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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마음에 관한 고찰
인체과학을 연구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행위에 관여하는 두뇌를 생명의 주인이자 인체의 통제센터로 여기고, 뇌의 비밀을 밝히고자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만일 영혼이란 존재가 없고 단지 뇌가 생명의 주인이라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임사체험자들이나 수행자들의 영혼이 인체를 떠나서 다른 시공간의 생명들을 보거나 소통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생을 기억하거나 유체이탈과 같은 이런 현상들은
뇌를 생명의 주체로 여기는 것에 대한 모순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면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을 뇌의 환청이나 환각현상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렇다면 뇌는 어떤 역할을 하며 영혼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에 대해 李洪志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사람의 신체에 만약 그의
元神이 없고 그의 성격(脾氣)ㆍ천성(天性)ㆍ특성(特性), 이런 것들이 없다면
곧 고깃덩어리로서 그는 완정(完整)하고
독립적인 자아개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대뇌는 무슨 작용을 일으키는가? 내가 말하겠는데, 사람의 대뇌는 우리 이 물질공간의 형식 중에서 그것은 단지 가공공장일 뿐이다.
진정한 정보는 元神이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내보내는 것은 언어가 아니며, 그가 내보내는 것은 일종의 우주 정보로서 모종의 의미를 대표한다. 우리 대뇌는 이런 지령을 받아들인 후, 그것을 우리 현재의 언어, 이런 표현 형식으로 가공한다. 우리는 손짓, 눈길, 전체 동작으로 그것을 표현해 내는데, 대뇌는 바로 이런 작용을 일으킨다.
진정한 지령, 진정한 사유는 사람의 元神이 내보내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대뇌의 직접적인 독립작용이라고 여기는데, 사실 때로는 元神이 마음(心)에 가 있어, 어떤 사람은 확실히 마음이 생각(心想)함을 느낀다." (출처 : 전법륜)
이상과 같이 뇌는 사람들이 영혼이라 부르는 元神(의식)이 육체를 부리기 위한 매개체 같은 역할을 할 뿐, 뇌 혼자 독립적으로 인체를 통제하는 생명의 주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채널러들은 심장 속에서 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신과 나눈 이야기 같은 책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자기 영혼이 내보내는 정보가 아니라 다른 신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사람의 행위는 뇌가 있기에 가능하며, 사람들이 마음이라고 칭하는 것도 결국 뇌의 활동으로 인해 생긴다.
뇌를 다쳐서 손상을 입거나 기능을 멈추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불완전하거나 정지된다. 따라서 뇌를 연구하는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을 연구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선 우선 뇌의 기능을 알아야만 한다.
뇌는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인데 뇌의 근본적 기능은 사람이 물질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대응책을 정하여 이를 몸으로 하여금 실행케 하기 때문이다.
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마음의 감각을 통해 사물에 대한 느낌과 정보를 인식하고 기억한다.
시각으로는 사물의 미추 등을 식별하며,
청각으론 소리, 후각으론 향기, 미각으론 맛, 촉각으론 쾌감과 고통, 마음으론 아프고 시리고 공허하고 슬프고 즐거움 등의 감각을 느끼며, 그 감각적 정보에 의거하여 어떤 사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저 사람은 좋다 나쁘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고유한 사상관념(고정관념)을 형성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생긴 고정관념에 따라 매사에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이해득실을 따지고, 좋은 것은 얻고자 추구하는 욕망과, 나쁜 것은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배척하려는 의지와 의도적인 행위(유위법)를 유발한다.
사람의 뇌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정보에 입각하여 본능적으로 비슷한 반응을 계속 유도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물만 보면 두려움 일어나고, 개에 물려 고생한 사람들은 개만 보면 놀라거나 평소에 개를 두려워하고, 높은 곳에 떨어져 크게 다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높은 곳만 오르면 고소공포증이 있고, 사람에게 큰 마음의 상처나 배신을당한 사람은 사람을 믿지 않거나 대인기피증 등이 생긴다.
이와 같이 과거의 경험과 기억정보에 의해 계속되는 행동패턴을 보이는 것이 바로 업식(業識)에 의한 마음의 습이다. 이런 마음의 습관적 반응은 기존의 기억정보와는 다른 인식이 뇌에 각인될 때까지 반복된다.
예를 들어 참새가 들판에 놓인 허수아비를 처음 보고서 진짜 사람으로 인식한 경우에는 두려움을 갖고 다가오지 않지만, 나중에 허수아비가 가짜임을 인식한 순간부터는 두려움없이 다가온다.
이와 같이 본래는 없었던 것이지만 후천적인 경험으로 뇌에 각인된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업식)과 희노애락의 감정들을 통틀어 우리는 마음이라 칭한다.
후천적으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증오하는 등의 마음이 사람의 행위를 지배하게 되는데, 사상관념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각자 서로 다른 가치관과 개성, 직업, 종교 등을 선택하여 서로 다른 운명의 삶을 살게 된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사상관념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한계성이다. 인체의 시각으로는 다른 시공간의생명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사물의 진상을 온전히 보거나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인체의 한정된 감각기관으로 사물에 대해 인식한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코끼리의 전체 생김새를 논하는 것처럼 온전하거나 절대적이지 못하고 한계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하여 알게된 것만이 진실이라 여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없다', '틀렸다'. '거짓이다'라고 함부로 단정짓는 오류를 불러 일으킨다.
둘째, 이기성이다. 자신의 감각을 기준으로 형성된 사상관념에 따른 욕망과 집착은 생존을 위한 자기 이익과 명예, 애정, 생리욕구 등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기에 그 본질이 이기적이라 볼 수 있다.
살생, 도둑질, 사기, 외도, 강간, 중상모략, 비방 등의 나쁜 행위는 모두 자기 욕망의 실현과 자기보호에 기반하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것이기에 이타적이지 않고 이기적이다.
셋째, 편협성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큰 개에 물려서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아주 순한 강아지만 봐도 두려워하거나 경계심을 갖는다.
이처럼 사상관념은 사물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도록 만든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에의거하여 사물을 왜곡되고 편협하게 보도록 한다.
넷째, 상대성이다. 동일인물이지만 그에게 사랑받고 이득을 본 사람은 그를 좋게 생각하고, 그에게 욕을 먹거나 피해를 본 사람은 그를 나쁘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인삼이지만 냉성체질의 사람에겐 몸에 따뜻해져 좋게 여기나, 열성체질인 사람이 먹으면 상체로 열이 올라 부작용이 생겨 나쁘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물질계의 어떤 사물이 자신에게 좋고 나쁘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 좋고 다 나쁘다고 판단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진 좋고 나쁨의 관념은 절대적이지 않고 대부분 상대적이다.
이상과 같이 후천적으로 생긴 사상관념은
사물을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본성의 지혜와 사물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을 갖지 않는 천진하고 순수한 자비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수행이란 곧 이 장애물을 깨끗이 제거하여 본성의 지혜와 자비심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사상관념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서로 다르다. 좋아하는 사람도 서로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서로다르고,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도 각기 다르다.
사상관념은 이처럼 대부분 이기적이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이기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절대진리나 온전한 진실이라 볼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양, 내 생각은 옳고 네 생각은 틀렸다 라며 자기 견해와 이익을 고집스럽게 집착하며 서로 다투고 싸우며 업을 짓는다.
이와 같이 육체의 감각기관으로 사물에 대해 감수하고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좋고 나쁜 것을 취하고자 집착하며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몸과 마음작용을 불교에선 五蘊(色受想行識)이라 부르는데, 붓다는 '오온은 무상(無常)하고, 괴로움이며, 자아가 아니지만, 자아와 다르지도 않으며, 자아와 합한 것도 아님을 참답게 알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최고경전이라 자부하는 반야심경 역시 본성과 몸과 마음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요지다.
몸과 마음은 본래의 순수한 의식(본성)인 참나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들이기에 참나가 아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의식의 나툼이기에 참나와 다르지도 않다. 하지만 몸은 생로병사하고 희노애락의 감정들이 들쑥날쑥하여 마음이 조석으로 변해도 참나인 본성은 변하지 않기에 참나와 몸과 마음은 서로 혼합된 것이 아니다.
마치 영화 속 장면에서 폭탄이 터지고 화산이 폭팔하고 지진이 일어나도 화면속 바탕의 스크린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眞我如如라 한다.
본성이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붓다를 포함한 원시칠불의 고통된 가르침으로 만약 본성이 오염된다면 무슨 수로 번뇌로 부터 해탈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본성이 오염된다면 한번 분노를 일으키면 분노가 끊이지 않고 항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이
분노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본성이 후천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홍지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거시적인 물질이 미시적인 물질을 오염시킬 수 없기 때문임을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하셨다.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극미시하에서, 극미시하의 미립자 중에서 사람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다. 사상의 틀을 배제하고 보면 사람의 선량한 성격(脾氣), 천성, 특성, 특징을 체험하고 관찰해 내기가 쉬운데 그것이 진정한 자기이다.
主元神(主意識)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개변될 수 없다. 主元神은 사람이 형성한 관념 때문에 主元神의 본질마저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의 각종 관념, 각종 업력으로 인하여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고, 덮이며, 완전히 둘러싸여 본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主元神 자체는 개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업력은 그렇게 미세한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업력은 속인 중에서 빚어낸 것으로 속인 중의 물질이다. 이것은 그렇게 미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만들 때의 그것은 극히 미시적인물질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섞여 들어갈 수가 없고, 단지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었을 뿐이다." (출처 : 전법륜 2권 불성)
우리가 명상을 통해 무념무상의 삼매에 들면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번뇌망상과 가슴 속을 불편하게 하는 희노애락의 감정들이 가라앉아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명료한 의식만이 남는데 이 순수한 의식이 바로참나다. 이와 같이 입정(入定) 상태에서는 일부러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생시의 상태에서 활동할 때는 번뇌망상과 감정들이 본성인 순수의식을 가리고 있어, 자아의 진면목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겉으로 드러난 육체와 마음을 자아인양 착각하고 육체와 마음의 욕망에 집착하며 살게 된다. 마치 하늘을 가린 구름을 보고 그것을 하늘의 실상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주의식과 하나인 본성이 곧 참나임을 깨닫고 몸과 마음을 자아로 착각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관념과 집착심의 소멸, 즉 마음의 소멸을 일컬어 소위 해탈, 무위, 무아, 무심 등이라 칭한다.
그러면 왜 참나를 안에서 찾아야 하고 또, 마음을 닦아야만 하는가?
달걀의 생명주체는 껍질이 아닌 노른자와 흰자이다.
노른자와 흰자는 딱딱한 껍질과 부드러운 막으로 된 흰껍질 안에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본성도 분자세포로 이루어진 거친 물질신체 안에 있기에 몸 밖이 아닌 내면에서 찾아야하고(어떤 성자는 본성은 7겹으로 된 신체 안에 있다고 말한다.) 분자세포보다 미시적인 물질인 번뇌와 業에 가려있기에 마음을 닦아야만 본성이 드러나는 이유다.
(참고) 참나와 관념의 분리체험기
현장법사의 방문
작자: 전목(田木)
【정견망】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시간이 오래되어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마도 내가 法輪大法 수련을 시작하여 처음 경험한 신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워낙 신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모든 과정이 생생하다.
어느 날 새벽의 일이다. 나는 일어난 후 침대로 돌아가 또 계속 잠을 자려고 했다. 눕자마자 갑자기 자신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누워서 쉬려고 했는데 어째 또 일어났을까, 잠자리로 돌아가야지 하며 몸을 돌리자마자, 내 육신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활연히 깨달았다. 이는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主元神이 몸 밖으로 나온 상태가 아닌가!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에 멀리서 한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들어왔다. 찾아온 사람은 좀 야위었는데 오기 전에 웃음소리부터 들렸다.
“허허 천 년만일세. 옛 친구가 운 좋게 大法수련에 들어왔으니 정말 축하할 일이군.
그래서 특별히 찾아온 거요 허허.....”
누구지? 마치 친한 것처럼 보였지만 잠시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성이 진(陳)이고 진현장(陳玄裝)이라 합니다.”
내 머리는 여전히 텅 비었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손님이 왔으니 마음은 매우 유쾌했으며 우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 손님은 앉은 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의 수련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찍이 장안(長安 당나라의 수도)을 나가 서쪽을 향했으며, 신강(新疆)을 거치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의 나란타 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삼년간 인도어(천축어)를 배웠고, 또 천축 각지를 돌아 다녔다. 수련이 제법 되었다고 느껴 천축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은둔하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당태종의 뜻을 받들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찾아 온 사람은 얼굴이 매우 부드럽고 상화(祥和)했으며 말솜씨가 좋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봄바람을 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마치 아주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눈을 크게 뜨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사상은 그와 함께 기분 좋게 거닐었다.
한참 후 그가 작별하려 했다. 나는 아직 미련이 남아 그더러 좀 더 있으라고 했다. 그는 나의 기대를 보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함께 모인 것은 천년의 연분으로서 정말 기쁘오. 大法 수련은 중생들이 모두 부러워하지만 기회를 얻기 힘드니, 친구는 마땅히 다그쳐 하루 빨리 원만하시오.”
그리고 작별하더니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석별의 정을 거두고 입구에 기대어 작별했다. 한참 후 침대로 돌아와 의식과 육신이 합쳐졌다. 그때 갑자기 육신의 사상, 지식과 예의 규범 등 각종 관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이런 것이 나를 잠기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와 동시에 신체가 깨어났다. 신체가 깨어남과 동시에 육신의 두뇌에 쌓아놓은 지식이 반영되어 나왔다. 진현장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아닌가? 속성이 진이고 법호는 현장이다.
신체가 깨어나자 사람의 사상도 나왔다. 그러자 발을 구르며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람은 내가 줄곧 숭배해오던 우상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이런 관건적인 시각에 잊어버렸는가, 진작 알았으면 서명이라도 받아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경험은 자못 다채로웠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이를 음미했다. 나중에 수련생들과 이야기 할 때도 상세히 했으며 수련생도 듣고 매우 재미있어 했는데 좀 더 많이 이야기 했으면 했다. 여러 해 후 내가 수련 과정을 총결하며 이 경력을 되돌아보자 비로소 悟性이 충분치 못함을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두뇌가 총명하지 못했고 이야기 자체의 다채로움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일을 통해 내가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을 홀시했다.
예를 들어 말해보자. 내 主元神이 나간 후 그런 선천적인 진아(眞我)의 상태는 매우 순정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문도 두드리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약간의 방어도 없이 매우 즐겁게 환영했다.
이는 마치 고대에 초원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유목민처럼 생소한 사람이 자기의 장막으로 오는 것을 보고 열렬히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나누는 것과 같다. 의식상 그것은 일종의 無我의 순정함이었다. 이런 순정한 정도의 표준 상태를 알고 난 후, 이후의 수련 중에 나는 의식적으로 이런 순정한 상태의 표준에 도달하려고 했다.
또 한가지 관건적인 것은 온 사람이 자신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대방이 누군지 몰랐다는 것이다. 어려서 책을 많이 읽었고 그 유명한 진현장이 서역으로 가서 불경을 얻은 경력은 더욱 귀에 닳도록 익숙한데도, 그런 상태 중에서는 뇌리에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층차가 도달하지 못하여 지혜가 열리지 않았고, 사람의 지식이 쌓인 특출한 상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나의 主元神이 육신으로 돌아와서 직접 내 눈으로 육신 대뇌의 각종 사상과 관념이 조수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매 한 사상이 마치 한가닥 선과 같았다. 무수한 사상 관념이 무수한 선을 형성하였으며, 이런 선은 함께 열을 지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는데 마치 조수처럼 세차게 나의 主意識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매우 똑똑하게 그중 한 갈래의 구체적인 선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사상관념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서유기> 에서 현장법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사상관념이 널리 퍼져 들어올 때 나의 육신 대뇌는 살아난 것처럼 즉시 진현장의 일체 지식이 반영되어 나왔다.
그것은 지식으로 쌓인 모든 관념이 사라진 후 일체를 똑똑히 알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순정함은 아니었다. 매 한갈래 사상관념은 형태가 있는 영체(옮긴이주-상념체)의 존재였다. 다만 나의 이 상태에서 나타난 것이 선의 상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선천의 순진한 眞我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매 한갈래의 관념은 모두 “무게(重量)”가 있었다 (더 좋은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은 함께 모여 극히 방대한 무거운 짐을 형성했으며 생명도 매우 무겁게 변했다. 그것은 ‘무엇이 공능인가’에서 말한 생명이 물질에 대해 짐을 짊어진 그런 상태였다.
이 경험이 내게 매우 중요한 것은 먼저 선천 眞我의 순정한 상태가 무엇인지를 체험으로 알게 해준 것이다. 후천적인 사상관념이 어떠한 지와 수련 중에서 명확한 방향이 있어야 하며 명백하게 수련해야 함을 알았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많이 수월해졌다.
발표시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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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