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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이 의도적으로 관점을 어긋나게 한 것은 그가 정말로 그리고자 한 것이 순간의 인상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잔이 생각할 때 그림에 존재하는 화가의 단일한 시선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구성적 측면에서의 사물의 형태였다.
그래서 세잔의 그림에서는 다른 측면에서 관측된 대상들이 동시에 하나의 화폭에 그려진 것이다.
세잔의 이러한 선구적인 작업은 후에 현대 입체파와 추상미술을 탄생하게 함으로써 현대 미술이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1. 개요
19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화가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화가이다.[1]
2. 생애
1839년 프랑스 남쪽 끝에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가 루이 오귀스트 세잔과 미혼녀 엘리자베드 오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기숙사 국민학교 생조제프를 나온 후 고등학교 부르봉을 다니면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친구로 사귀게 된다. 후에 졸라가 쓴 소설 <작품>[2]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실패한 화가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오해해 절교한다. 그래도, 늘그막에 졸라와 화해하고 그가 죽을 때 장례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졸업 후 인근에 사는 화가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성적인 반대로 포기를 하였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했으나, 졸라의 권유와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설득으로, 다시 미술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서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시험에 떨어진 후, 혼자서 독학을 했다. 파리에서 기오망·피사로·모네·드가·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였다. 그동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도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여러 번 시골에 내려가 있기도 하였다.
1882년 대망의 관전(官展)에 입선하고 1895년 개인전을 개최하여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비록 살아 생전에 그림이 비싸게 팔리지 않아도 좋은 평을 받으며 그럭저럭 팔려 화가로서 가난함을 오래 겪지 않았다.
3. 작품 세계
그의 그림은 처음 1870년경에는 어둡고 격정적인 상태를 에로틱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었으나, 카미유 피사로의 외광 묘사에 자극을 받은 후 화면이 급속히 밝고 단순화되어 갔다. 그러나 살롱에 출품한 작품들이 낙선함으로써 인상파에서 떠나, 모네의 견실성을 뼈대로 한 형과 색깔의 과묵한 표현에 집중, 긴밀한 구성을 갖는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그는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고 말하고 정확한 묘사를 하기 위해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상파의 사실주의를 추진시켜 단순한 시각적·현상적 사실에서 다시 근본적인 물체의 파악, 즉 자연의 형태가 숨기고 있는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사물에 내재된 구, 원뿔, 원기둥을 추구하는 화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사물의 가장 단순한 형태를 추구하는 화가였다. 특히 그는 구의 원형을 사과로 택했음이 분명하다. 사과를 그린 그림이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 그것도 그림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잔뜩 그렸다. 세잔의 이런 접근법은 후대에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근본적인 물체의 질서를 파악하고 표현하려는 시도 때문에 미학이나 철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가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를 20세기 미술사에 등장한 입체파의 시조로 평가하기도 한다.
대표 작품으로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3], 《목욕하는 여인》, 《아버지의 초상》, 《여자와 커피포트》, 《프로방스의 산》, 《에스타크의 바위》, 《생트빅투아르 산》 등이 있다.
영감 한스푼 세잔1
오늘의 ‘영감한스푼 클래식’은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준 작가 폴 세잔의 시대로 떠나보겠습니다.
‘세잔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미술을 알 수 없다’고들 하죠. 세잔의 그림이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고, 피카소로 가능했던 이후의 수많은 새로운 시도들도 연결고리를 잃게 됩니다.
그럼에도 세잔의 그림은 한 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도 그의 그림을 처음에는 머리로만 이해했고, 작품의 시각적 언어를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그림을 본 경험이 많지 않았기도 했고, 그림에 관한 설명도 복잡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잔의 그림을 최대한 쉽고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레터를 준비해보았습니다. 오늘 레터를 찬찬히 살펴보신다면, 앞으로 이야기 할 현대미술도 좀 더 쉽게 접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 19세기 말 프랑스와 유럽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산을 마주하다 죽고 싶었던 화가
1906년 10월 어느 날. 67살 화가 폴 세잔은 그날도 늘 그랬듯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몰아쳤고, 화가는 급히 짐을 챙겨 이동합니다. 그러나 나이든 화가가 화구와 캔버스, 이젤을 들고 가기에 비바람은 너무 거셌습니다. 집으로 향하던 화가는 결국 길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쓰러진 그를 세탁소 사장이 발견해 마차에 싣고 집으로 데려옵니다. 화가를 진찰한 의사는 감기에 걸렸을 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그를 안심시킵니다. 다음날 화가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다시 심하게 앓게 된 화가는 이후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납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살던 세잔은 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화가가 바라는 것이었답니다. 세잔은 프랑스어로 ‘대상을 마주하다가’(sur le motif)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이 ‘Sur le motif’라는 프랑스어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모델이나 과거의 그림이 아닌 실제 풍경과 생활 속 인물을 보고 그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즉 내가 그릴 대상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고 관찰하는 것이 내 생의 전부이자, 그것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미였죠. 그의 바람은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년의 화가가 이렇게 야외를 고집하며 천착한 주제는 바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찾았던 ‘생트빅투아르산’입니다. 세잔은 1870년대부터 말년까지 생트빅투아르산을 주제로 회화 36점, 수채화 45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렁이는 마음의 산을 그리다
그럼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치 조각천을 짜깁기한 ‘패치워크’처럼 색면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산의 지형도 그렇고, 산 아래 마을의 집과 나무도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색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죠. 빅투아르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비교하면 그림의 특징이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진이 순간의 빛을 포착해 반사되는 작은 입자까지 남겼다고 한다면, 세잔의 그림은 풍경을 좀 더 몽글몽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진은 찍히는 순간이 얼어붙은 느낌을 주는데 반해, 세잔의 그림은 산과 나무와 집들이 서로 부딪치는 색깔로 이뤄져 일렁이며 진동하는 느낌을 자아냅니다. 산이 보이는 풍경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묘하게도 사진이 아닌 그림이죠.
세잔을 존경했던 후배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그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잔의 방식은 보통과 완전히 다르며 복합적이다. 그는 그림자 한 면으로 시작해, 두 번째면, 세 번째 면을 쌓아 올렸다. 그러면 색깔들이 서로 매달려 대상의 색뿐 아니라 형태도 드러냈다. 작품의 방향은 조화의 법칙에 따라 정해졌고, 전체 그림은 이미 세잔의 마음 속에 완성되어 있었다는 걸 알수 있었다. 그는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장인이 그랬을 것처럼, 연관된 색들이 서로 이어지도록 그리다가 어느 순간 반대되는 색이 맞물리도록 했다.”
다른 그림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위로 솟아오르는 나무와 수평선으로 휘몰아치는 나뭇가지,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산세와 지그재그 모양으로 펼쳐진 마을이 생동감을 자아냅니다. 자세히 보시면 나무의 기둥과 가지가 자아내는 수평 수직선이 산과 마을에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반복되며 리듬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몇 가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될 듯합니다.
이런 비슷한 모양의 모티프들이 마치 음악처럼 반복되면서 서로 상응하고, 그러면서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 방식이 혁신적인 이유는, 풍경을 단순히 사진처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화가가 한 인간으로서 눈으로 보고 ‘이해’한 바를 그림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해’라는 부분이 중요한데요. 우리가 무언가를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단순히 사진기가 광학적으로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세잔이 산을 그릴 때, 아카데미 화가가 사용하는 원근법이나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표현 방식에만 집중한 것과 달리,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와 함께 뛰어 놀았던 산의 기억,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주는 심상과 같은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어릴 적 세잔은 절친이었던 소설가 에밀 졸라와 함께 오래도록 걸으며 이야기하고, 생트빅투아르산으로 들어가 계곡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의 진실’을 찾고 싶어 했던 소년들은 속물적 세상을 벗어나 자연에서 스스로에게 집중했던 것이죠. 졸라의 소설 ‘작품’에는 이런 시간들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도 등장합니다.
“무의식 중에 느낀 친밀감과 희미하게 느껴지는 야망, 높은 지성을 향한 깨달음이 세 친구를 묶어 주었다. … 친구들은 아직 초등학생이었지만 오랜 시간 산책하기를 즐겼다. 학교가 일찍 파하면 몇 마일씩을 걸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교외로 가 며칠 동안 집 밖을 다니기도 했다.
이들은 나무와 언덕, 시냇물에 대한 동경을 가졌고, 홀로 자유로워지는 것의 무한한 기쁨을 알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소위 말하는 ‘세계’로부터 탈출구를 찾았고 본능적으로 자연의 품으로 향했다. … 계곡 깊은 곳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고, 하루종일 옷을 입지 않은 채 뜨거운 모래 위에 누웠다가 다시 물로 뛰어들면서 수초를 잡고 장어를 쫓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어린 시절의 나를 품어준 산, 넓게는 땅의 역사를 담고 있는 산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사진으로는 역부족이겠죠. 세잔은 어떤 나무는 크게 그리고 또 어떤 길은 임의로 숨기거나 드러내면서 조정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순간포착한 사진과 달리, 세잔이 눈과 마음으로 보았던 산을 우리는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영감 한스푼 세잔2
폴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과
혼돈 속에서 열린 20세기②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지난주에는 세잔이 어떤 방식으로 ‘마음의 산’을 표현했는지 알아보았는데요, 오늘은 이런 세잔의 예술이 어떤 시대적 맥락에서 탄생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살면서 믿었던 무언가가 무너졌을 때,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을 때. 사람은 엄청난 혼란과 불안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다음은 좌절, 분노, 허탈함, 고통과 같은 감정이 밀려오죠. 이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혼란은 덫처럼 나를 옭아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럴 때 현명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행운이 찾아와 모든 것이 마법처럼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거나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하면 해결이 이뤄진다고 믿기도 합니다. 과거 사람들은 신에게 무언가를 바쳐서 노여움을 달래면 혼란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도 했죠.
그러나 가장 정확한 길은 나 자신을 돌아보고 거기서 해결책을 찾는 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에는 심리 상담이나 명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세잔의 산이 탄생한 이유를 살펴보기로 했는데, 왜 혼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세잔이 ‘마음의 산’을 그린 이유도 그가 살던 19세기 말 프랑스와 유럽이 그러한 혼란기였기 때문입니다.
신(神)도 왕(王)도 무너진 세계
폴 세잔은 1839년 프랑스 액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1906년까지 살았습니다. 자수성가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던 세잔은 성인이 되고 난 뒤 파리에 잠시 머물다 말년엔 줄곧 액상프로방스에 머물렀죠. 두문불출하며 그림만 그린 괴짜 캐릭터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유럽은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격동기였습니다.
이 격동기를 설명하는 사건을 크게 세 가지로 꼽아볼 수 있습니다. 1️⃣ 고대 문명의 발견, 2️⃣ ‘종의 기원’ 출간, 3️⃣ ‘1848년 혁명’입니다.
먼저 고대 문명의 발견은 유럽의 제국들이 식민지를 개척하며 가능해졌죠. 이. 때 많은 문화재들이 유럽으로 약탈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럽 밖 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의 아주 오래 전 화려한 문화는 유럽인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화가 제롬의 그림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를 보면 그 의미를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상 앞에 말을 탄 나폴레옹이 서있습니다. 그런데 스핑크스의 코가 뭉개져있죠. 이렇게 코를 뭉개서라도 나폴레옹을 돋보이게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열등감을 느꼈음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우리 제국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아프리카 대륙에 이런 훌륭한 문화가 있었네…’라는 것을 마음 속으로는 느꼈던 것이죠.
고대 문명의 발견이 제국 문화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면, 둘째 ‘종의 기원’ 출간은 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최초로 설명한 이 책은 인류가 영장류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예전까지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내용입니다.
이런 가운데 1848년 유럽 여러 도시에서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신과 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나의 방식으로 세계를 살겠다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진 것이죠.
지금은 2-3년 만에도 많은 것들이 변하지만, 이 때 유럽은 종교와 제국이 몇 백년의 체제를 유지해왔던 상황입니다. 혼란의 정도가 지금의 시각으로 감안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겠죠. 이런 가운데 세잔은 파리를 벗어나 고향의 산으로 향합니다.
산에 비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세잔은 후배 화가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식 살롱이 열등한 이유는 그들이 널리 인정받은 방법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적인 감정, 관찰, 특징을 더 드러내야 한다. 루브르는 배우기 위해 읽는 책이지, 과거의 일러스트적인 작가들이 따랐던 방법을 흉내내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자연을 공부하고, 과거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며, 각자의 성격에 맞는 표현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시간과 생각을 들이고, 점차 시각을 다져 나가면 마지막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인상깊은 대목은 ‘과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과, ‘개인적인 특징’을 더 드러내야 한다는 발언입니다. 여기서 해방되어야 할 과거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과거의 인간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어떤 영지에 소속돼 평생 주어진 노동만을 하거나, 신의 뜻을 지키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도 왕도 없어진 세계에서는 ‘자아’와 ‘주체’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죠. 과거 화가들은 종교나 역사만을 그려야 했는데, 이 때 비로소 중산층의 일상을 그리거나 나의 눈으로 본 풍경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즉 세잔이 매일 산을 마주하며 그리려고 했던 것은, 과거로부터 해방된 온전한 자신, ‘세잔만의 산’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 시점에서 미술은 철학보다 더 앞서서 시대를 증언하며, ‘현대미술’의 서막이 오르게 됩니다. 세잔이 과거로부터 벗어나 ‘나의 눈’으로 직관하려고 했던 것은 곧 20세기 등장한 철학 ‘현상학’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현상학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견해를 통해 사람의 의식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즉 ‘사과’라는 개념이 있을 때 과거에는 이것을 ‘사과나무의 열매’라고 일괄적으로 규정했다면, 현상학에서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느끼는 바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연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판단중지’ 개념이 나옵니다. 철학자 에드문드 후설은 사물을 볼 때 우리가 그간 주입 받았던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우선 모든 판단을 중지하라고 말합니다. 즉 과거에 규정했던 사과의 의미를 덜어내고, 내 눈 앞에 사과가 어떻게 보이는지 집중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이죠. 세잔이 과거에서 해방되어 ‘개인의 산’을 보라고 후배 화가에게 조언한 것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혼란한 시대, 세잔이 산을 찾은 이유는 결국 모든 관념을 벗겨낸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산을 보다 죽겠다는 결심까지 하면서 평생 산에 비친 자신을 갈고 닦은 세잔의 예술은 현대 미술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세잔을 모르면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 이제는 공감이 되시겠죠?
이는 풍경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이해’한 바를 그림으로 풀어놓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단순히 사진기가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내 마음과 생각이 반영됩니다. 이를테면 사과를 본다고 할 때 카메라는 빨간색과 형태만을 인식하지만, 사람은 맛과 향은 물론 그것의 상징까지 떠올린다는 것이죠.
세잔에게 산은 어린 시절의 나를 품어준 곳이자 오랜 시간 쌓여온 땅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입니다. 이것을 담기 위해 어떤 나무는 크게 그리고 또 어떤 길은 임의로 숨기거나 드러내며 조정 과정을 거칩니다. 그 결과 세잔이 렌즈가 아닌 ‘마음의 창(눈)’으로 보았던 산을 우리는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잔의 그림은 어떤 맥락에서 탄생한 것일까요?
세잔은 혼란 속에서 산을 마주하며 선문답을 하듯,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생을 완성하기로 합니다. ‘대상을 마주한 채’ 죽기로 결심하면서 말이죠. 결국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술은 ‘개인의 눈’을 표현해 자아의 탄생을 예고하며 불멸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성이 지배하는 계몽기가 막바지에 이
를 무렵,모더니즘이 득세한 20세기와 이어지는
고리이기도 했다.
세잔은 원근법을 포기하는 대신 진실을 손에 넣었다
쇠라처럼 색채론에 열광한 세잔은 대상의 색채,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 비추면서 상호보완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고민했다.
기존의 원근법에서 벗어나 그림의 전체의도를 중시하고 양안시를 활용하는 방법은 입체파, 미래주의, 구조주의, 그리고 마티스로 대표되는 장식미술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연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보이는 것의 핵심을 간파하고 가능한 논리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로서 할 일이라 생각했다.
세잔은 땅과 건물, 나무, 산, 심지어 인물까지도 기하학적 형태로 생략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세잔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문을 밀고 있었다.
• 격자구조를 비롯해 세부를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시키는 그의 생각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바우하우스의 각진 디자인, 몬드리안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과하나로 예술계를 바꿔놓았던 화가 오늘은 폴
세잔입니다. 한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게
되는데요. 왜 폴세잔을 근대회화의 아버지라 부르
는지 궁금하셨지요? 고흐보다 유명하지않고 익숙
하지않을수도 있는데 왜 세잔을 근대,현대회화
의 아버지라 부르는걸까..
세잔은 어려서부터 어디에 속해있는 적응을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죠..아버지는 그가 법관이 되길
바랬지만 그런아들을 인정하고 그림을 그릴수 있
게 파리로 보내주고 지원을 해줍니다.
그렇게 23살에 파리로 가게된 폴세잔은 고갱에게
도 은인이었던 평생 정신적 지주가되는 피사로를
만나게 됩니다. 피사로는 세잔과 많은 대화를 하
고 그림도 그리며 세잔의 재능을 보게 되지요. 뭐
든 잘하던게 없었던 세잔은 그나마 가장 좋아했던
그림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해준 피사로를 평생 아
버지처럼 따랐다고 하네요
인상파를 이끌었던 피사로의 입김으로 세잔도 인
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립니다. 기억나시나
요? 이시대는 아직도 고전주의 영향이 커서 인상
파가 주목받지 못할때였습니다. 아돌프 부게
로에게 그리다만 그림을 그림이라고!!
하는 조롱을 들었던 세잔이잖아요?
맞습니다. 사실 세잔은 그런 조롱을 가볍게 넘기
지않았어요. 사실 인상주의라 말은 해도 속으로는
스스로도 뭔가 풀리지않는 것이 있었거든요. 빛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달라지는 색채를 표현하는것
또한 자연 현상아닌가??
아돌프부게로의 조롱은 세잔에게 어쩌면 평생의
숙제를 내준셈이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폴세잔이 오늘날 어떻게 현대미술의
아버지되었던것일까요...
왜 폴세잔의 사과정물화가 유명한걸까
요?
그림 먼저 보시겠습니다
그럼 다시 또 폴세잔의 다른 사과정물화 보시겠습
니다. 어떤가요...뭔가 쏟아질것같고 뒤에있는 바
구니가 너무 큰것같고...뒤에갈수록 원근법이 적
용되어야하느데 그렇지않아보입니다....
사실 첫눈에 볼때 누가 그런거 생각하고 보나요?
보기에 좋은면 좋은그림이죠..
근데 세잔의 그림은 뭔가 터치도 형태도 불안정하
고 미완성느낌도 나면서...
달랐습니다. 그래서 인정을 못받았다는 이야기죠.
이때까지만해도요!!
훗날 이 사과그림은 현대미술사를 바꾸게되
는!!! 엄청난 불씨였다는걸!!!세잔은 알고있었
을까요?
세잔이 보기엔 그렇게 뛰어난 마네도, 모네도, 고
흐도, 고갱도.․감각적인 터치로 그리고 색을쓰고
있지만 고전주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것
이 세잔의 의문이었습니다 ...고갱도 같은고민을
했지요? 고갱은 이미 세잔의 그림에 충격을 받습
니다. 그래서 고갱의 스타일도 세잔과는 다르지만
인상파에서 머루른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암튼
그래서 세잔은 미술에 위대한발견이었던 원근법
을 과감하게 버립니다! 원래 도화지 하나에 원근
법 한군데 기준을 정해놓고(소실점이라고 하죠?)
그림을 그리는데 세잔은 자기 시선이 가는곳이 가
장 가깝다 생각한거여요!! 자기 시선이 머무는곳
에 소실점을 두고 그리고 다그리면 다시 소실점 옮
기고!!!! 와!!어떻게 그런생각을 했을까요??? 놀
랍고 경이롭기까지해 벅찹니다.. 원근법은 상식이
고 진리고 관념이었을텐데 ...고정관념강하고 고
지식한 제머리좀 파괴하고싶어지네요 ㅋ
요점을 정리하자면 세잔이 왜 현대미술의 선구자이냐!! 인데요.
세잔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려고했던 고전주의
나 인상파의 빛에 따라 달라보이는 재현에서 벗어
나 원근법을 파괴했다는점..형태의 덩어리..다시
말해 기초적인 대상들로 봤다는 것인데요.원추,
원통, 구로 이루어져있다고 본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나중에 큐비즘으로 연결이 됩니다.큐비즘
이뭐냐면 입체적인거죠? 맞습니다 피카소가
탄생하지요..큐비즘은 또 추상파로 발전하게되
구요.
자기 시선이 가는 곳이 소실점이 되어 한 그림안에
여러개의 소실점이 있었으니 그림이 편안해 보이
진 않았지요 하나였던 소실점 무시하면서 무슨얘
기냐면 대상을 그대로 재현해야되었던 의무에서
해방되는? 일그러뜨려도 회화가 될수있다는... 세
잔의 이런 혁명적인 시도는 나중에 세잔의 영향
을 받은 마티스의 야수파를 탄생시킵니다.
이때 사진기의 출현으로 우왕좌왕하면서 여러개
의 화파로 나눠지고 있을때 입체파, 야수파 탄생
에 영향을 준 세잔이기때문에 근대,현대미술의 선
구자(아버지)라 하는것이지요.
이 두 미술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이 지금까지 화려
하게 꽃을 피우게 되니까요!!
현대미술의 아버지, 폴세잔의 생애와 그림
입체파의 아버지 현대미술의 아버지, 폴세잔의 생애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폴 세잔(Paul Cez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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