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정희승 | 날짜 : 09-09-24 12:19 조회 : 1991 |
| | | 서진과 서표
정희승
요즈음 진도가 잘 안 나가는 조금 두꺼운 책을 가까이 두고 산다. 음미할 내용이 많아서다.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행간을 느긋하게 사색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 같은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사소한 불만 하나가 독서하는 내내 불편하게 한다. 오백 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가름끈이 없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제본할 때는 책등 쪽에 끈을 붙여 갈피에 길게 늘어놓아, 독서진도를 파악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주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번거로워 어쩔 수 없이 다른 책에서 서표(書標 : Bookmark)를 빼내서 갈피에 끼워 놓았다. 옥에 티처럼 느껴진다.
사무실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잡다한 서류와 잡무에 시달리다보면 중요한 일을 깜박 잊고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는 법인데 두서없이 허둥대다보면 그런 낭패를 당한다. 이때 도움을 주는 것이 서진(書鎭 : paperweight)이다. 서진은 문진(文鎭)이라고도 하는데, 한지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선조들이 문방사우 다음으로 가까이했던 기물이다. 긴급히 조치할 일이나 중요한 과업 또는 미결업무 등의 문건을 서진으로 눌러두면, 바람에 날릴 소지가 없을 뿐 아니라 잊어버리지 않고 빈틈없이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진과 서표는 모두 진도를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기능은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서진이 귀족이라면 서표는 하급관리라고나 할까? ‘종이를 누른다’는 이름이 암시하듯 서진(書鎭)이 종이 위에 군림하는 영주라면, 서표는 서민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리다.
당연히 서진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무게를 지녀야한다. 그렇다고 외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무게는 서진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요건일 뿐이다. 사자나 독수리와 같은 상은 물론, 나부상(裸婦像)이나 기하학적인 입방체 등 위엄과 품위를 갖춘 모습이라면 어떤 것이든 제한 없이 받아들인다. 또한 자신의 존엄성과 위엄을 높이기 위해 백옥, 비취, 크리스털, 청동 심지어 금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오래 전에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서 서진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투명한 아크릴 원기둥에 푸른 지구모형이 담겨 있는 서진이었는데, 모양이 아름다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처리해야할 현안들 위에 푸른 지구를 올려놓고 야릇한 흥분과 긍지를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시시콜콜한 사안들-당일 처리해야 할 일을 적은 메모, 회의 아젠더, 작성하다 만 보고서, 해외에서 긴급 확인을 해달라는 레터 등- 위에 놓인 서진을 들어 올리다가, 이런 일들이 지구로 눌러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최소한 푸른 지구에 어울리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서진 밑에는 환경 관련 자료들만 놓아두었다. 국제환경심사원 자격을 획득한 것은 그 서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나는 지금도 그 서진의 품위를 최대한 존중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서표는 무엇보다도 얇아야 하므로 외형은 물론 재질까지 심한 제약을 받는다. 종이나 비닐, 또는 알루미늄 등으로 얇고 단순하게 가공한 것이 대종을 이룬다. 선택의 폭이 좁다보니 나뭇잎까지도 일족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서진의 주요 임무는 시급한 일이나 체계가 서지 않는 문건 위에 앉아 완결을 독려하는 것이다. 실천을 강요하는 매혹적인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서진은 철저하게 현안만을 다룬다. 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면 실천하여 완성하거나 완결해야 한다. 서진은 항상 미결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서표가 몸담고 있는 곳은 체계와 계통을 세워 이미 정리해놓은 관념의 세계다. 서표는 그런 세계를 관류(貫流)하면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친절한 안내자다. 실천보다는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도 자신이 속한 세계를 쉽게 초월하지 못한다. 적당한 갈피에 들어 다시 처음부터 관류하기를 꿈꾸며 끝없이 대기한다.
가끔 내 자신이 서표이면서 서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이란 책을 읽어간다는 점에서 보면 나는 서표다. 현재 내 운명의 삼분의 이쯤 되는 갈피에 들어 내 인생을 읽고 있다. 돌이켜보면 행간의 의미까지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고 설렁설렁 읽고 지나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분량이나마 성실하고 꼼꼼하게 읽어나갈 참이다. 지금 시급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내 존재로 누르고 있는 현안을 의식할 때 나는 서진이 된다.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적당히 살아온 것 같다. 그저 태평하게 소일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씩 성실하게 실천하지 않으면, 미결만 쌓아두고 내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선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고 신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라. 온몸으로 누르고 있는, 실천해야 할 중요한 현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한다.
<문예비전 2009.9-10> |
| 임재문 | 09-09-24 19:07 |  | 정희승 선생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시죠? 이가을에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뵙기로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이 가을 좋은 결실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 | 정희승 | 09-09-25 15:41 |  | 네, 잘 있습니다. 요즈음 이빨을 치료하러 치과에 다니느라 하는 일 없이 바쁩니다. 큰 공사를 벌였더니 다음 달에나 끝날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로 불편하군요. 10월에 모임이 있지요. 그때 뵙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
| | 이희순 | 09-09-24 20:13 |  | 아무렇지도 않은 서진과 서표 하나에도 선생님의 사유와 성찰이 스며들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제 인생의 서진은 적어도 네 개가 있어 구겨진 화선지의 주름을 펴줄만한 무게이면 좋겠습니다. | |
| | 정희승 | 09-09-25 15:48 |  | 오래 전부터 서예를 연마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진은 늘 가까이 두고 사시겠군요. 서예하시는 분들이 쓰는 문진은 자처럼 조금 길더군요. 그것으로 종이를 펴기도 하고 종이를 고정하려고 한 귀퉁이에 지질러 놓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 작품 많이 쓰십시요. 문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쓰셔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 |
| | 임병식 | 09-09-24 20:26 |  | 저는 서진이라는 말보다는 문진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저는 돌을 좋아해서 검은 오석으로 문진을 쓰고 있지요. 문진과 책갈피를 생각하면 옛날 책을 보던 회수를 표시한 서산이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 |
| | 정희승 | 09-09-25 15:55 |  | 저도 문진이란 말을 더 좋아합니다. 단진 서표와 조응관계 때문에 그렇게 썼습니다. 오석은 문진으로 그만이겠군요. 무게도 있고 검은빛이니 흰 종이와 어울려 그윽한 운치도 자아낼 것 같고. 애석가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군요. 서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대부분 빨리 많이 읽는 데 치중하기 때문에 서산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몇 해전에 장석주 산문집을 읽다가 장자를 기백 번 읽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의 글에는 노자, 장자에서 따온 문구가 참 많았습니다. 고전이 아니면 서산이 거의 필요가 없지요. | |
| | 한동희 | 09-09-24 23:30 |  | 저는 서표는 자주 쓰고 있지만, 서진은 별로 쓰지 않고 있는데, 선생님 글을 읽고나니 서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서표와 서진을 인생에 비유한 사유의 깊이를 보며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좋은글 감상하고 갑니다. | |
| | 정희승 | 09-09-25 16:02 |  | 저도 요즈음은 서진을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일기를 차분하고 꼼꼼하게 쓰고 있는 터라 별도 일정관리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요즈음 나오는 책들은 엷은 책도 거의 가름끈이 있더군요. 잉크를 찍어 펜으로 글을 쓰던 시절에는 서진이 필요했지요. 종이가 날리지 않도록 눌러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세상이니 화선지에 그림이나 글씨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거의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
| | 최복희 | 09-09-25 06:49 |  | 이른 아침 참 좋은 글을 읽게 되어 하루가 행복할 것 같습니다. '서진과 서표' 를 사용하면서도 단순하게 편리하다는 것만 생각했던 나의 좁고 얕은 사유가 부끄럽네요. 작은것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인생의 깊이까지 유추하게 하는 정희승 선생님의 작가 정신에 존경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정희승 | 09-09-25 16:10 |  |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잘 계시지요? 요즈음 날씨가 참 좋습니다. 독서하기에는 그만입니다. 어제 밤에 약 1시간 동안 걸었는데, 살갗에 와 닿는 삽상한 가운이 참 좋았습니다.
서진, 서표 두 가지가 번갈아 가며 서술되어 다소 산만한 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좋게 읽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 |
| | 김창식 | 09-09-25 21:55 |  | 저는 얼핏 제목만 보고 서진과 서표가 일란성 쌍둥이인 줄알았습니다... 아닌가 했었는데 읽고보니 제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는...^^ 정 선생님의 사유와 성찰이 가득한 수필 잘 읽었습니다. | |
| | 정희승 | 09-09-27 13:50 |  | 이란성 쌍둥이 같습니다. ㅎㅎ 감사드립니다. 곧 추석 연휴군요. 아무튼 가족과 따뜻한 한가위 맞으시기를 빌겟습니다. | |
| | 박영보 | 09-09-26 01:44 |  | 정선생님의 글을 읽어가면서도 <서진/문진>이나 <서표>라는 말의 뜻을 알 수도 있었지만 확실을 기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 봐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는 것은 제 무식을 자랑한다거나 책 읽기와 거리가 그만큼 멀었다는 부끄러움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 몰염치한 꼴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Bookmark나 Paperweight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오기도 했었지만 선생님의 글이 아니었다면 그런 단어를 접할 기회가 영원히 없을 뻔 했습니다. 얼핏 아주 작은 일일 것 같지만 글을 쓰시는 분들은 어느것 하나 그냥 지나치여 버리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점을 배우고 싶습니다. | |
| | 정희승 | 09-09-27 14:04 |  | 이국에 오래 계셔서 우리말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음에도 아름다운 우리말로 수필을 쓰고 계시니 그저 그 치열함에 감탄할 뿐입니다. 우리말도 영어와 같이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보면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글이 너무 훌륭한 데다 일본과 달리 한자 혼용를 하지 않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글 내용 중 서표는 흔히 말하는 '책갈피'를 의미합니다. 언중(言衆)은 대부분 책갈피라는 말을 씁니다. 이처럼 대다수가 쓰는 경우에는 표준말로 사전에 올리는 게 상례입니다. 그러나 책갈피라는 말은 '책장과 책장 사이'라는 본연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표준말로 오르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입장에서 보면 고약한 구석이 있는 단어입니다. 요즈음 우리말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신 듯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니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 |
| | 박원명화 | 09-09-26 11:48 |  | 정희승 선생님을 글을 보면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습니다. 그 많은 상식, 그 알찬 언어들이 어디에서 쏟아져 나오나 하였더니, 역시 다독의 결실에 있었나 보네요. 우리가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독서의 계절이 왔으니 많이 읽어야 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해주시어 고맙습니다. | |
| | 정희승 | 09-09-27 14:09 |  | 사무국장님, 감사드립니다. 짐작과 달리 저는 늘 독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요즈음 날씨가 독서하기에는 그만입니다. 잘 익은 사과 같은 양서를 많이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곧 추석이네요. 웃음과 기쁨이 넘쳐나는 즐거운 한가위 맞으세요. | |
| | 정진철 | 09-09-28 09:39 |  | 저는 중국 무협지를 다독했던 시절이 생각나서 무협지에 나오는 형제로 생각했습니다 ㅎㅎ 처음에는 저 두사람이 무슨 독창적인 무예를 만들어서 무림 고수들을 모두 쓸어 뜨리고 드디어 중원을 통일 했는가 생각 했네요~ ㅎㅎㅎ 아무쪼록 좋은 연구 많이 하시고 좋은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 |
| | 정희승 | 09-09-29 12:26 |  | ㅎㅎ 서표가 은자라면 서진은 강호 고수쯤 되겠군요. 아무튼 둘다 쇠로 된 게 많으니 철기시대 인물일 공산이 큽니다. 서진에 쓰인 '누를 진(鎭)' 은 어원으로 보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형성되었는데 쇠(金)가 동(銅) 보다 우월하다, 그래서 누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추석 잘 쇠세요. | |
| | 민문자 | 09-09-28 13:21 |  | 오랫만에 격조 높은 수필 감상 잘 했습니다. 이 쪽에 자주 찾아와야 하는데, 항상 뒤처져 마음만 갈급합니다. 좀더 부지런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정희승 | 09-09-29 12:42 |  | 시를 쓰고 계시지요? 정공채선생님을 사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책을 내고 나면 한동안 글이 손에 잡히지 않지요. 아무튼 바쁘신가 봅니다. 추석 잘 쇠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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