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 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 설레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특히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로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고유 전통이 있는데, 한국의 다종교 문화 안에서 생활한 제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곳 문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9월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탄생일입니다. 'Birth-day'(생일)라는 단어 안에 'bir'이 들어가는데, 발음이 비슷한 'ber'로 끝나는 달은 Septem-ber(9월), Octo-ber(10월), Novem-ber(11월), Decem-ber(12월)가 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필리핀에서는 9월부터 이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도 크리스마스 방학ㆍ휴가가 2주일이나 주어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는 듯합니다. 자칫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마스의 가치와 비중이 필리핀 국민들 마음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심방가비
성탄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 이름은 '심방가비'입니다. 12월 16일부터 24일까지 9일 동안 이른 새벽에 신자들이 가까운 성당에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 예식은 필리핀 신앙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톨릭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특히 심방가비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새벽에 주님을 맞이했던 동방박사와 목동들처럼 주님을 맞이하는 신앙인의 신심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심방가비는 타갈로그어로 저녁미사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새벽에 드리는 미사입니다. 그 이유는 필리핀이 농업 중심사회였던 만큼 추수기간 동안 농부들도 성탄을 준비하는 심방가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16세기경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가 공식적으로 9일간 이른 새벽 미사(Novena: 9일기도)를 실시한 데서 유래합니다.
본당에 부임한 직후 심방가비를 맞게 됐는데 인상 깊었습니다. 새벽 2시 즈음,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당 주변이 시끌벅적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성당 마당에 나가 봤습니다. 성당 안과 밖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모든 신자는 심방가비에 참여하는데, 이 기간 동안 각자 간절한 소원을 아기 예수님께 청하면서 미사에 빠지지 않고 참례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미사에 참례하다 보니 성당 주변으로 상인들이 몰려들어 필리핀 전통 음식을 팔기도 합니다.
새벽미사 후 신자들은 아침 요기로 쌀로 만든 전통 떡 '비빙카'(Bibingka)나 '뿌토 붐봉'(putobumbong), '살라밧'(salabat, 생강차) 혹은 핫초코를 마시는데 미사가 끝나고 바로 일터로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거리입니다.
심방가비는 미사 참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모든 가족이 함께하는, 가족 공동체 친교와 화합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심방가비는 필리핀 신자들에게 가족 단결력과 종교적 연대를 돈독히 하는 기회일 뿐 아니라 공동체 일원으로 개개인의 책임감과 도덕성을 자각시키는 촉매제가 됩니다.
필리핀 국내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필리핀 이주민들도 신앙 공동체를 중심으로 심방가비를 거행합니다. 이처럼 심방가비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못지않게 중요한 예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함께 준비
심방가비를 종교행사로만 한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숨겨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한울타리 안에서 수천 명의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 하나 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자체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특히 미사 중에 수천 명이 한목소리로 아마 나민(Ama namin, 주님의 기도)을 노래하는 모습은 경외심을 들게 합니다.
한국 사회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추구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절대적이고 성스러운 영역이라 할지라도 그 도를 넘기곤 합니다.
이런 현실에 비춰볼 때 필리핀의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심방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 독자 여러분들도 가정 혹은 본당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예식과 마음가짐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