)
호수 동쪽에 있는 섬모양의 작은 산으로서 지금의 현대호텔 자리는 옛날에 산죽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동쪽 수평선 넘어 솟아오르는 보름 달빛이 죽도의 대나무 사이를 뚫고
호수에 비칠 때 일어나는 그림 같은 장관을 죽도명월이라 하였다. .
3.강문어화 (江門漁火)
강문은 경포대에서 동쪽 호수 하구에 있는 작은마을로 밤에 경포대에서 강문쪽 바다를 건너다 보면,
오징어 잡는 고기배의 불빛 이 바다와 호수에 영도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4.초당취연 (草堂炊煙)
초당은 호수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서산 시루봉에 해가 질 무렵,
집집마다 저녁을 지을 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노을에 물들어 평화로운 농촌을 연상케 하는데,
그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5.홍장야우 (紅粧夜雨)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때, 기녀이다.
어느날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 때, 부사는 호수에다 배를 띄어놓고
홍장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켜고 감찰사를 극진히 대접했다.
감찰사의 사랑을 흠뻑 받은 홍장은 뒷날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난 감찰사를
호숫가 바위에 앉아 넋을 잃고 기다렸으나 한번 가신 님은 소식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자욱한 안개사이로 감찰사의 환상이 나타나 홍장을 부른다.
홍장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쪽으로 달려가다 호수에 빠져 죽었단다.
이 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암이라 부른다고 한다.
6.중봉낙조 (甑峯落照)
경포대 북서쪽에 있는 시루봉은 그 봉우리 모양이 시루와 비슷하다하여 시루봉이라 하며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 무렵, 경포 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낙조가 잔 물결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7.환선취적 (喚仙吹篴)
시루봉의 상선봉에 신라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며 바둑을 놓고 놀던 곳이 있었는데
고요한날 밝은 밤이면 어디서 부터인가 구슬픈 피리 소리가 바람결에 은은히 들려왔다고 한다.
지금도 고요한 밤이면 옛 신선들이 바둑놓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8.한송모종(寒松暮鐘)
한송정은 지금의 비행장 동쪽, 녹두정이라 불렸던 이 정자는 화랑도들의 수양의 도장으로 지었던 것으로
신라 불교의 중흥기에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가 경호의 잔물결을 타고 신선이 놀던
경포대까지 은은히 들려오던 옛 정취를 회상한 것이다.
그 울창한 숲들은 어디로 가고 화마의 흔적들만....
우리 세대에 그 아름다웠던 소나무 숲을 다시 볼 수 없지 싶어 더 슬펐다.
사계절 어느때 걸어도 우거진 소나무 숲과 솔향 가득한 이곳 숲 길이 좋아 자주 찾아와 걷고 했었는데...
산불로 인 해 이 정도로 처참하게 황폐(荒廢)화 될 줄이야...걷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멋지고 아름답던 나무도 불에 타...잔해(殘骸)라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흔적에 그저 안타까움만....
경포대는 고려시대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누각으로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32주로 구성되어 있다.
돌에 새겨진 시를 담고 있는 명주사랑님
경포 가시연습지를 지나 간다..
경포습지 조성으로 가시연꽃 등 다양한 희귀식물과 동물들을 볼 수 있다.
주위에는 강릉녹색도시체험센터, 석호생태관, 경포아쿠아리움등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넜었는데....배는 사라지고 이젠 다리가 놓여져 있다.
나룻배 타고 건너 던 그때....배를 기다리면서....
반대편에서 당겨 본 경포 호수 위 경포대
경포대와 경포호 (鏡浦臺와 鏡浦湖)
경포호는강릉시 저동에 있는 천연 호수로, 호숫물이 거울과 같이 맑다고 하여 경호(鏡湖)라고도 하였다.
강릉 홍제동에서부터 흐르는 죽일천, 성산면 위촌리에서 흐르는 경포천,
성산면 송암리에서 흐르는 운정천의 물줄기가 모여 만들어졌다.
강릉의 대표적인 승경으로 경포호 주위에는 경포대 외에도 활래정, 해운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상영정, 창랑정, 경호정, 석란정, 취영정, 환선정과 같은 정자들이 있다.
경포대는 영동지방 팔경 중에서도 제일경으로 꼽는 경포호수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는 곳에 있다.
안축이 지은 「경포대기」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13년(1326) 안렴사 박숙에 의해 처음 창건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포대가 강릉부 동북 쪽 10리에 있고
옆에는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위에 정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에 의해서 옛터에서 지금의 장소로 이건되었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은 이전하기 전, 현재 방해정의 뒷산인 시루봉에 있을 때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1524년(중종 19)에는 화재로 소실되어 강릉부사 박광영이 중수하였으며,
1628년(인조 6)에는 강릉부사 이명준이 온돌과 양실을 철거하였다고 한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1897년(광무 1)에는 강릉군수 정헌시가 득월헌과 후선함을 설치하였다.
현재의 골격은 1628년 중수 때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천연 호수인 강릉 경포호는 그 자체로서 보존 가치가 높은 명승이며,
여기에 세워진 경포대는 수백 년 간 문예의 제제가 되어온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건립과 중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경포대는 단순히 경치를 관람하고 풍악을 즐기기 위한 일반 누각이나
개인이나 문중의 독서 및 후학 양성을 위한 정자와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대부분의 중수가 강릉부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지방관의 안정적인 지역 통치를 위한 관영 누각으로 운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유학자들의 심신 수련과
수려한 경관을 즐기며 감상하는 유식(遊息)의 용도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28년에는 온실과 양실을 철거하였는데, 이때부터 정자의 기능은 사라지고 누와 대의 기능이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포대는 오랫동안 변천해 오면서 기능과 용도가 다양하게 변화해 왔고,
건축적으로는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는 2013년 12월 30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 경포호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정자각들
①경포대(鏡浦臺:1326년 건립) - 경포호숫가의 제1 누대(樓臺)<국가 보물 2046호>
②해운정(海雲亭:1520년 건립) - 강릉시 운정길<국가 보물 183호>
③환선정(喚仙亭:1582년 건립) - 경포호 남쪽 언덕 위
④호해정(湖海亭:1754년 건립) -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강원 유형문화재 62호>
⑤활래정(活來亭) - 선교장(船橋莊:1815년 건립) 내에 있는 정자각
⑥방해정(放海亭:1859년 건립) - 강릉시 저동(2023년 4월, 화재로 일부 손실)<강원 유형문화재 50호>
⑦상영정(觴詠亭:1886년 건립) - 강릉시 경포로371번길 53(2023년 4월, 화재로 전소)
⑧금란정(金蘭亭/<舊>梅鶴亭:1889년 건립) - 강릉시 경포로371번길 57<강원 유형문화재 5호>
⑨취영정(聚瀛亭:1893년 건립) - 강릉시 해안로406번길(강문)
(10)경호정(鏡湖亭:1927년 건립) - 경포로371번길 49
(11)월파정(月波亭:1958년 건립) - 강릉시 초당동 549, 경포호수 내 섬에 있는 정자각
(12)창랑정(滄浪亭:1962년 건립) - 경포호 서쪽 해변
※석란정(石蘭亭:1956년 건립) - 2017년 화재로 전소(소방관 2명 순직)
※홍장암(紅粧巖) - 경포호숫가에 있는 바위<홍장고사가 얽혀있는 바위>
※한송정(寒松亭 址) - 강동면 하시동에 있던 정자(우리나라 最古의 다도유적지<茶道遺蹟地>)
2017년 화재로 석란정(石蘭亭)이 완전소실되었는데,
2023, 4월 또다시 경포호수 주변의 산불로 상영정(觴詠亭)은 전소(全燒),
방해정(放海亭)은 일부 소실(燒失)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소나무 풍경이 아름다운 허난설헌 소나무 숲길 달빛 산책로...
허난설헌 생가 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고 있는 바우님들...
허초희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는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문인
허난설헌의 예술혼과 문학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곳이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8세 때부터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하였으나 27세 때 요절했다.
섬세한 필치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달래는 노래를 했는데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모아 '난설헌집'을 간행했다.
2001년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터는 아름다운 솔숲을 지나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대부가 한옥의 형태이다.
솟을대문과 야트막한 담장 안에 대청과 사랑채, 안채 등이 있고
우물과 방앗간 옆으로 좁은 문을 두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남녀의 구분을 두었다.
안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매화나무가 아름답게 자란다.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곳이다. 생가를 비롯해 허균·허난설헌 기념관과 기념 공원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난초 처럼 살다 간 시인 허난설헌,.....그녀의 시 '감우'와 그녀의 짧은 일생이 닮아 있다.
감우(感遇) / 허난설헌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영영창하란)
枝葉何芬芳(지엽하분방)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서풍일피불)
零落悲秋霜 (영락비추상)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수색종조췌)
淸香終不死 (청향종불사)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감물상아심)
涕淚沾衣袂 (체루첨의몌)
許筠-許蘭雪軒記念公園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문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
조선 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許筠)[1569~1618]과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남매를 기념하기 위한 문학 공원으로,
허난설헌 생가 터[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장, 녹지 공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3년 전국 시비 건립 동호회가 허균 3남매가 태어난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교산(蛟山) 마을의 애일당(愛日堂) 터에 교산 시비를 세운 것을 시초로
1991년 강릉시 여성 단체 협의회가 난설헌 시비를 세우고,
1994년 강릉 예총에서 난설헌 시비 옆에 교산 문학비를 세우는 등 허씨 가족 5문장가의 시비를 세워
허균·허난설헌을 기리는 시금석을 다진 후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을 통해
본격적인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허난설헌 생가 터를 복원하였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에 걸쳐 기념관 건립과 각종 자료와 유물을 수집하여
2007년 2월 1일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을 개관하면서 생가 터와 기념관을 갖춘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교산 문화제와 난설헌 문화제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특히 난설헌 문화제 행사에서는 강릉시 여성 단체 협의회에서 주관하는
난설헌 다례제 행사가 열려 많은 관심과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햇살이 따갑고 무더운 날씨...
즐겁게 웃으면서 함께 한 바우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 아침에 보던 그 밝은 햇살과 당신의 고웁던 참사랑이 푸른 나뭇가지 사이 사이로 스며들던 날이 언제일까 별들에게 물어요 나의 참사랑을 뜰에 피던 봉선화와 같은 사랑을 아무도 모른다네 우리의 추억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해 놓고 말은 한마디도 못한 것은 당신의 그 모습이 깨어질까 봐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았소 별들에게 물어요 나의 참사랑을 뜰에 피던 봉선화와 같은 사랑을 아무도 모른다네 우리의 추억을 낙옆이 지고 또 눈이 쌓이면 아름답던 사랑 돌아오리라 언제 보아도 변함없는 아름답던 사랑 그대로를 별들에게 물어요 나의 참사랑을 뜰에 피던 봉선화와 같은 사랑을 아무도 모른다네 우리의 추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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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걷자님의 꼼꼼하고 세세한 후기를 읽고 저는 이렇게 외칩니다.
"걷자님 만쉐이~!"
ㅋㅋ
자꾸 만나면 정이 든다고....
만나고 만나다 보니....이젠 구름님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말투와 선한 표정...그리고 소녀 감성 같은 글....
그리하여 나도 외쳐 봅니다
'알라뷰 ~ 구름님 만만세 !' ...^^
아침에 테니스 몇 게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어제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걷자님의 12구간 사진과 해설을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읽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후 영동지역에서 문화해설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시는 바우님이 계시다면 걷자님의 해설을 기본 교재로 삼으면 좋을 듯 합니다.
죽헌저수지 옆으로 이어진 새로운 모습의 길을 시작으로 지난해 시루봉 주변에서부터 시작된 산불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안타까운 12구간 신사임당 길... 다시는 이런 봄철 화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조 위에 댓글을 남겨주신 구름님 의견에 저 역시 동감... "걷자님 만쉐이~!"
ㅋㅋ
예전에 산에 다닐 때 출발 전에 그 동네 역사와 자료를 찾아 보곤 했었는데....
강릉이 고향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걷기 전에 강릉의 역사와 자료를 찾아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 합니다.
젊은 날 이런 식으로 공부를 했더라면...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나도 응답을 해야겠지요
귀여운 손녀가 외칩니다....칭런 할부지....万岁! (중국어로 이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네...ㅎ)
향토학자 걷자님의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향토 학자 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전공자였습니다...ㅎ
가끔 함께 걸으면서 제가 모르는 식물들에 관하여 질문하면
언제나 친절히 답 해주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11구간 신사임당길을 향하고 있었지요~
반가운 신사임당길,
더 반가운 바우님들,,
멋지게 담아주신 걷자님 감사합니다 ^^
더운날씨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
계절의 여왕 5월 답게 나날이 신록이 우거져 가는 주위 풍경들과
습하지 않고 쾌청한 날씨여서 바우님들과 함께 즐겁게 걸었습니다.
다만, 경포 시루봉 근처를 지날 때는 작년 화재 현장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걷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별로 안 반가우셨나봐요~?
이름을 한 번도 안 불러주셨네요~~?
ㅋㅋㅋ
장난입니다~~
다양한 시선의 사진들과
배려 넘치는 사진들
오늘도 잘 보고,,
공부는 나중에 할게요~
머리가 아파서요 ㅋ
뜨거분 여름에 만나요~
감사합니다~^^
왜 아니 반가웠겠수?
걷는 내내 혹시나 저 멀리 따라 오는 모습이 보일까 하고
얼마나 뒤를 돌아 보았었는데..
보이지 않아도 따라 오고 있음에 후미가 든든했었다는...ㅎ
인간은 죽을 때 까지 공부를 한다 지 만...
요즘 열공 하고 있는 테라님에게 화이팅을 외쳐 봅니다
@걷자(서울/강릉) 오~그런데
저 나룻배 추억의 사진을
이제사 봤어요~
노란모자 테라가 있네요
너무 젊은 동그라미홍님도 계시고
낙천진보님,설공주언니두~
추억의 사진
넘 감사해요~^^
걷자님 반가워습니다.
다리가 많이 좋아지신것 같아서 다행입니다.ㅎ
이날은 더 날렵하시고 더 젊어지신것 같아서 보기 좋았습니다.
항상 좋은 정보를 함께 올려주셔서 너무 좋습니다. 덕분에 공부도 하게됩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몇 구간 만에 다시 만나 반가웠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이젠 부상의 흔적과 함께 살아 가야 하나 봅니다.
좋게 봐 주심에 감사 드리고...
바우길을 걸으면서 강릉 역사와 자료를 찾아 보는 게 나름 즐거움으로 다가 옵니다
다음에 또 함께 걸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