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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어씨(忠州魚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始祖) 어중익(魚重翼)은 본성(本姓)이 지씨(池氏)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에 세개의 비늘(鱗)이 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어씨(魚氏)로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그후 시조 중익(重翼)의 후손 승진(升震)이 고려 말에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어 가세(家勢)를 일으켰으며, 그의 증손(曾孫) 유소(有沼)가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하는데 좌대장(左大將)으로 공(功)을 세워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승진(升震)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삼게 되었다. 17세 때 내금위(內禁衛)에 들어갔다가 1456년(세조 2) 무과(武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유소(有沼)는 백 근짜리 무거운 활을 지고다니며 북변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치장(治將)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느 북변의 오랑캐를 잘 다스려 이름을 떨쳤는데, 오랑캐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뵈면 그는 “너희들에게 취하지 않고, 추호라도 범하지 아니하리”하며 거절하였기로 야인들이 손을 들어 이마에 올리면서 “공은 우리 아버지시다”라고 하였다. 그가 다시 북병사로 기용되었을 때 노모를 핑계삼아 사양하니 성종은 “북변을 편하게 함이 경보다 나은이가 없어 그런 것이니 어머니는 걱정말라”하면서 유소의 어머니에게 태후와 동등한 예우를 하도록 하사품(下賜品)을 내렸다고 한다.
구후 나라에서는 오랑캐들과 무슨 외교를 진행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어령공(魚令公)을 오시게 한다>고 공갈하여 곧잘 화의를 보았으며, 그들은 <어령공이 정말 오시는가, 오신다면 그이는 곧 우리 아버지이니 만
나뵐 수 있을까>하며 반가와 했다고 한다.
오늘날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와는 통혼(通婚)을 하지 않으며, 경기도를 비롯한 서울과 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남한(南韓)에 총 825가구, 3,5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종어씨(咸從魚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풍익현(馮翊縣) 출신인 어화인(魚化仁)이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하여 동래(東來)해 강원도 강릉부(江原道江陵府)에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다. 그 후 다시 평안도 함종현(平安道咸從縣 : 지금의 강서군)으로 옮겨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고려 명종(明宗) 때 인장 동정(仁長同正)을 지낸 어화인(魚化仁)을 시조로 하고 함종(咸從)을 본관(本貫)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중흥(中興)의 인물(人物)인 변갑(變甲)은 현령(縣令)을 지낸 연(淵)의 다섯 아들중 맏아들로서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그는 일찍이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우헌납(右獻納)을 역임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함안(咸安)으로 돌아가 노모(老母) 봉양에 진력했다.
특히 그는 평소에 신숙주(申叔舟)의 아버지인 신 장(申 檣)과 친하여 “우리가 충성껏 임금을 섬기고 이름이 이룩되면 고향에 돌아가 노친(老親)을 봉양하자.”고 약속한 바 있었다.
변갑의 아들 효첨(孝瞻)은 1429년(세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을 거쳐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가 되어 젊은 학자(學者)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1446년(세종 28) 집현전 응교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 데 참여했다. 세조(世祖)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오른 그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효첨(孝瞻)에게는 세겸(世謙)․세공(世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세겸(世謙)은 세조(世祖)와 연산군(燕山君) 대(代)에서 각 조(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봉상시 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낸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특히 학문과 문장(文章)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세공(世恭)의 10세손 유봉(有鳳)은 김창협(金昌協)에게
학문을 배워 조선 후기(朝鮮後期)를 대표하는 거유(巨儒)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문하(門下)에서 이천보(李天輔)․홍상한(洪象漢)․윤득관(尹得觀) 등 훌륭한 학자(學者)를 배출시켜 경종(景宗)의 국구(國舅)인 아우 유귀(有龜)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이밖의 인물(人物)로는 정조(正祖) 때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른 석정(錫定)과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판관(判官)․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재연(在淵)이 유명했고, 한말(韓末)의 개화파 대신(開化派大臣) 윤중(允中)은 독립운동에 몸바친 윤희(允姬)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남한(南韓)에 총 2,687가구, 10,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엄씨(光州嚴氏)
광주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45가구 2,31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엄씨(羅州嚴氏)
나주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 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46가구 1,69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밀양엄씨(密陽嚴氏)
밀양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67가구 1,5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영월엄씨(寧越嚴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漢)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陵先生)의 후예이며 당(唐)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唐)나라 현종(玄宗 : 제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新羅)에 동래(東來) 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 땅인 내성군(奈城郡)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君)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특히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 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로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 되었으며,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와 을유해방(乙酉解放) 시(時)에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고, 6․25 동란 시에는 북편의 큰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大異變)이 있을 때 마다 무언(無言)의 예시(豫示)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영월 엄씨는 시조의 아들 3형제 대(代)에 와서 장남 태인(太仁)이 고향을 지키며 군기공파(軍器公派)를 이루었고, 차남 덕인(德仁)은 한양(漢陽)으로 이주(移住)하여 복야공파조(僕야 公派祖)가 되었으며, 3난 처인(處仁)은 함경도(咸鏡道)로 이주하여 문과공파조(文科公派祖)가 되어 현재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대(代)를 거듭 하면서 참봉공계(參奉公系)․교수공계(敎授公系) 등 37계통으로 갈라져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특히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11세손 유온(有溫 : 장군 비의 증손, 준의 아들)이 조선 창업(創業)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고, 판관(判官) 한저(漢著)의 아들 흥도(興道)가 절행(節行)으로 뛰어났다.
숙부(叔父)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폐 되었던 단종(端宗)이 화(禍)를 당하자 명에 의하여 시신이 강물에 더져져 옥체(玉體)가 둥둥 떠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옥같은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御命)에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 호장(寧越戶長)이라는 미관말질(微官末職)에 있던 흥도(興道)가 관(棺)을 마련하여 선산(先山)에 장사 지내고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爲善被禍 吾所甘心)>는 말을 남긴 후 영남지방으로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 세인(世人)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을 한 흥도의 충절은, 선조(宣祖) 때 그의 영웅성이 재 평가 되어 후손을 찾아 증손 한례(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해 주고 단종릉(端宗陵)인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였으며, 현종(顯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비로소 그 후손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에 등용되었다.
영조(英祖) 때 와서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순조(純祖)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가자(加資) 되었으며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로 내려져,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 되었다.
한편 시조의 16세손 흔(昕)은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과 정자(正字)를 지냈고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수찬(修撰)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세자시 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을 지냈다.
특히 그는「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그 행적(行蹟)이 등재(登載)되어 영월 엄씨를 더욱 빛냈으며,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며 악(惡)으로 이긴 일 본가, 이 두 즈음에 취사(取捨) 아니 명백(明白)한가, 평생(平生)에 악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成)하리라>라는 시조(時調) 한 수가「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한다.
흔(昕)의 현손 집(緝 : 성구의 아들)은 숙종(肅宗) 때 정언(正言)과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고,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했으며,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광해군(光海君)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폐모론(廢母論)에 유생(儒生)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가 파직 당한 성(惺)과, 효종(孝宗) 때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나갔던 황(愰)이 유명했고, 성의 조카 정구(鼎耈)는 효종(孝宗) 때 좌승지(左承旨)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 되었으나 무고함이 밝혀져 뒤에 교리(校理)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다.
한석봉(韓石峯)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집고첩(集古帖)」과「만향제시초(晩香薺詩抄)」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문(嚴門)을 대표했으며, 집(緝)의 아들 경수(慶遂)는 숙종(肅宗)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여,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연행록(燕行錄)」을 간행한 숙(璹),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낸 도(燾), 고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석정(錫鼎)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세영(世永)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신 내각이 수립될 때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을 역임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한 후 군자금(軍資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정섭(正燮)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전통 가문인 영월 엄씨(寧越嚴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216가구, 114,1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해여씨(金海呂氏)
김해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0가구 1,4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선산여씨(善山呂氏)
선산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0가구 1,2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성산여씨(星山呂氏)
성산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438가구 7,79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동향(同鄕)인 성주여씨(星州呂氏)와의 관계도 상고할 수 없다.
성주․성산 여씨(星州․星山呂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성산 여씨(星山呂氏)는 여어매(呂御梅) 이전의 선계(先系)를 병란(兵亂)으로 인한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자세히 알 수 없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를 시조(始祖)로 하며 그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성산(星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양유의 아들 위현(渭賢)이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났던 손자 극회(克誨)가 조선(朝鮮)에서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5세손 문승(文承)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중종(中宗) 때 학자(學者)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던 희림(希臨)은 현량과(賢良科)에 합격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주(星州)에서 정주학(程朱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선조(宣祖)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낸 대로(大老)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조선 말 의병장으로 임실군의 대운치(垈雲峙)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주목(柱穆)과 북간도(北間島)에서 이동녕(李東寧)․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쓴 독립 운동가 준(準) 등이 성산 여씨(星山呂氏)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성산 여씨(星州․星山呂氏)는 남한(南韓)에 총 4,814가구, 19,8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안여씨(咸安呂氏)
함안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3가구 1,0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함양여씨(咸陽呂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시조(始祖) 여어매(呂御梅)는 중국(中國) 내주(萊州) 사람으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877년(신라 헌강왕 3년)에 신라(新羅)에 귀화하여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에 정착하고 고려(高麗)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어매(御梅)는 두 아들 임청(林淸)과 광유(光有)를 두었는데, 임청(林淸)의 후손 자열(子列)․자장(子章)․존혁(存赫) 3형제와 광유(光有)의 계통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어매(御梅)의 8세손 공계(公係)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고, 공계(公係)의 손자 칭(稱)은 조선(朝鮮)에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서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칭의 증손 자신(自新)은 뛰어난 무신(武臣)으로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거쳐 중종(中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평안도(平安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아들 윤철(允哲)과 함께 부자(父子)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순원(順元)의 아들로 산수(算數)를 잘했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유길(裕吉)과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를 지낸 우길(祐吉) 대(代)에서 함양 여씨(咸陽呂氏)의 가문은 더욱 번성하였다.
유길(裕吉)의 아들 이징(爾徵)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으며 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인길(裀吉)의 아들 이재(爾載)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이량(爾亮)의 아들 성제(聖齊)는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한 말
(韓末)에 와서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규형(圭亨)과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한 운형(運亨)이 함양 여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양 여씨(咸陽呂氏)는 남한(南韓)에 총 6,025가구, 25,1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흥여씨(咸興呂氏)
함흥여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02가구 2,18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의령여씨(宜寧余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여씨(余氏)는 본래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우리나라 여씨(余氏)의 연원(淵源)은 조(趙)․송(宋)나라 때 이르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오른 여선재(余善才)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려(高麗)에서 의춘군(宜春君)에 봉(封)해지고 의령(宜寧)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으면서 부터이다.
그후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선재(善才)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현경(玄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여씨(余氏)의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외에도 12본이 나타나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직유(稷蕤)가 고려(高麗)에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검교장군(檢校將軍)을 역임하였고, 그의 손자 정(廷)이 군기감(軍器監)을, 정(廷)의 5세손 중엄(仲淹)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부전서(禮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중부(仲富)의 아들로 조선(朝鮮) 때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를 지낸 흥열(興烈)과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안주진 병마절도사(安州鎭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원경(元暻), 이조정랑(吏曹正郞)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낸 건(健)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여씨(宜寧呂氏)는 남한(南韓)에 총 3,432가구, 14,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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