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아래서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높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이름 끝자야 蘭이면 어떻고, 淑이나 子면 어떻습니까?
어쨌든 이름이 있는 어떤 여자애와
느티나무 아래에서 말없이 앉아
바다를 바라다본 적이 있습니까?
'짐승처럼'이라는 표현이 조금 거스르기는 해도,
'바다같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요?
마음 속에 일렁이는 잔잔한 설렘과 기쁨,
손목을 잡지 않고 앉아 있는 게 더 어울리겠지요.
어디 강화 석모도의 눈썹바위 아래서
서해의 낙조를 바라다본 적이 있나요?
108계단을 '가위바위보' 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해본 적이 있나요?
첫사랑은 정말 꿈같지요.
그 아련한 추억이라니? 혹시 요람속 느낌이 아닐는지요?
저는 '위대한' 독재자 박정희 소장이 권총에 맞고 죽던 날,
동학사 계곡 오래되고 큰 은행나무 아래서
어느 여자친구의 무릎을 베고
노란 은행잎이 할랑할랑 떨어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계곡에서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비구니 스님들이
바구니에 하나 가득,
똥내 나는 은행알을 씻고 있었지요.
정말로 '작은 짐승'처럼 말없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습니다.
드높은 하늘이 환장하게 청명했었지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당시 한창 유행하던 양희은의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어쩌고 하는 노래도 흥얼거렸던 것같아요.
천하에 없는 음치 주제에,
그것도 여자친구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고는 군대를 가고, 첫사랑은 또 어떻게어떻게 잊혀지고
20 몇 년 후, 그 여자애는 느닷없이 저에게 나타나
재회의 선물(?)을 주고 갔지요.
흐흐.
위 시는 흔히 '목가시인'으로 불리는 신석정 시인의 '작은 짐승'이라는 시입니다.
참 좋죠? 이 가을에 한번쯤 가만가만 낭송하기에 안성맞춤인 것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신석정 시인은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한가하게 목가풍의 시만을 썼던 분이 아닙니다.
현실에 참여하는 저항의 시도 많이 남기셨지요.
이제야 조금씩 부각되어 '신석정 문학상'도 제정되었지만 말입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대표적으로 읊어지고 있으나,
'난초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전주 덕진공원에 그분의 시비가 있지요.
제가 어느 해 중학교(전주 남중)를 등교하는데,
어떤 분이 제 뒤에서 제 사타구니를 꽈악 훔치며
"이놈, 쥐 잡았다" 장난을 치더군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늙수그레하나 헌칠한 키에,
세상에나 그분이 신석정 시인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전주상고 국어선생님으로 계셨다고 하더군요.
장발이었던 게 뚜렷이 기억됩니다.
그래서 제가 대학교때 1년에 한번 깎도록 머리를 길렀을까요?
학생들과 티없이 장난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분의 집에서는
지금도 시누대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제 한번 부안의 '신석정 문학관'을 꼭 가볼 생각입니다.
비전향 장기수 중에 이번에 북으로 송환된 신인영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수기를 보니
마침 이 시가 있었습니다.
신석정 시인이 그분의 당숙이더군요.
신인영씨도 당숙처럼 시인이 되고 싶어했답니다.
세상을 잘못 만나 죽어라고 옥살이만 하고
90대 노모를 떨치고 '사상의 조국'으로 돌아간
그분의 마음 속에도 늘 이 시가 살아 있었던 듯합니다.
끝내 못잊을 첫사랑, '蘭`이란 이름의 여자애가 있었겠지요.
일본 대중소설가로 아주 유명한,
제가 가장 좋아한 작가가 있습니다.
'철도원'이란 이름의 소설과 영화로도 유명한 아사다 지로.
'러브레터'라는 단편소설을 보니,
거기 '蘭'이라는 아주 불행한 중국여성이 나옵니다.
아주아주 찡하고 그럴 듯한 작품입니다.
영화로도 나왔지요.
그 작가의 작품은 모두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인호, 박범신 작가 등에 비견될 듯합니다.
시인 안도현은 이 시를 읽고나서
한마디 한다는 게 이렇습니다.
"부디 연애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 한 편 읽어주지 않은 사내하고는 다시 만나지 말기를,
그리고 서점의 시집코너 앞에서 다리가 저릴 때까지
서 있어 본 적이 없는 여자하고는 당장 절교하기를"
재밌지요?
맞나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추억없는 가난한 이여!
올 가을엔 연애할진저!"
우천<생활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