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는데
이유는 키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가 살던 집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렇게 오래 살면서 그곳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서
꼭 한번 가보려고 벼르다가 기회를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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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모습들
왼쪽은 1923년 여권사진, 오른쪽은
부상 당했던 당시의 모습
(images from we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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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라고 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그의 대표작으로 "노인과 바다"를 생각합니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해는 다시 떠오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등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영화로 나왔고
그는 1953년에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 상(Pulitzer Prize for Fiction)을 받았고
1954년에는 노벨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을 받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네번의 결혼, 세번의 이혼, 그리고도 많은 여성편력, 등등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끝내는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1922년 겨울 스위스에서
헤들리와 (image from web) | |
신간 "파리의 아내"책 표지 |
1925년 헤들리와 아들 범비와
슈룬스에서 (image from web) | |
2월 초, 26일에 떠날 플로리다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쯤
"The Paris Wife"라는 2011년에 출간된 폴라 매클레인(Paula McLain)의
장편소설이 이은선님의 번역으로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을 알았습니다.
2월 초에 출간된 신작인지라 한인서점에 없어서 주문을 하고 기다렸는데
마침 여행을 떠나가 전 날 책이 도착하여
여행 중에 읽을 책으로 설레임을 안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책은 당시로는 노처녀로 여겨진 28세의 보수적이고 전 근대적인
헤들리 리차드슨(Elizabeth Hadley Richardson, 1891-1979)이
세계 제 1차 대전 때 이태리의 북부 전선에서 기자로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고향에 돌아와 방황하며 갈등하며 신문기자로, 새내기 작가로 야망에 불 타 있던
8살이나 연하의 20세의 헤밍웨이를 시카고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에 결혼을 하고
신혼의 단꿈을 가지고 파리에 가서 작가의 아내로 내조하며 함께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겪는 여러가지 결혼생활의 이야기들을
헤들리의 입장에서 소설처럼 쓴 책이지만 모든 자료를 통하여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세계 제 1차 대전 후의 파리의 생활상을 알 수 있었는데
헤밍웨이는 세계대전 후 1920년 대의 혼란스러운 파리에서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의 당대의 문학가들인
"위대한 갯츠비, The Great Gatsby"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등과 교제를 통하여
큰 영향을 받으면서 아내 헤들리의 헌신적인 내조로 작가로서 발돋음을 하기 시작하면서도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결국은 아내 헤들리와 친한 친구였던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를 사귀게 됩니다.
파리에서 헤밍웨이와 폴린(1927년)
폴린 파이퍼(1895-1951)는 아이오와 출신으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신문사와 잡지사에 근무하다 파리의 Vogue 잡지사에 근무하기 위해
파리에 와서 헤들리와 헤밍웨이와 친해지게 됩니다.
그들은 여행을 할 때도 폴린과 같이 가기도 했는데
결국 헤밍웨이가 폴린과 사귀는 것을 알게 된 헤들리는
자기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매력적이었던 친구 폴린에 대해 갈등하며 괴로워하면서도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들은 이혼을 하게 되고 (1927년 1월)
부유하고 캐톨릭이었던 폴린과 결혼을 하기 위해 헤밍웨이는 개종을 하였고
같은 해 5월에 결혼을 하고 다음 해(1928년)에 키 웨스트에 와서 살게 됩니다.
헤밍웨이는 외적으로는 낚시도 잘하고 아프리카에서 맹수 사냥을 즐기며
술을 엄청 많이 마셔대는 가장 남자다운 면을 보였지만
헤들리에 의하면 내적으로는 심히 연약하고 불을 끄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안해 하는 성격이었고 죽음을 두려워해서 무척 고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상의 여자들을 좋아했는지
첫번째 아내 헤들리는 8살이나 연상이었고 폴린은 4살 연상이었습니다.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907 Whitehead Street)에 있는 헤밍웨이가 살던 집은
아담한 이층집으로 뒤편에는 별채가 있고 수영장과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이 집은 폴린의 부유한 삼촌(Gus Pfeiffer)이 1931년에 결혼 선물로 사 주었다고 합니다.
1930년대 말에 헤밍웨이는 이 집에 2만불을 들여서 수영장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의 2만불은 지금 싯가로는 25만불이 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이 집에 살면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킬리만자로의 눈" 등을
집필하였는데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기 위해서 함께 갔던
Collier's Weekly의 기자 Martha Gellhorn(1908-1998)을 사귀게 되어서
폴린과도 1940년에 이혼을 하고 3주 뒤에 겔호른과 세번째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폴린은 이혼을 한 후에 1951년에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둘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고...
돈을 많이 들여서 만들었다는 수영장과
잘 가꾸어진 정원. 이름 모를 열대 꽃들이 아름다웠고
옆 마당에 있는 빈 의자를 보니
그가 이곳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궁금해졌습니다.
Hemingway Memorial, Sun Valley, Idaho, 2009 (image from web)
예술가들은 그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다는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평가되고
그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 치르어진 희생에 대해서는
누구도 기억하려들지 않는 것인가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밍웨이는 아내와 이혼할 때마다 명작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첫번재 아내인 해들리 리처드슨과 살 때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1926),
두번째 아내 폴린 파이퍼 때, "무기여 잘 있거라"(1929),
세번째 아내 마르타 겔호른 때,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
네번째 아내 메리 웰시와 결혼 후, "노인과 바다"(1951),
이렇게 아내가 바뀔때마다 걸작을 내 놓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무질서한 생활의 산물인가,
그의 이혼과 여성편력이 걸작을 내 놓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끝내는 엽총으로 자살을 했으니...그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헤밍웨이와 이혼 후 헤들리는 파리에서 Chicago Daily News의 기자인 Paul Mowrer를 만나
사귀다가 아들 범비와 자신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으로 결국 1933년에 결혼을 하여
시카고에 와서 살며 헤들리 이후에도 두번이나 이혼하며 세명의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
미국의 최고의 작가로 떠 오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며 헤밍웨이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헤들리는 네번째 아내 메리 웰시한테서 헤밍웨이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좋아하던 빨간색 가운을 걸치고 가장 아끼던 총을 들어 나가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방아쇠를 당겼다는 자살 소식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은 이미 그에게 그러한 요소가 다분히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헤들리와 살던 때에 헤들리를 위해서 쓴 헤밍웨이의 첫번째 소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의 로열티를
헤들리는 이혼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받았고
이 소설이 영화로 나왔을 때(1957년)도 그 이익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The Paris Wife"의 작가는 이 책을 통하여
첫번째 아내와 살던 시절의 헤밍웨이가 그래도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이었고
당시에는 화려하고 당당하고 오만한 파리의 여인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전 근대적인 여성상을 지녔던 헤들리와의 시절이
비록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로 격변하는 시대에 살면서
오늘날 미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지만
엽총자살로 삶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헤밍웨이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말년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주듯 인생이, 그리고 인생의 모든 목표가
참으로 허무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하는 헤밍웨이의 일생...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가
1828년 9월에 마지막으로 작곡한 실내악
현악 5중주 (String Quintet in C major, D. 956)의 2악장 Adagio입니다.
생전에 자기 집 한채는 물론 피아노도 없어서 친구집을 전전하며
작곡을 하였다는 슈베르트는 이 곡을 1828년 9월에 작곡하고 11월 19일에
비엔나의 어느 추운 다락방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짧은 생을 살았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생전에는
극히 소수의 작품만 초연되거나 출판되었었고
많은 작품들이 다락방이나 책장 속에 방치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이 곡도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가 1853년에야 빛을 보게 되어 출판되었고
생전에는 이곡이 연주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슬픈 곡을 포스팅마다 선곡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슬픔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감성이기 때문인지...
전번 포스팅에서 올린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이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곡인 것처럼
작곡가들도 말년에는 기쁘고 즐거운 곡보다는
슬프고 애절한 곡을 작곡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우리의 인생에서 기쁨보다는 슬픔을 함께 공감하므로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이 치유되기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애절하게 흐르던 멜로디가 격정적으로 치닷다가 다시 조용하게 마무리되면서
슬프고 처절했던 마음이 위로가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