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 동구 동부동 60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울산지역의 고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
동축사(東竺寺)는 573년(진흥왕 34)에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4편 황룡사장육상조(皇龍寺丈六像條)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연기가 전한다.
얼마 후 바다 남쪽에서 큰 배가 와서 하곡현(河曲縣)의 사포(沙浦:지금의 울주 谷浦)에 닿았다. 수색을 해 보니 공문이 있었는데, “서축(西竺)의 아육왕은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 도착하여 장육존상(丈六尊像)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겸하여 1불, 2보살상의 모양을 싣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현사(縣吏)는 상황을 갖추어 임금님께 보고하니, 칙사가 그 현의 깨끗한 땅을 가려 573년(진흥왕 34)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고, 삼존을 맞이하여 모시도록 했다. 그 금과 철은 서울로 보내어 574년 장육존상을 완성했고, …皇龍寺에 안치했다. …장육존상이 완성된 뒤, 동축사의 삼존상 또한 황룡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를 지칭하는 서축(西竺)과 대비되는 이름으로써 동축(東竺)이라 칭한 것은, 당시 신라가 자국의 영토를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대등하다고 여기는 신라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또한 현재의 미포(尾浦)가 당시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동축사가 위치한 지역이 해로를 통한 교역의 전진기지로서 외부로부터 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신라 불교문화의 교역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의 사찰연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한국불교전서(韓國寺刹全書)』에 의하면 927년(경순왕 2)에 중창하고 고려 정종 때(1035~1046) 옥인(玉仁)이 3창하였다고 한다. 1758년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불우(佛宇)」조에 ‘동대산(東大山) 동축사’가 있다 하였고, 18세기 중엽 간행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도 동해안의 함월산(含月山)이라 표기한 곳에 동축암(東竺庵)이 그려져 있어 고려 이후 사세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헌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현재의 동축사가 진흥왕대에 창건된 동축사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1834년에 월송문인(月松門人)이 지은 「동축사(東竺寺)」라는 기록에 의하면, 동축사는 갈료화상(葛撩和尙)이 창건했으며, 1664년과 1684년(康熙 龍靑虎白之年)에 중창되었다가 1834년에 가선 기공(嘉善琪公)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동축사와 갈요화상에 관한 이야기는 1934년 『울산읍지(蔚山邑誌)』 권1 「불우(佛宇)」조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옛날 갈요화상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단(丹)을 수련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근대에 와서 1931년 완성(翫性)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1975년에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시주로 가람을 중수하고 범종각을 신축하였다. 이후 1982년 대웅보전을 신축하고 삼성각을 보수하였고 2004년에 일로향각과 요사채를 증축하였다.
대웅보전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기둥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위에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 건물이다. 창호는 전면을 모두 열어서 달았으며, 어칸은 단정한 4분합문을, 좌우 협칸에는 2분합문을 달았다.
대웅(大雄)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하는데서 유래된 부처님의 덕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 놓은 집을 대웅전이라고 하며,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고도 한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를 이루는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 칠성과 독성, 그리고 산신이 모셔진 이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어칸은 단정한 4분합 빗살문을, 좌우 협칸에는 3분합문을 달았다.보통 사찰에서 칠성과 독성, 산신이 모셔진 건물을 삼성각이라고 하지만, 이곳 동축사의 삼성각에는 중앙의 '고성전(古聖殿)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독성각(獨聖閣), 우측에는 산령사(山靈祠)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범종각 현대의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시주로 건립된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사모지붕.
동축사삼층석탑 (東竺寺三層石塔)"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신라의 전통양식인 중층기단 삼층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된 이 탑의 기단은 면석이 모두 없어져 원래의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퉁이에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지붕돌의 받침은 1·2층은 5단이나 3층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만 얹혀 있는데, 돌의 재질이 탑신부와 다른 사암계통이어서 이 석탑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2005년 현 위치로 옮겨 기단부의 일부 부재를 첨가하여 복원 하였다.
동축사에 전해오는 동지팥죽에 관한 설화
옛날 어느 해 동지팥죽 끓여먹는 동짓날이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아 컴컴한 새벽녘에, 동축암의 한 상좌가 마을 할머니를 찾아왔다. 상좌는 불씨를 꺼트려서 부처님께 공양할 팥죽을 쑬 수 없으니 불씨를 빌려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불씨를 주고, 추운데 내려왔으니 팥죽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면서 부랴부랴 팥죽을 쑤어 상좌에게 대접했다.
며칠이 지나 주지스님이 마을로 내려왔을 때, 그 할머니는 가져간 불씨로 팥죽을 잘 끓여 드셨는지 여쭈었다. 그러나 주지는 그런 일이 없었고, 상좌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여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그 후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염불을 올리던 중, 불단 위에 모셔진 불상을 올려다보니 부처님 뒤에 시립하고 있는 문수보살의 입가에 팥죽이 묻어 있는 것이었다. 주지는 자신들의 정성이 모자라 꺼트린 불씨를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을 시켜 가져오게 한 것임을 깨닫고, 부끄러워 며칠간 밖을 나오지 못했다. 그뒤부터 동축암 부처님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찾아오는 신도들이 크게 늘었으며 울산지역의 고찰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