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 기자의 길에서 만난 인연■
無心으로 고려다완 빚는 민영기 씨
한 분야의 대가(大家)를 만난다는 것은 항상 설레고 두렵다. 특히 그 대상이 400여 년 전 조선에서 만들어져 일본에서 최고대우를 받고 있는 고려다완(이도ㆍ도도야 등)을 부활시켰다고 평가받는 이라면 그 설렘은 더하다.
소강 민영기 선생. 산 좋고 물 맑은 지리산을 품고 있는 경남 산청에 터를 잡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고려다완 작업에 열정을 쏟아내는 그를 만났다.
며칠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는 그는 만남 내내 한 번도 얼굴을 찌뿌리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밝은 웃음으로 기자를 대했다.
민씨의 도예 입문은 일본에서 시작됐다. 1973년 문공부 추천으로 일본에 가, 조선 도위 후손으로 인간 국보에 오른 나카사토 무안(中里無庵)선생의 문하에서 도예의 기틀을 닦았다.
그는 이 시기에 평생 스승으로 함께 할 인연을 만난다. 하야시야 세이조(林屋時三) 전 도쿄국립박물관장과 정양모 전 한국국립박물관장이 그들이다. 하야시야 선생은 조선 시대의 전래품으로 일본에서 국보급 대우를 받는 20여 점의 다완들을 직접 만져 보고 마음속으로 터득할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도 한 점을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이는 좋은 다완을 봐야 좋은 다완을 만들 수 있다는 스승의 깊은 배려이기도 했다.
민씨는 “20여 점을 한꺼번에 담요 위에 펼쳐 놓으니 온몸이 떨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하며 “그때 마음껏 만져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이 도예 인생에 가장 두렵고도 행복했을 때”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고려다완은 그때 느낀 깊은 맛과 조선 도공의 혼을 표현하기 위한 무한한 정진의 과정”이라고 덧붙인다.
1977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경호강이 내려다보이는 현 터에 산청요를 열고 30여 년 간 한 자리를 지키며 고려다완 재현에 매진하고 있다.
옛 도공들의 작업 방식을 따르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발이다. 한 가지 형태의 다완이 손에 익을 대로 익어 완전히 체화되기까지 다른 다완은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전시장에는 이도(井戶)와 도도야 다완(斗斗屋ㆍ魚屋)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도도야는 국내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정도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90년대 초 도쿄에서 조선의 도도야를 본 뒤 도도야 다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흙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가 나올 수 있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이때부터 도도야 다완을 만들어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는 1년에 15번을 가마에 불을 지피고 하루에 300개가 넘는 다완을 만들고 부시며 다작을 거듭했다.
“그때는 좋은 사발을 만들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작업에 임했다”고 민씨는 회상한다.
이런 열정의 뒤에는 “일본사람이 못 만드는 그릇을 만들어 일본의 기를 꺽어 보고 싶은 한국인의 자존심도 한 몫 했다”고 그는 털어 놓는다.
흙과 유약 등 무수한 실험과 실패를 거듭한 민씨는 5년여 만에 제대로 된 도도야 다완을 만들어 낸다.
민씨의 도도야 다완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최고의 사발로 극찬을 받고 있다. ‘옅은 주홍빛과 짙은 녹두빛이 나누어지며, 사발 표면에 선명한 열꽃들은 화사한 봄날 주홍색 꽃잎을 흩뿌려 놓은 듯 아름답다’고 극찬할 정도다.
도도야 다완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적절한 다완의 형태, 맑고 아름다운 색감, 가을 단풍잎 같은 무늬는 보는 이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민씨는 “욕심을 버리고 무심하게 작업에 임하지 않으면 명품을 만들 수 없다”며 “만들어진 사발을 놓고 봐서 마음이 편하면 그게 바로 우리 선조들이 빚은 사발의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시작한 만남은 왠지 모를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마무리 됐다. 불편한 몸으로 마당까지 나서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대가의 무심한 기운이 번져 있는 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