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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
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 -레이온 모리스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
고별 설교에서 성령에 대해 사용하는 또 다른 명칭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이다. 영어에서 이 용어에 대한 정확한 동일어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라고 음역하기로 한다. 그 헬라어는 “…의 곁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로, 도움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 말은 자주 법정 배경에서 사용되며, 자주 “변호사”라는 의미로 발견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넓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 “방어를 위한 상담자”라고 부를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것을 그에게만 제한할 수 없다. 고소당한 사람을 법정에 와서 변호해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이다. 중요한 점은 그 말이 법정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도움을 주는 어떤 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용어는 고별 설교에서 모두 네 번 나타나는데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의 유일한 이 단어의 출현은 요한일서 2:1로 거기에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배운다. 여기에서 “대언자”라는 단어는 확실히 정확한 용어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를 범하므로 참된 필요를 느낄 때에 아버지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한 변론자로서 직시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그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에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παρακλητος))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17)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으로 적용되지만, 그 안에 그러한 종류의 첫 도움자는 예수시라는 생각의 여지가 남아 있어서, 예수 자신이 그전의 다른 파라클레토스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에게 돌려지는 모든 기능들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말해진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확증된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자들을 가르치시지만(14:26),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며(7:14);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14:17), 예수께서 진리이시며(14:6); 성령께서 제자들 안에 계시는데(14:17),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며(14:20; 참고. 요일 2:24); 성령께서 증거하시는데(15:26) 예수께서도 그와 동일한 일을 하신다(8:14). 둘 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셨으며(15:26; 16:27, 28); 세상은 둘 모두를 다 모른다(14:17; 16:3). 우리는 더 계속해서 말할 수 있지만 요한이 예수와 성령이 “파라클레토스”라는 개념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개념을 신중하게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요한이 보는 것처럼, 성령은 예수의 육체적인 임재가 그의 제자들로부터 떠날 때에 있게 될 신적 임재이다. 우리가 지금 관찰하고 있는 구절은 예수와 성령 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계속적으로 함께하시는 것이다. 던(J. D. G. Dunn)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요한과 역사적 예수 사이에 벌어진 긴 시간과 지속적으로 지체되는 파루시아는 기독교의 각 세대와 그리스도 사이의 지속적인 사이 벌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파라클레토스가 예수와 모든 세대에 걸친 그의 제자 사이를 즉각적으로 연결시키기 때문에 각 세대는 처음 세대나 마지막 세대와 동일하게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 거하시며 내주하신다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서 파라클레토스는 “진리의 영”과 동일시되며(14:16-17), 후에는 “성령”(거룩한 영)과 동일시되어(14:26) 우리에게 강한 도덕적 목적을 지시해준다. 아보트(E. A. Abbott)가 말하는 것처럼 “파라클레토스나 변호사가 강조되는데 일상적인 존재ㅡ좋든 싫든 의뢰인의 목적을 취하여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ㅡ로서가 아니라 거룩한 존재ㅡ이것은 두 번이나 되풀이된다ㅡ로서와 ‘진리의 영’으로서의 강조이다.” 확실히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구절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영을 언급하는 특징적인 방식이 “능력의 영”이나 “지혜로운 영”과 같은 종류의 표현이 아니라 “성령”(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령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는 강한 도덕적 언급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성령을 보내시되(14:26) 가르치시기 위해서 보내시는 이는 아버지시다(참고, 요일 2:27). 이것은 확실히 중요한 기능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므로 각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하셨는가? 아니면 성령께서 교회의 교사들을 인도하심으로 그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신적인 가르침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셨는가? 우리는 너무 날카로운 구별을 두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가르침의 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던 일을 직접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돌린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또한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바를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14:26). 이것은 성령께서 가르치실 가르침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과 완전하게 조화를 이룰 것임을 지적해준다. 우리는 파라클레토스가 구세주의 가르침을 바꾸거나 모순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둘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확실히 제자들이 잊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기억 속에 떠오르게 될 것이다(이것은 요한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바를 고려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가치 있는 진리이다).
가르치는 자로서의 성령에 대한 생각과 관련되어 말해지는 것은 증인으로서의 성령이다(15:26).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며 증거하신다. 요한은 그가 어떻게 이 증거를 수행하시는 지를 설명하시 않지만,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 거하시며 옳은 길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으로 그 일이 수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지도하시므로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충만한 이해에 이르게 되며, 그가 의도한 견고한 위임에 이르게 된다. 이 말씀은 즉시 “너희도 증거하느니라”는 말씀으로 확언해 주는데, 제자들의 증거가 외부의 것이므로 성령의 증거의 한 부분과 같이 나타난다. 그 개념은 아마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서 행하시는 바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게 증거를 형성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방식이다. 이 사상은 우리에게 요한일서를 상기시키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이로서 물과 피와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요일 5:8).
여기에 문제가 있지만, 우리는 가장 좋은 이해로 “물”은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을 언급하며, “피”는 그의 갈보리에서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증거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우리는 성령께서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심을 본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이 그의 독자들에게 영을 시험해 보라고 재촉하며(요일 4:1),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의 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여기에 그는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는 말을 더한다. 확실히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은 가장 심오한 양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파라클레토스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예수의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를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는 점을 강화하며 심지어 예수의 사역 기간에서조차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는 사실을 강화해 준다. 예수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이어지며, 그가 지상에서 떠나자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는 그의 구원 사역이 완성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 구절을 계속해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그리고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파라클레토스를 말한다. 성령의 사역은 일반적으로 신자들과 관련되지만 확실히 이것은 그가 불신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한 부분이다. 또 그의 사역은 일반적으로 돕는 것이었지만 여기에서는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것은 중요한 사역이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쉽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즉 죄인인지를 보는 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를 알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영의 일이 필요하다. 그는 또한 “의”에 대해 책망할 것인데, 그것은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곤핍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가지고 오신 의를 의미한다. 오직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심으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하잘것없는 노력으로 하나님의 시야에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를 못박은 인간 정의의 가공할 한 실패 속에서 의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6:10)라는 말씀을 첨가하시는데, 그것은 십자가와 승천을 지시하시는 것이다. 이 둘 다에서(비록 다른 의미이지만) 예수께서는 그들로부터 분리되실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 가운데 활동하셔서 이 모든 의미를 그들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16:11)고 말씀하신다. 악한 자의 패배는 단지 군사적인 승리일 뿐만 아니라 심판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조명받은 자들 외에게는 명확하지 않다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발생한 일 안에 의가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라는 용어를 비록 “변호를 위한 상담자”라는 제한적인 용어로 보지 않았을지라도 법정적인 배경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그 용어에 더 정확한 의미를 주기 위하여 지금까지 시도된 많은 시도들에 주목해야 한다. 흠정역(The King James Version)에서 그 용어는 “위로자”(Comforter)로 번역되었는데, 그 번역은 그 용어가 사용되는 문맥에 근심을 지시하는 구절들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지지될 수 있다. 즉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14:18);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16:16);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16:20-22).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또한 그 용어를 “위안자”(Consoler)와 같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던 많은 초기의 헬라어 주석자들로부터 지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미는 일반적인 헬라어 용법에 의해서나 또는 헬라어역 구약성경에 의해서도 지지받지 못한다. 데이비스(Davies)가 “위로자”를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 용어의 라틴어적 기원을 신중하게 취하여 con(<콘>, “…과 함께”<with>나 강의어)과 fortis(<포티스>, “강한”)를 “강하게 하는 자”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위로자”라는 말로서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현대의 많은 번역자들은 그 용어를 “도와주는 자”(Helper, 배필)라는 용어로 취한다(예. Goodspeed, GNB). 이것에 대해서는 그 용어 안에서 수동적인 의미를 취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된다(그 용어는 “옆에 모시다”는 의미를 가진다).
법정적인 배경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적절한 번역으로 그 용어를 “변호사”(Advocate) (NEB, Rieu)나 “상담자”(Counselor)(RSV)라는 용어로 취하게 한다. 이것은 “변호사”라는 의미가 확실한 요한일서 2:1의 용법에 의해서 지지되는 것처럼, 문맥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한 몇몇 언급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된다(14:15, 21, 23, 24). 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가 필요하다. 심판 또는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에 어긋나는 것은 변호사는 법관에게 말을 걸며 그의 의뢰인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오히려 그 의뢰인에게 말한다는 것이다(참고. 16:7-11). 만일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말한다면, 그것은 제자들이나 불신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변호사이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복음서에서 파라클레토스의 많은 사역ㅡ예를 들자면 가르치거나 증거하시는 사역이 심판이나 계명을 지키는 것에 실패하는 것과 특별하게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법정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아마 우리는 그 용어가 법정적인 논쟁에서의 한 친구에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변호를 위한 상담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을 “친구”와 같은 번역으로 이끌 것이다(C. K. Williams; 참고. R. Knox, “너의 친구가 될 다른 이”). 그와 같은 번역에 대한 거부는 그 용어가 일반적인 우정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마음속에 법정적인 배경이 있다. 아마 “법정에서의 친구”와 같은 어떤 번역은 우리가 재발견할 수 있는 개념을 제공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떤 좋은 입장도 가지지 않은 죄인들의 친구이시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생각나게 한다거나, 증거해 준다거나,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거나, 그들을 가르치시거나 또는 다른 어떤 행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행위들을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거나, 각각의 경우에서 서로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거나,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 라는 용어를 존속시켜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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