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어머니를 보낸지 벌써 50일이 되었네요.
암 진단부터 돌아가시기까지 약 1년동안 여기에서 많은 정보를 얻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놓고 간다는 생각으로 보호자로서 그 동안의 경과를 써볼까 합니다
어머니는 67년생에 가족력이 있으시고, 생선, 채소 위주로 섭취하셨고 육고기는 많이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초기 진단
8월 중순에 회사에서 점심을 먹는 도중 아버지께 처음 어머니가 건강검진 결과로 위암 진단을 받았으니, 큰 병원에서 재검진을 받아보라는 내용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암이라고 해봤자 다리골절? 정도로 생각하고 좀 불편하게 살더라도 큰 지장은 없겠지 라는 생각에 약 1주일정도 지냈습니다.
재검진
아버지께서 서울아산병원에 검진을 예약하여 3~4차례 정도 근처 숙소에서 1박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지방에 사시고, 저만 서울에 거주 중이어서 회사 끝나고 2~3 차례 들렀습니다. (8월 말)
그 때 숙소에서 아버지가 하던 말이 가장 암이라는 체감이 들게하였습니다.
위가 꽉막혀서 3기나 4기가 예상된다고.. 얼마남지 않을수도 있다고..
어머니의 외견은 크게 차이가 없어서 잘 치료 받으면 될거라는 생각이 박살나고, 굉장히 불안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숙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존률이라던가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일상을 또 살다보니 24시간 내내 우울해 있지는 않았습니다
수술
재검진 이후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과와 수술날짜가 잡혔습니다. (9월 중순)
사실 이때 심경은 하루라도 빨리 암세포를 떼어내야 괜찮은게 아닌가, 더 빨리 수술할 수 있는데가 없나 싶었지만..
아산병원에 처음 가보니 미어 터지는 사람들을보고 납득이 갔습니다 ㅎㅎ 그와 같이 이런 고통이 세상이 나한테 주는 시련이 아닌 누구나 겪을수 있는 불행한 일 중에 하나구나라는 뭔가 안도감도 느꼈구요
이후 수술은 긍정적으로 끝났습니다. 어머니는 진단 이후 퇴직을 하셨고, 아버지는 23년이 정년이셨기에 아버지께서 휴가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입원회복실에 계셨습니다.
수술 받는 날 내내 혹시 지금 상황보다 더 나빠지는 게 아닌가 싶어 굉장히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수술 내용은 위 전절제, 절제한 위 부분은 식도와 십이지장? 쪽을 이었고 암세포가 있는것으로 추정되는 줄기를 여러가닥 잘라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체중 감량 및 회복이 될때까지는 영양제 - 미음 - 죽 - 부드러운 음식을 드셔야하며, 총 8차정도 되는 항암치료를 받게 될거라고 했죠
부정적인 점은 그게 끝난다고 100% 일상으로 돌아오는게 아닌 음식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굉장히 불편한 삶을 사셔야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잘되겠지라는 생각에 큰 걱정이 마음 한켠의 조그만 걱정으로 바꼈습니다.
수술 이후
이후 아산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아야했기 때문에 긴 회복 후 퇴원하여 위례에 있는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습니다. 저와 아버지가 재직중이라 어머니는 아버지 휴가가 끝난 이후 혼자 계셨구요.(10월 초)
그리고 요양병원으로 가는 그 날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위암3기 B라고 수술진단 결과를 말씀하셨구요
제가 생각한 최상의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인터넷 검색결과로 약 30%라는 생존률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실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는게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준비를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항암치료 시작과 요양병원
항암제는 선명하게 기억이 안나지만 옥살리 젤로다였던것 같습니다. (11월 부터 3주에 한 번)
항암치료는 아버지도 휴가를 내서 오시기도 하셨지만, 가까히 사는 제가 휴가를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주의해야 했던거는 어머니가 음식은 제대로 먹고 계신지, 요양병원에서 도움이 되는 영양주사는 맞고 계신지, 적절하게 운동을 하고 계신가였습니다.
다행히 이와 같이 생활하는것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어머니께서 위례 허허벌판에서 생활하시는게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이후 청담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계속 요양병원에서 지내기보다 집도 왔다갔다 하는게 좋다고 하셔서 그런 패턴으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집에 계실때는 아버지께서 일도 하시고 퇴근 후에 간병 및 환자식 준비도 하시느라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위해 아산병원에서 치료관련 부작용같은 교육을 함께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겁이 많으셔서 굉장히 두려워했지만 교육하던 선생님이 '그래도 아들이 치료 받는것보다 낫잖아요' 라는 말을 듣고 무덤덤해지던 모습이.. 저는 어차피 치료를 받을거 뭐하러 겁내냐는 마인드지만 건강검진 같은 체혈시 주사바늘 따끔할때 쳐다도 못보는 겁쟁이인데 괜히 허세부린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ㅋㅋ
항암치료 경과
항암치료를 위해 2주 집 - 1주 요양병원 생활을 하시던 어머니는 3주마다 항암치료를 하러 아산병원에 가실때 얼굴을 뵐수 있었고, 가장 많이 나누던 대화는 호중구 수치와 같은 항암치료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였습니다.
저희는 11월 부터 2월까지 5회 정도 항암치료를 받는 도중 못받고 돌아가는 경우가 한 세 번 정도 있었습니다.
가장 힘들었 부분은 대기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입니다. 대부분 채혈 - 2시간 - 외진 - 2~3시간 - 항암치료 (2시간) 으로 기억하는데 채혈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채혈결과를 기다리고, 외진 본 다음 점심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루틴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항암치료 받으실때는 혼자 토성 넘어서 까페에 있었구요.
항암 처음받으실때는 겨울이기도 하고 손발 저림이 좀 심했습니다. 기운도 많이 없었는데 다행히 길면 이틀, 짧으면 하루 안에 회복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요양병원에 계실때 병원밥이 질릴때마다 요양병원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 같이 가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곤했습니다. 항암치료를 끝내고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돌려보낼때나 같이 외식하고 요양병원으로 돌아갈 때 뭔가 어린아이 두고 가는듯한 불안함은 지워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아무리 열심히 먹는다고 하셔도 조금씩 줄어가는 체중이 눈에 띄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회사에 어머니께서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는데도 불구하고 줄기는 커녕 늘어가는 오히려 업무량과 여러 불만이 쌓이다 23년 초에 퇴직을 결심했습니다. 구직하는거는 저한테는 사실 걱정도 아니여서 간병하며, 저도 조금 휴식을 취하다 일을 할 생각이었구요
복막전이
아산병원에서 항암치료를 할때는 3개월마다 CT를 찍었습니다. 어머니는 9월 수술이셨기 때문에 12월 CT 결과 나아지고 있지는 않지만, 심해지지도 않다는 결과를 받았고 똑같은 항암플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2월 중순에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습니다. 마침 일을 그만뒀으니까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있을때는 아무때나 불러서 같이 외식하자며 기뻐하셨죠.
2월 중순에 항암치료를하고 집에 계시던 도중 어머니가 먹던 음식을 계속 토한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습니다.(2월 말)
2월 마지막주 주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취미생활 도중에 전화를 받아 정말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고, 다음날에 응급실에 가야한다는 연락이어서 아주 큰 걱정이었습니다.
그 동안 항암치료 교육때 받았던 지속된 설사 및 발열과 같은 위급한 상황은 없었기 때문에 많이 불안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동안 음식섭취를 못해 아주 힘이 없으신 모습이었습니다.
자세한 기억은 안나지만 응급실은 보호자 1인만 출입이 가능해서 제가 어머니가 같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갖고 있는 증상을 보니 장폐색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니 장폐색이다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응급실 담당교수로 부터 온 전화는 복막전이라는 참담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셨고 저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이후 소화제인가 뭔가 처방을 받고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날도 8월 말 아산병원 근처 숙소에서 어머니를 뵐때와 같이 집으로 가면서, 집에서도 눈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이후로 저는 어머니와 같이 요양병원에 지내기로 하였고 다음주에 있을 외진을 기다렸습니다
이때부터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거는 악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복막전이 진단을 받기 하루나 이틀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꿈을 꿨습니다. 저는 미신이나 종교는 전혀 믿지않는 철저한 이성주의자인데 아무래도 심신이 약해져서 또 악몽을 꾸면 어머니 몸상태가 않좋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에 들기를 두려워했고, 그로 인한 불규칙적인 수면, 악몽이 계속되었습니다.
전이 이후 항암치료
다행히 소화제가 들어 증상은 없어졌으나, 외진에서 항암제를 바꾼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탁솔 사이람자 입니다. 3주 투약 후 1주 휴식 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담당의사는 저한테만 어머니의 예상 여명을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신경 안쓰는 사람이라도 여명은 무조건 신경쓸것이다라는 판단하에 지금까지도 아무한테 그 날 여명을 들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도 뭔가 낌새를 알고 있는듯 그 이후로 10여차례 여명을 듣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도 기간은 모르더라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계셨겠죠... 그 외진 간 날 밤은 어머니도 저도 쉬이 잠에 들지 못하고 불 끈채 자는척 엄청 뒤척였습니다.
복막전이는 식사량 조절과 탈모의 부작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 끼에 많은 양을 먹게된다면 복통이 있었고, 그게 두려워 조금 먹게된다면 여러번 먹어야 했지만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아 체중감량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영양부족으로 인해 항암치료는 빈번하게 지연되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항암치료 개시 이후 한달 뒤부터 탈모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어쩔수 없이 삭발을 하셨는데, 어머니의 초라해진 모습에 저는 울먹일수 없어 애써 두상이 이쁘다며 웃어보였습니다.
어머니와 같이 지내는 요양병원 생활은 그리 순탄하면서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시절을 제외하고 저는 줄곧 혼자 살았기에 누군가와 같이 사는게 큰 불편함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멘탈이 괜찮을때는 어머니를 보살피는것에 더 집중하자는 생각이었지만, 점점 그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조금씩 이기적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의 운동시간으로 인해 어머니와 다투던 중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셨던 기억을 되돌려보면 아직도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런 날은 일부이지만 함께 요양병원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와 이곳저곳 산책하면서 즐거운 기억들도 있었기에 기억을 덮어보려고 애썼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장폐색 및 콧줄
탁사 항암치료 휴식시기에 어머니는 요양병원을 떠나 집에 돌아가 아버지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 3주 요양병원, 1주 집생활 중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셨고 문제는 1주 집에 계실때 일어났습니다.
항암치료 약 3사이클(3월 초~5월 중순)을 마치고 집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지난번과 비슷하게 먹기만 하면 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심각하게 까만 토를 했습니다.
역시 아버지는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로 가게 되었고, 또 한번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장이 완전 막힌것 같으니, 금식을 하며 영양제를 맞으면서 장이 풀리길 기다리자고..
그리하여 부모님께서 자리가 없는 아산병원을 떠나 대청병원에 몇일 계셨습니다.(이때부터는 아버지께서 보호자역할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경과는 좋아지지 않았고 아산병원에 공실이 날때까지도 없었습니다. 아산병원으로 옮기고 이 시기에 좋다는 항암제까지 투여하였으나, 일시적으로 좋아질뿐 장이 풀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급하게 장루 수술일정이 잡혔습니다.(6월 중) 하지만 의료 판단 미스인지 수술은 개복 후 바로 폐복이라는 의아한 상황으로 의료진과 저희 환자의 신뢰도가 많이 무너졌고 늦었지만 다른 병원 진료를 받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원 신청을 하는 동안 머물곳이 필요하여 전에 있었던 요양병원으로 갔지만, 요양병원에서 받아주기 힘든 상태까지 간 상태였으며 전원 진료를 받았던 분당서울대병원에서도 희망적인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악재는 겹쳐 어머니의 체온이 갑자기 상승하여 응급실을 가게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산병원 응급실로 갔지요. 진단결과는 담관이 막혀 담즙배출이 어려워 폐혈증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번째 배액관인 담즙 배액관을 달게 되었고, 그와 같이 복수 배액관도 달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체중이 눈에 띌정도로 급속하게 줄었으며, 저희 가족도 사실 희망이 거의 없다는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호스피스
그 이후 몇몇 병원을 전전하며 진단을 받았지만, 결국 어머니는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호스피스에 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집 근처 성모병원 호스피스로 옮기게 되었고 저와 아버지는 일주일간 교대로 곁에 있기로 하였습니다.(7월 초)
그런데 어머니는 호스피스에 너무 일찍온게 아닐까 싶이 좋은 몸상태를 유지하였고, 한 달정도 회복증세를 보였습니다.
또한 오래동안 각박한 병원생활을 하다 호스피스 병동에 오니 친절한 대우에 어머니도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을 가누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다른 사람, 진통제나 배액관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는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또한 호스피스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자 계속 가족이나 주변에 피해를 끼친다고 생각이 드셨는지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나니 정말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침대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하기를 일주일...소변을 보는것도 힘들어하시길 일주일...말하는 것도 힘들어하시길 일주일을 지나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의식을 잃은 상태를 3일 유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의식을 거의 잃기 하루 전에 어머니는 왜인지 안믿던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 종교적인 내용을 올려도 될지는 모르겠고, 또 저도 아버지도 무교이지만
망자를 위한 기도문으로 어머니와 다른 분들의 암으로 잃은 가족분들을 달래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와 안식을 얻게 하소서
이제 어머니를 놓아드리고 기일과 같은 기념일에만 이 글을 보면서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 카페를 이용하면서 많은 정보때문에 감사드렸고,
다른 환우분이나 보호자분께는 호쾌하게 쾌차하여 이겨내시길 기원하며,
어서 빨리 기술이 발전해 암과같은 질병이 없어지는 좋은 소식만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임.. 공진단 경옥고 자기만 먹지말고 부모님것도 꼭 챙겨드리길
첫댓글 슬프다..암은 아직 이길수없는건가?
세상에 100퍼는 없지만 술담섹도마를 멀리하고 공진단 경옥고 꾸준히 먹으면 높은확률로 예방가능하다는 생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