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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ahāhatthipadopamasuttaṃ (MN 28)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큰 경(M28)
300.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tatra kho āyasmā sāriputto bhikkhū āmantesi — “āvuso bhikkhave”ti.
“āvuso”ti kho te bhikkhū āyasmato sāriputtassa paccassosuṃ.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에 계셨다
제타 숲 아나타핀디카의 동산에서.
그때 존자 사리풋타가 비구들에게 말했다 -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도반이여"라고 그 비구들이 존자 사리풋타에게 대답했다.
āyasmā sāriputto etadavoca —
“seyyathāpi, āvuso, yāni kānici jaṅgalānaṃ pāṇānaṃ padajātāni sabbāni tāni
hatthipade samodhānaṃ gacchanti,
hatthipadaṃ tesaṃ aggamakkhāyati yadidaṃ mahantattena;
존자 사리풋타가 이와 같이 말했다 -
"도반들이여, 마치 육지에 사는 동물들의 발자국들 중 어떤 것이든 모두
코끼리 발자국 안에 들어가듯이,
코끼리 발자국이 그것들 중 최고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곧 크기 때문이다;"
evameva kho, āvuso, ye keci kusalā dhammā sabbete catūsu ariyasaccesu saṅgahaṃ gacchanti.
katamesu catūsu?
dukkhe ariyasacce, dukkhasamudaye ariyasacce,
dukkhanirodhe ariyasacce,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riyasacce”.
도반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선한 법들이든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포함됩니다.
어떤 네 가지입니까?
고통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고통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고통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301. “katamañcāvuso, dukkhaṃ ariyasaccaṃ?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maraṇampi dukkh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pi dukkhā,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saṃ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도반들이여,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도 고통이고, 늙음도 고통이고, 죽음도 고통이며,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고통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간단히 말해서,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가 고통이다.
katame cāvuso, pañcupādānakkhandhā?
seyyathidaṃ — rūpu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도반들이여,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이러하다 - 색(物質)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 느낌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
지각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 형성(意志作用)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 의식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이다.
“katamo cāvuso, rūpupādānakkhandho?
cattāri ca mahābhūtāni, catunnañ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 rūpaṃ.
도반들이여, 색취온이란 무엇인가?
사대(四大)와 사대에 의지하여 생긴 색(色)이다.
*흔히들 [五蘊(五取蘊) 名色]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렇게 표현해도 통용될 수 있지만
그 범주가 다르다.
五蘊(五取蘊)은 5가지 蘊들 각각을 지칭한다. 즉 色, 受, 想, 行, 識.
이에 반해 名色은 五蘊(五取蘊)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한 덩어리가 된 하나의 法이다.
<예외적으로 無想유정은 想蘊은 배제되어 4가지 蘊이 하나의 덩어리가 된 名色이다.>
부연하면 [五蘊(五取蘊) 즉 名色]이 아니라 [五蘊(五取蘊)]에서 變成(有)된 것이 [名色]이다.
그래서 무색계 중생들은 色蘊이 배제되어 變成된 <존재>이다. 즉 [名色]이 아니다.
그리고 (5)蘊은 (12)處에서 생겨난 경험들의 분류이고 名色은 (12)緣起의 맥락에서 나타난다.
앞의 變成(有)란 bhava에 대한 번역이고 기본적인 의미는 됨(to become)이다.
논서에서는 업유와 생유로 분류하는데 일생 중 경험(蘊)이 取-有된 名色을 緣한 識이 있고
生(12연기지의 11번째) 이전 즉 有(12연기지의 10번째)인
識 緣 名色(12연기지의 4번째)의 名色으로 크게 둘로 나룰 수 있는데
이른바 中有라는 표현도 이것에 해당된다.
“katamā cāvuso, cattāro mahābhūtā? 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u.
도반이여, 네 가지 근본 원소(四大)란 무엇입니까?
땅의 원소(견고성), 물의 원소(유동성), 불의 원소(열기), 바람의 원소(운동성)입니다.
302. “katamā cāvuso, pathavīdhātu?
pathavīdhātu siyā ajjhattikā, siyā bāhirā.
도반이여, 지계(地界)란 무엇입니까?
지계는 내적일 수도 있고 외적일 수도 있습니다.
katamā cāvuso, ajjhattikā pathavīdhātu?
yaṃ ajjhattaṃ paccattaṃ kakkhaḷaṃ kharigataṃ upādinnaṃ,
seyyathidaṃ — kesā lomā nakhā dantā taco maṃsaṃ nhāru aṭṭhi aṭṭhimiñjaṃ vakkaṃ
hadayaṃ yakanaṃ kilomakaṃ pihakaṃ papphāsaṃ antaṃ antaguṇaṃ udariyaṃ karīsaṃ,
yaṃ vā panaññampi kiñci ajjhattaṃ paccattaṃ kakkhaḷaṃ kharigataṃ upādinnaṃ.
ayaṃ vuccatāvuso, ajjhattikā pathavīdhātu.
도반이여, 내적 지계란 무엇인가?
내부에 있고, 개인에 속하며, 단단하고, 견고하며, 취착된 것이다.
즉, 머리카락, 체모, 손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신장,
심장, 간, 횡격막, 비장, 폐, 장, 장간막, 위 내용물, 대변,
또는 그 밖에 내부에 있고, 개인에 속하며, 단단하고, 견고하며, 취착된 것이다.
도반이여, 이것을 내적 지계라고 한다.
yā ceva kho pana ajjhattikā pathavīdhātu, yā ca bāhirā pathavīdhātu, pathavīdhāturevesā.
내적인 지계(地界)이든 외적인 지계이든, 그것은 단지 지계일 뿐이다.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pathavīdhātuyā nibbindati,
pathavīdhātuyā cittaṃ virājeti.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 지계에 대해 염오하고,
지계에 대해 마음이 이욕(離欲)한다.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bāhirā āpodhātu pakuppati {pathavīdhātu pakuppati (ka.)} .
antarahitā tasmiṃ samaye bāhirā pathavīdhātu hoti.
tassā hi nāma, āvuso, bāhirāya pathavīdhātuyā tāva mahallikāya aniccatā paññāyissati,
kh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ipariṇāmadhammatā paññāyissati.
kiṃ panimassa mattaṭṭhakassa kāyassa taṇhupādinnassa ‘ahanti vā mamanti vā asmī’ti vā?
atha khvāssa notevettha hoti.
도반이여, 외부의 수계(水界)가 격동하는 [지계(地界)가 격동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외부의 지계는 사라집니다.
도반이여, 이렇게 거대한 외부의 지계조차 무상함이 보일 것이며,
소멸의 법칙이 보일 것이며, 쇠퇴의 법칙이 보일 것이며, 변화의 법칙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애에 의해 취착된 이 작은 몸에 대해
'나다' 혹은 '나의 것이다' 혹은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tañce, āvuso, bhikkhuṃ pare akkosanti paribhāsanti rosenti vihesenti, so evaṃ pajānāti —
‘uppannā kho me ayaṃ sotasamphassajā dukkhavedanā. sā ca kho paṭicca, no apaṭicca.
kiṃ paṭicca? phassaṃ paṭicca’.
so {sopikho (syā.), sopi (ka.)} phasso aniccoti passati, vedanā aniccāti passati,
saññā aniccāti passati, saṅkhārā aniccāti passati, viññāṇaṃ aniccanti passati.
tassa dhātārammaṇamev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도반들이여, 만약 다른 이들이 그 비구를 욕하고, 비난하고, 화내게 하고, 괴롭힌다면,
그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 '나에게 이 귀의 접촉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났다.
그것은 조건에 의한 것이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 그는 그 접촉도 무상하다고 본다, 느낌도 무상하다고 본다,
지각도 무상하다고 본다, 행도 무상하다고 본다, 식도 무상하다고 본다.
그의 마음은 요소의 대상에 집중되고, 맑아지고, 안정되고, 해탈한다.
*대상에 뛰어들고(pakkhandati), 그 후 마음이 맑아지며(pasīdati), 안정되고(santiṭṭhati),
마지막으로 완전한 확신과 몰입에 이르는(adhimuccati) 과정으로 대답.
“tañce, āvuso, bhikkhuṃ pare aniṭṭhehi akantehi amanāpehi samudācaranti —
pāṇisamphassenapi leḍḍusamphassenapi daṇḍasamphassenapi satthasamphassenapi.
도반들이여, 만약 다른 이들이 그 비구를 불쾌하고, 원치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 손으로 접촉하거나, 흙덩이로 접촉하거나, 막대기로 접촉하거나, 칼로 접촉하는 것으로.
so evaṃ pajānāti — ‘tathābhūto kho ayaṃ kāyo yathābhūtasmiṃ kāye pāṇisamphassāpi kamanti,
leḍḍusamphassāpi kamanti, daṇḍasamphassāpi kamanti, satthasamphassāpi kamanti.
* 그는 다음과 같이 반야한다. -
손과도, 흙덩이와도, 막대기와도, 칼과도 접촉될 수 있는 것이 몸에서 일어난다.
몸이란 그렇게 만들어진(bhūto, becomed, 有) 것이다.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kakacūpamovāde —
“ubhatodaṇḍakena cepi, bhikkhave, kakacena corā ocarakā aṅgamaṅgāni okanteyyuṃ,
tatrāpi yo mano padūseyya na me so tena sāsanakaro”ti.
실로 이것은 세존께서 '톱의 비유' 교설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
'비구들이여, 설령 도적들이 양날의 톱으로 사지를 절단한다 하더라도,
그때에도 누군가 마음을 오염시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āraddhaṃ kho pana me vīriyaṃ bhavissa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passaddho kāyo asāraddho, samāhitaṃ cittaṃ ekaggaṃ.
나에게 시작된 정진은 물러남이 없고, 확립된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고,
경안한 몸은 흔들림이 없고, 삼매에 든 마음에 한 곳에 안정되었다.
kāmaṃ dāni imasmiṃ kāye pāṇisamphassāpi kamantu, leḍḍusamphassāpi kamantu,
daṇḍasamphassāpi kamantu, satthasamphassāpi kamantu, karīyati hidaṃ buddhānaṃ sāsanan’ti.
이제 이 몸에서 손과도, 흙덩이와도, 막대기와도, 칼과도 기꺼이 접촉하게 두는 것이
실로 부처님들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tassa ce, āvuso,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i.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so tena saṃvijjati saṃvegaṃ āpajjati —
‘alābhā vata me, na vata me lābhā, dulladdhaṃ vata me, na vata me suladdhaṃ,
yassa me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ī’ti.
그는 이로 인해 동요하며 절박감에 빠진다 -
'아, 나에게 손실이로다. 아, 나에게 이익이 아니로다.
아, 나에게 얻기 어려운 것이로다. 아, 나에게 쉽게 얻은 것이 아니로다.
내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는구나.'
seyyathāpi, āvuso, suṇisā sasuraṃ disvā saṃvijjati saṃvegaṃ āpajjati;
evameva kho, āvuso, tassa ce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i,
so tena saṃvijjati saṃvegaṃ āpajjati —
‘alābhā vata me na vata me lābhā, dulladdhaṃ vata me, na vata me suladdhaṃ,
yassa me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ī’ti.
도반이여, 마치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보고 당황하여 절박감에 빠지는 것처럼,
도반이여,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는 그로 인해 당황하여 절박감에 빠집니다 -
'아, 나에게 손실이로다. 아, 나에게 이익이 아니로다.
아, 나에게 얻기 어려운 것이로다. 아, 나에게 쉽게 얻은 것이 아니로다.
내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는구나.'.
tassa ce, āvuso,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saṇṭhāti, so tena attamano 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하여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도반들이여, 이 정도로도 그 비구는 많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303. “katamā cāvuso, āpodhātu? āpodhātu siyā ajjhattikā, siyā bāhirā.
katamā cāvuso ajjhattikā āpodhātu?
yaṃ ajjhattaṃ paccattaṃ āpo āpogataṃ upādinnaṃ, seyyathidaṃ —
pittaṃ semhaṃ pubbo lohitaṃ sedo medo assu vasā kheḷo siṅghāṇikā lasikā muttaṃ,
yaṃ vā panaññampi kiñci ajjhattaṃ paccattaṃ āpo āpogataṃ upādinnaṃ —
ayaṃ vuccatāvuso, ajjhattikā āpodhātu.
yā ceva kho pana ajjhattikā āpodhātu yā ca bāhirā āpodhātu, āpodhātureves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āpodhātuyā nibbindati, āpodhātuyā cittaṃ virājeti.
도반들이여, 물의 요소(āpodhātu)란 무엇인가? 물의 요소는 내적일 수도 있고, 외적일 수도 있다.
도반들이여, 내적인 물의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부에 있고, 개인적이며, 물이고 물의 성질을 가지며, 취해진 것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진액,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또는 그 밖에 내부에 있고, 개인적이며, 물이고 물의 성질을 가지며, 취해진 것들이 있다면 -
도반들이여, 이것을 내적인 물의 요소라고 한다.
내적인 물의 요소와 외적인 물의 요소, 이것은 단지 물의 요소일 뿐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고 나서,
물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물의 요소에 대해 마음을 떠나게 한다.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bāhirā āpodhātu pakuppati.
sā gāmampi vahati, nigamampi vahati, nagarampi vahati,
janapadampi vahati, janapadapadesampi vaha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mahāsamudde 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dvi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ti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catu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pañca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cha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sattayojanasatikānipi udakāni ogacchan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mahāsamudde sattatālampi udakaṃ saṇṭhāti,
chattālampi udakaṃ saṇṭhāti, pañcatālampi udakaṃ saṇṭhāti, catuttālampi udakaṃ saṇṭhāti,
titālampi udakaṃ saṇṭhāti, dvitālampi udakaṃ saṇṭhāti, tālamattampi {tālaṃpi (sī.)} udakaṃ saṇṭhā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mahāsamudde satta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chap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pañca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catup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ti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dvi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porisamattampi {porisaṃpi (sī.)} udakaṃ saṇṭhā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mahāsamudde aḍḍhaporisampi udakaṃ saṇṭhāti,
kaṭimattampi udakaṃ saṇṭhāti, jāṇukamattampi udakaṃ saṇṭhāti,
gopphakamattampi udakaṃ saṇṭhā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mahāsamudde aṅgulipabbatemanamattampi udakaṃ na hoti.
tassā hi nāma, āvuso, bāhirāya āpodhātuyā tāva mahallikāya aniccatā paññāyissati,
kh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ipariṇāmadhammatā paññāyissati.
kiṃ panimassa mattaṭṭhakassa kāyassa taṇhupādinnassa ‘ahanti vā mamanti vā asmīti’ vā?
atha khvāssa notevettha hoti ... pe ...
tassa ce, āvuso,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saṇṭhāti.
so tena attamano 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도반들이여, 외부의 물의 요소가 격동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을도 쓸어가고, 읍도 쓸어가고, 도시도 쓸어가고,
지방도 쓸어가고, 지역도 쓸어갑니다.
도반들이여, 대해(大海)에서 물이 1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고,
2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고, 3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고,
4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고, 5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고,
6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고, 700요자나까지 줄어드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대해에서 물이 7타라(종려나무 높이)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6타라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5타라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4타라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3타라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2타라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1타라 깊이로 남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대해(大海)에서 물이 7푸리사(사람 키)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6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5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4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3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2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대해에서 물이 반 푸리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리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무릎 깊이로 남는 때가 있고, 발목 깊이로 남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대해(大海)에 손가락 마디만큼의 물도 남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거대한 외부의 물의 요소에서조차 무상함이 보이고,
소멸의 법칙이 보이고, 사라짐의 법칙이 보이고, 변화의 법칙이 보입니다.
하물며 이 작은 갈애에 의해 취해진 몸에 대해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거나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 (중략) ...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하여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도반들이여, 이 정도로도 그 비구는 많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katamā cāvuso, tejodhātu? tejodhātu siyā ajjhattikā, siyā bāhirā.
katamā cāvuso, ajjhattikā tejodhātu?
yaṃ ajjhattaṃ paccattaṃ tejo tejogataṃ upādinnaṃ,
seyyathidaṃ — yena ca santappati, yena ca jīrīyati, yena ca pariḍayhati,
yena ca asitapītakhāyitasāyitaṃ sammā pariṇāmaṃ gacchati,
yaṃ vā panaññampi kiñci ajjhattaṃ paccattaṃ tejo tejogataṃ upādinnaṃ —
ayaṃ vuccatāvuso, ajjhattikā tejodhātu.
yā ceva kho pana ajjhattikā tejodhātu yā ca bāhirā tejodhātu, tejodhātureves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tejodhātuyā nibbindati, tejodhātuyā cittaṃ virājeti.
도반들이여, 불의 요소란 무엇인가? 불의 요소는 내적일 수도 있고, 외적일 수도 있다.
도반들이여, 내적인 불의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부에 있고, 개인적이며, 불이고 불의 성질을 가지며, 취해진 것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그것에 의해 몸이 따뜻해지고, 그것에 의해 늙어가고, 그것에 의해 열이 나며,
그것에 의해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이 완전히 소화되는 것,
또는 그 밖에 내부에 있고, 개인적이며, 불이고 불의 성질을 가지며, 취해진 것들이 있다면 -
도반들이여, 이것을 내적인 불의 요소라고 한다.
내적인 불의 요소와 외적인 불의 요소, 이것은 단지 불의 요소일 뿐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고 나서,
불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불의 요소에 대해 마음을 떠나게 한다.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bāhirā tejodhātu pakuppati.
sā gāmampi dahati, nigamampi dahati, nagarampi dahati,
janapadampi dahati, janapadapadesampi dahati.
sā haritantaṃ vā panthantaṃ vā selantaṃ vā udakantaṃ vā
ramaṇīyaṃ vā bhūmibhāgaṃ āgamma anāhārā nibbāya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kukkuṭapattenapi nhārudaddulenapi aggiṃ gavesanti.
tassā hi nāma, āvuso, bāhirāya tejodhātuyā tāva mahallikāya aniccatā paññāyissati,
kh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ipariṇāmadhammatā paññāyissati.
kiṃ panimassa mattaṭṭhakassa kāyassa taṇhupādinnassa ‘ahanti vā mamanti vā asmī’ti vā?
atha khvāssa notevettha hoti ... pe ...
tassa ce, āvuso,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saṇṭhāti, so tena attamano 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도반들이여, 외부의 불의 요소가 격동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을도 태우고, 읍도 태우고, 도시도 태우고, 지방도 태우고, 지역도 태웁니다.
그것은 초목의 끝이나, 길의 끝이나, 바위의 끝이나, 물의 끝이나,
아름다운 땅에 이르러 연료가 다하여 꺼집니다.
도반들이여, 닭의 깃털이나 힘줄 조각으로도 불을 찾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거대한 외부의 불의 요소에서조차 무상함이 보이고,
소멸의 법칙이 보이고, 사라짐의 법칙이 보이고, 변화의 법칙이 보입니다.
하물며 이 작은 갈애에 의해 취해진 몸에 대해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거나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 (중략) ...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하여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도반들이여, 이 정도로도 그 비구는 많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305. “katamā cāvuso, vāyodhātu? vāyodhātu siyā ajjhattikā, siyā bāhirā.
katamā cāvuso, ajjhattikā vāyodhātu?
yaṃ ajjhattaṃ paccattaṃ vāyo vāyogataṃ upādinnaṃ,
seyyathidaṃ — uddhaṅgamā vātā, adhogamā vātā, kucchisayā vātā,
koṭṭhāsayā {koṭṭhasayā (sī. pī.)} vātā, aṅgamaṅgānusārino vātā, assāso passāso iti,
yaṃ vā panaññampi kiñci ajjhattaṃ paccattaṃ vāyo vāyogataṃ upādinnaṃ —
ayaṃ vuccatāvuso, ajjhattikā vāyodhātu.
yā ceva kho pana ajjhattikā vāyodhātu, yā ca bāhirā vāyodhātu, vāyodhātureves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vāyodhātuyā nibbindati vāyodhātuyā cittaṃ virājeti.
도반들이여, 바람의 요소란 무엇인가? 바람의 요소는 내적일 수도 있고, 외적일 수도 있다.
도반들이여, 내적인 바람의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부에 있고, 개인적이며, 바람이고 바람의 성질을 가지며, 취해진 것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위로 향하는 바람들, 아래로 향하는 바람들, 배 안의 바람들,
장 안의 바람들, 사지를 따라 흐르는 바람들, 들숨과 날숨,
또는 그 밖에 내부에 있고, 개인적이며, 바람이고 바람의 성질을 가지며, 취해진 것들이 있다면 -
도반들이여, 이것을 내적인 바람의 요소라고 한다.
내적인 바람의 요소와 외적인 바람의 요소, 이것은 단지 바람의 요소일 뿐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보고 나서,
바람의 요소에 대해 염오하고, 바람의 요소에 대해 마음을 떠나게 한다.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bāhirā vāyodhātu pakuppati.
sā gāmampi vahati, nigamampi vahati, nagarampi vahati,
janapadampi vahati, janapadapadesampi vahati.
hoti kho so, āvuso, samayo yaṃ gimhānaṃ pacchime māse
tālavaṇṭenapi vidhūpanenapi vātaṃ pariyesanti, ossavanepi tiṇāni na icchanti.
tassā hi nāma, āvuso, bāhirāya vāyodhātuyā tāva mahallikāya aniccatā paññāyissati,
kh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ayadhammatā paññāyissati, vipariṇāmadhammatā paññāyissati.
kiṃ panimassa mattaṭṭhakassa kāyassa taṇhupādinnassa
‘ahanti vā mamanti vā asmī’ti vā? atha khvāssa notevettha hoti.
도반들이여, 외부의 바람의 요소가 격동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을도 쓸어가고, 읍도 쓸어가고, 도시도 쓸어가고,
지방도 쓸어가고, 지역도 쓸어갑니다.
도반들이여, 여름의 마지막 달에 종려나무 잎이나 부채로 바람을 찾고,
처마에서도 풀잎이 움직이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이렇게 거대한 외부의 바람의 요소에서조차 무상함이 보이고,
소멸의 법칙이 보이고, 사라짐의 법칙이 보이고, 변화의 법칙이 보입니다.
하물며 이 작은 갈애에 의해 취해진 몸에 대해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거나 '나는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tañce, āvuso, bhikkhuṃ pare akkosanti paribhāsanti rosenti vihesenti.
so evaṃ pajānāti, uppannā kho me ayaṃ sotasamphassajā dukkhā vedanā.
sā ca kho paṭicca, no apaṭicca. kiṃ paṭicca? phassaṃ paṭicca.
sopi phasso aniccoti passati, vedanā aniccāti passati, saññā aniccāti passati,
saṅkhārā aniccāti passati, viññāṇaṃ aniccanti passati.
tassa dhātārammaṇamev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도반들이여, 만약 다른 이들이 그 비구를 욕하고, 비난하고, 화내고, 괴롭힌다면,
그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귀의 접촉으로 인한 이 고통스러운 느낌이 내게 일어났다.
그것은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조건으로? 접촉을 조건으로.'
그는 '그 접촉도 무상하다'고 봅니다. '느낌도 무상하다'고 봅니다. '지각도 무상하다'고 봅니다.
'형성도 무상하다'고 봅니다. '의식도 무상하다'고 봅니다.
그의 마음은 요소들을 대상으로 하여 기울어지고, 맑아지고, 안정되고, 집중됩니다.
“tañce, āvuso, bhikkhuṃ pare aniṭṭhehi akantehi amanāpehi samudācaranti,
pāṇisamphassenapi leḍḍusamphassenapi daṇḍasamphassenapi satthasamphassenapi.
so evaṃ pajānāti ‘tathābhūto kho ayaṃ kāyo yathābhūtasmiṃ kāye pāṇisamphassāpi kamanti,
leḍḍusamphassāpi kamanti, daṇḍasamphassāpi kamanti, satthasamphassāpi kamanti.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kakacūpamovāde
“ubhatodaṇḍakena cepi, bhikkhave, kakacena corā ocarakā aṅgamaṅgāni okanteyyuṃ.
tatrāpi yo mano padūseyya, na me so tena sāsanakaro”ti.
āraddhaṃ kho pana me vīriyaṃ bhavissa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passaddho kāyo asāraddho, samāhitaṃ cittaṃ ekaggaṃ.
kāmaṃ dāni imasmiṃ kāye pāṇisamphassāpi kamantu, leḍḍusamphassāpi kamantu,
daṇḍasamphassāpi kamantu, satthasamphassāpi kamantu. karīyati hidaṃ buddhānaṃ sāsanan’ti.
도반들이여, 만약 다른 이들이 그 비구를 불쾌하고, 원치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손으로 때리거나, 돌을 던지거나, 막대기로 치거나, 칼로 찌르더라도,
그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 몸은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몸에 손의 접촉도 일어나고,
돌의 접촉도 일어나고, 막대기의 접촉도 일어나고, 칼의 접촉도 일어납니다.
세존께서 톱의 비유 가르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설령 도적들이 양날의 톱으로 사지를 절단한다 하더라도,
그때에도 마음을 오염시키는 자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나의 정진은 일어나 나태함이 없을 것이며, 마음챙김은 확립되어 잊어버림이 없을 것이고,
몸은 고요하여 흔들림이 없을 것이며, 마음은 집중되어 한 곳에 모아질 것입니다.
이제 기꺼이 이 몸에 손의 접촉이 일어나게 하고, 돌의 접촉이 일어나게 하고,
막대기의 접촉이 일어나게 하고, 칼의 접촉이 일어나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tassa ce, āvuso,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i.
so tena saṃvijjati saṃvegaṃ āpajjati —
‘alābhā vata me, na vata me lābhā, dulladdhaṃ vata me, na vata me suladdhaṃ.
yassa me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ī’ti.
seyyathāpi, āvuso, suṇisā sasuraṃ disvā saṃvijjati saṃvegaṃ āpajjati;
evameva kho, āvuso, tassa ce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i.
so tena saṃvijjati saṃvegaṃ āpajjati —
‘alābhā vata me, na vata me lābhā, dulladdhaṃ vata me, na vata me suladdhaṃ.
yassa me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na saṇṭhātī’ti.
tassa ce, āvuso, bhikkhuno evaṃ buddhaṃ anussarato, evaṃ dhammaṃ anussarato,
evaṃ saṅghaṃ anussarato, upekkhā kusalanissitā saṇṭhāti, so tena attamano 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는 그로 인해 당황하여 절박감에 빠집니다 -
'아, 나에게 손실이로다. 아, 나에게 이익이 아니로다.
아, 나에게 얻기 어려운 것이로다. 아, 나에게 쉽게 얻은 것이 아니로다.
내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는구나.'
도반들이여, 마치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보고 당황하여 절박감에 빠지는 것처럼,
그와 같이,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는 당황하여 절박감에 빠집니다].
그는 그로 인해 당황하여 절박감에 빠집니다 -
'아, 나에게 손실이로다. 아, 나에게 이익이 아니로다. 아, 나에게 얻기 어려운 것이로다.
아, 나에게 쉽게 얻은 것이 아니로다.
내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지 않는구나.'
도반들이여, 만약 그 비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고,
이와 같이 승가를 계속 생각하여 선(善)에 의지하는 평정이 확립되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도반들이여, 이 정도로도 그 비구는 많은 것을 행한 것입니다.
306. “seyyathāpi, āvuso, kaṭṭhañca paṭicca valliñca paṭicca tiṇañca
paṭicca mattikañca paṭicca ākāso parivārito agāraṃ tveva saṅkhaṃ gacchati;
evameva kho, āvuso, aṭṭhiñca paṭicca nhāruñca paṭicca maṃsañca
paṭicca cammañca paṭicca ākāso parivārito rūpaṃ tveva saṅkhaṃ gacchati.
도반들이여, 마치 나무와 덩굴과 풀과 진흙에 의지하여
공간이 둘러싸인 것이 '집'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처럼,
이와 같이, 도반들이여, 뼈와 힘줄과 살과 가죽에 의지하여
공간이 둘러싸인 것이 '물질'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ajjhattikañceva, āvuso,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na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도반들이여, 내적인 눈이 손상되지 않았더라도, 외적인 형상들이 [시야의] 범위 안에 오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주의가 없다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부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ajjhattikañceva {ajjhattikañce (sī. syā. pī.), ajjhattikañcepi (?)}, āvuso,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도반들이여, 내적인 눈이 손상되지 않았고, 외적인 형상들이 [시야의] 범위 안에 오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주의가 없다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부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yato ca kho, āvuso, ajjhattikañceva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āpāthaṃ āgacchanti, tajjo ca samannāhāro hoti.
evaṃ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도반들이여, 그리고 내적인 눈이 손상되지 않고, 외적인 형상들이 [시야의] 범위 안에 오며,
그에 상응하는 주의가 있을 때, 이와 같이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부분이 나타납니다.
yaṃ tathābhūtassa rūpaṃ taṃ rūp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vedanā sā vedan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saññā sā saññ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e tathābhūtassa saṅkhārā te saṅkhār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nti,
yaṃ tathābhūtassa viññāṇaṃ taṃ viññāṇ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물질인 것은 물질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느낌인 것은 느낌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지각인 것은 지각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형성들인 것은 형성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의식인 것은 의식취온에 취합됩니다.
<* evameva kho, āvuso, ye keci kusalā dhammā
sabbete catūsu ariyasaccesu saṅgahaṃ gacchanti.
도반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선한 법들이든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포함됩니다.>
“so evaṃ pajānāti —
‘evañhi kira imesaṃ pañcannaṃ upādānakkhandhānaṃ saṅgaho sannipāto samavāyo hoti.
그는 이와 같이 이해합니다 -
'참으로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취온들의 취합, 집합, 결합이 있다.'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paṭ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ṃ pañcupādānakkhandhā.
실로 이것들, 즉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은 조건 지어 생겨난 것들[*緣已生(法)]입니다.
* 그러면 연이생법인 (5)온은 무엇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인가?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ṃ so dukkhasamudayo.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ṃ, so dukkhanirod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이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에 대한
욕구, 집착, 애착, 고착, 그것이 고통의 발생입니다. <*苦集>
이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에 대한
욕망과 탐욕의 제거, 욕망과 탐욕의 포기, 그것이 고통의 소멸입니다. <*苦滅>
도반들이여, 이 정도로도 비구에 의해 많은 것이 행해진 것입니다.
“ajjhattikañceva, āvuso, sotaṃ aparibhinnaṃ hoti ... pe ...
ghānaṃ aparibhinnaṃ hoti...
jivhā aparibhinnā hoti...
kāyo aparibhinno hoti...
mano aparibhinno hoti, bāhirā ca dhammā na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ajjhattiko ceva, āvuso, mano aparibhinno hoti, bāhirā ca dhammā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도반들이여, 내적인 귀가 손상되지 않았고 ...
내적인 코가 손상되지 않았고 ...
내적인 혀가 손상되지 않았고 ...
내적인 몸이 손상되지 않았고 ...
내적인 마음이 손상되지 않았더라도, 외적인 법들이 [인식의] 범위 안에 오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주의가 없다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부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내적인 마음이 손상되지 않고, 외적인 법들이 [인식의] 범위 안에 오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주의가 없다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부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yato ca kho, āvuso, ajjhattiko ceva mano aparibhinno hoti, bāhirā ca dhammā āpāthaṃ āgacchanti,
tajjo ca samannāhāro hoti, evaṃ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yaṃ tathābhūtassa rūpaṃ taṃ rūp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vedanā sā vedan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saññā sā saññ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e tathābhūtassa saṅkhārā te saṅkhār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nti,
yaṃ tathābhūtassa viññāṇaṃ taṃ viññāṇ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도반들이여, 내적인 마음이 손상되지 않고, 외적인 법들이 [인식의] 범위 안에 오며,
그에 상응하는 주의가 있을 때, 이와 같이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 부분이 나타납니다.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물질인 것은 물질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느낌인 것은 느낌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지각인 것은 지각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형성들인 것은 형성취온에 취합되고,
그와 같이 생긴 것 중에서 의식인 것은 의식취온에 취합됩니다."
so evaṃ pajānāti —
‘evañhi kira imesaṃ pañcannaṃ upādānakkhandhānaṃ saṅgaho sannipāto samavāyo hoti.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paṭ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ṃ pañcupādānakkhandhā.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ṃ so dukkhasamudayo.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ṃ so dukkhanirod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ī”ti.
그는 이와 같이 이해합니다 -
'참으로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의 취합, 집합, 결합이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이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은 실로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들입니다.
이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에 대한 욕구, 집착, 애착, 고착, 그것이 고통의 발생입니다.
이 다섯 가지 취착의 무더기들에 대한
욕망과 탐욕의 제거, 욕망과 탐욕의 포기, 그것이 고통의 소멸입니다.'
도반들이여, 이 정도로도 비구에 의해 많은 것이 행해진 것입니다.
idamavoca āyasmā sāriputto. attamanā te bhikkhū āyasmato sāriputtassa bhāsitaṃ abhinandunti.
존자 사리풋타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기뻐하며 존자 사리풋타의 말씀을 환영했다.
mahāhatthipadopamasuttaṃ niṭṭhitaṃ aṭṭhamaṃ.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에 대한 큰 경이 끝났다. 여덟 번째 [경].
첫댓글
대부분 [perplexity]의 번역입니다.
색수상행식은 나가 아니고 나의것도 아니니 집착하지 말아라는 내용인데 그 이유는 무상하기 때문이라는 경문이네요
위 내용에 대해 불교에 대해 공부한 모 철학 교수님은 괴롭기 때문에 내가 아니고 나의것이 아니라 한 결론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괴로운것은 내가 아니어야 하고 무상한것은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더군요 그리고 내것이면 이렇게 되어라 하면 되어야 하는데 안된다 그러니 그건 너의것이 아니다는 설명도 한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변하기 때문에 집착하는것은 괴로움이 될수 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드릴수 있지만 그렇기에 그건 너가 아니고 너의것도 아니다는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는겁니다
무아론은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 개념이고 붓다는 무아를 언급하지 않았다는건데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무아론입니다 윤회와 어떻게 양립가능한지에 대한 논란도 많습니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하는것에 많은 불교학자들의 토론이 있지만 결론은 없습니다 논장이 불교를 너무 어렵게 만든건 아닌지
계속 변하는것을 나라고 할수 없는건 분명해 보입니다 계속 변하는것도 나라고 말하고 정의 할수는 있겠지만 어떤 형태와 속성을 가졌을때를 나라고 해야할지 명확하지 않을것이고 결국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나라고 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요즘 핫한 양자역학으로 보면 관찰될때 즉 조건지어질때만 존재이고 그렇지 않을때는 존재한다고 말할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무아라는 개념이 확실해 집니다 나고 남이고 조건지어지지 않았을때는 어떤 존재든 존재 하지 않는데 나라거나 나의것이라고 할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전에 내용중 조건지어지지 않은것이 있다 조건지어지지 않은것이 없다면 조건지어진것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수 없다 라고한 내용이 이해될듯도 합니다 붓다를 빠삐만이 찾지 못하는 이유는 조건지어짐이 사라져 존재라 할수 없는데 당연히 찾을수 없겠죠 갈애에 의해 계속 조건을 지어가면 결국 존재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이 윤회의 설명이라 보입니다 붓다는 선정에 들어 삼계의 모든 존재들의 실상을 바르게 본고 그걸 그당시 사람들에게 저렇게 설명하는것이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붓다가 현재 존재한다면 아마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