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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9 / 살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 (창17:1-7)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무학대사와 환담하는 자리에서 농담 삼아 ‘내가 보기에 대사는 돼지와 닮았구려.’라고 하자 무학대사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기를 ‘제가 뵙기에 폐하께서는 부처님을 닮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아해진 이성계가 왜 자신을 부처 같다고 하느냐고 묻자, 무학대사는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후 이 얘기는 개인의 주관적인 시각과 편견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주변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면만을 보게 된다는 교훈을 할 때면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부처가 성인인 것은 인정하여 부처는 그렇다 쳐도 보통 사람인 우린 어떨까요?
모든 걸 좋게만 본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좋기만 할까요?
살면서 알게 된 것이 세상과 현실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라고 하는 것 외에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 있습니다.
‘모든 걸 믿음적으로 보자!’
이게 긍정적인 시각을 넘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시각입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린 지금 내게서 되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라고 했다면 같은 논리로 믿는 사람의 눈엔 하나님만 보이는 게 법입니다. 따라서 매사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볼 수 있는 것. 이게 인생을 믿음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나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해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보면 본문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굳이 아브람의 나이를 언급하며 얘기를 시작하는 데에는 뭔가 의도한 바가 있어서가 아닐까요?
본문 1절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해서 16:16절을 보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고 했습니다.
16장 마지막을 아브람의 나이로 끝맺더니 17장 시작도 아브람의 나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은 아브람이었지만 한가지, 정말 원했던 복을 받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자식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고 기다려도 자식이 없던 어느 날 아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선 ‘축첩제도’란 게 실행되고 있었는데, 종은 주인 재산의 일부였기에 종이 주인에게서 낳은 자식도 당연히 주인의 것이 된다는 제도를 이용하자는 겁니다.
이에 아브람도 응했고 그렇게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인데,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팔십육 세였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본 장으로 넘어오며 아브람의 나이가 구십구 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6;16절과 17:1절을 이어보면 딱 한 절 차이인데도 내용은 무려 십삼 년의 나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십삼 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신학적으로는 이 십삼 년의 기간을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브람을 향해 그 긴 시간 동안을 침묵하신 걸까요?
이미 배워서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복을 주시되 강제로 역사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 때 이미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너에겐 네가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라고 선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십니다. 내가 하겠다면 내가 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그런데 16장에 오기까지 아브람이 원한 게 무엇이었습니까?
‘자식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누가요?
아브람 곧 ‘내가’.
그렇게 해서 아브람은 자신이 원한대로 자식을 얻고자 해서 후처를 들였고 그토록 원했던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내용상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아브람의 상황을 믿음적인 시각으로 보면 어떨까요?
아브람이 원했던 자식을 제 능력과 방법으로 얻고 보니 이후로는 아브람에게 자식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하실 일이 없어졌습니다.
아브람이 원했던 것도 해결됐고, 하나님이 해 주실 일도 없어졌고,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십삼 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 장으로 넘어오며 느닷없이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 때에 라고 하며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사실 창세기 17장을 읽거나 가르칠 때면 아브람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느라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갈의 존재입니다.
하갈인들 원해서 종이 되진 않았을 겁니다. 설사 종이었다 해도 처녀로서 원하던 남편감이 있었을 거고, 결혼에 대한 꿈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졸지에 씨받이가 됐고, 열 달 품어 배 아파 낳은 자식마저 내 자식이 아니게 돼버렸으며, 본부인과의 갈등으로 급기야는 임신한 몸으로 집에서 도망 나와야 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브람이나 사라는 생각했겠지요. 결과적으로 자식을 얻는다면 과정이 어떠하든 원한 대로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고.
그러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좋자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과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기에 우리에게서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과연 아브람과 하갈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요?
창세기 16:11절 말씀을 보면 광야에서 고통받는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린 하나님은 이미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갈의 고통을 보신 하나님께서 하갈을 위해 하갈에게 주신 하갈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에 창세기 16:13절을 보면 하갈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하갈 역시도 하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아브람 못지않게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모두가 아브람만 주목하던 그때에도 하나님만은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 그러나 인생의 실질적인 피해자인 하갈을 살피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과 하갈 사이에서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은 철저히 하갈 편이셨습니다. 그랬기에 하갈이 낳은 아이를 하갈의 아들로 인정하시고 그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혹여라도 하나님은 나는 살피지 않으시나 보다 라던지, 하나님은 내겐 관심이 없으신가 보다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이젠 그 오해들을 푸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만 조명을 받는다 생각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원치 않는 인생을 살게 된 하갈을 살피시고 찾아가셨듯이 남들 다 복 받는 데 나만 못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일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고 내게도 찾아와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판단으론 이스마엘은 하갈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람에게는 아직도 자식이 없는 상태였던 겁니다. 그렇다 보니 자식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하실 일이 여전히 있게 되신 거고, 그렇기에 아브람 역시도 하나님의 하실 일을 믿고 더 힘써 하나님께 나와 원하는 것을 주시기를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의도를 정작 아브람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린 믿음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과정은 믿음으로!’
하나님은 나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채우신다는 믿음이 한시라도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원했던 결과들이 이루어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믿어, 그 당연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도 복 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도하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매 순간의 과정들을 믿음으로 채워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6:16절만 놓고 보면 아브람은 불신으로 끝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위해 여전히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시기에 17:1절에서부터 이제 그 일을 시작하고 계시는 겁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세요.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십구 세 때, 즉 아브람으로서도 더는 내 능력이나 방법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에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기에 제대로 된 믿음으로 살지 못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부터 가르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전능한 하나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인데, 하나님께는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심에 있어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명칭입니다. 특히 이 ‘엘 샤다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알리신 것으로, 이후로는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당신의 종들에게는 매번 이 이름으로 찾아가십니다.
이 이름으로 벧엘 광야에서 노숙하던 야곱을 위로하셨고, 왕자로 살다가 미디안의 목동으로 전락한 모세에게 확신을 주셨으며, 특히 이 명칭은 욥기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유 없는 고난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욥을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이름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향해 욥 또한 자기가 믿는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고, 그랬기에 그의 인생은 그의 믿음대로 끝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성경에서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면, 오늘 나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도 ‘전능하신 하나님’. 곧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미 창조주 하나님을 공부하실 때 배우셨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표현으로 바꿔 말한다면 창조의 하나님은 세상에 ‘없는 걸 있게 하시고,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이렇듯 없다면 있게 하시고, 안 된다면 되는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껜 불가능이란 게 없으신 겁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이젠 다시금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는 없는 게 무엇이고, 안 되는 게 뭔지를...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하세요. 지금 나에게 있는 믿음과 내가 하는 기도가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도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고 확신하는 기도인지를.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하게 된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부재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이제부터라도 ‘믿습니다.’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믿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차이를 몰랐기에 실수를 범했던 아브람에게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그런 하나님을 향해 아브람이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절 후반부를 보세요.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내 앞에서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내가 보는 앞에서 행하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을 한 사람을 훈계할 때면 마지막 경고로 ‘잘해! 앞으로 내가 지켜볼 거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만, ‘내가 보는 앞에서 행하라’는 말도 같은 뉘앙스를 가진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지켜볼 거야’란 말은 경고의 의미겠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행하라’는 말의 의미는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았던 하갈을 살피셨듯이 ‘계속해서 살펴봐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단지 불가능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 이전에 그렇게 하시기 위해 평소 늘 내 삶의 모든 형편들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고난한 내 형편을 아무도 모른다고요?
답답하고 타들어 가는 내 심정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고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내 모든 형편과 심정을 다 살피시고 헤아려 주십니다. 게다가 만족할 만한 결과로 해결해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다시 하갈 얘기로 돌아가 보세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빼앗긴 채 살 줄 알았습니다. 어디 가서라도 아니, 내가 낳은 아들에게조차 이스마엘이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평생 불가능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되면 어땠나요?
훗날 이삭이 태어난 이후 사라가 트집을 잡고는 이번엔 아예 하갈과 이스마엘을 같이 쫓아내 버립니다. 그러나 원인은 쫓겨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하갈은 자기가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아닌 말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갈을 살펴 주신 하나님이 그리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리 본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만의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그리고 오늘. 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에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일은 저와 여러분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매사에 나를 살피시고, 나를 찾아와 도우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살기만 하면 됩니다.
아브람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다면 그는 백 세가 아니라 팔십 육세 때 이미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낳는 복을 받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기적이나 일어나면 모를까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만,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설사 기적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대로 기적 같은 일들도 있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으로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믿으세요. 믿어서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 매 순간 여러분을 살펴보시다가 여러분에게도 모든 원하는 일들이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대로 되게 해 주시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