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종꼬랑 냇가 건너 대밭이 있는 터 넓은 집에서 장성 떡 장성 양반의 아들 중에 넷째 아들이고 칠 남매 중에 여섯째로 세상에 나왔단다 장성 양반은 세상에 한량이고 장성 떡은 장성 양반 뒤 치닥꺼리에 죽어라 농사지으면 빚쟁이들이 탈곡하는 자리에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가져가 버리고 얼마나 허탈하고 힘드셨을까 잉
그래도 장성 떡은 장성 갈재 넘어 삼계면에서 그옛날 친정 할아버지는 고을 원님이셨다는디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5살 베기 딸내미가 기죽을까 봐 친정 어메는 산 넘어 찾야 온 곳이 쇠종꼬랑 이라고 그만 고생길을 찾야 왔던 것이다 지금 보니 외할머니는 고생길을 찾야 온 것이 아니라 소요산 문필봉 밑을 찾야 온 것이다
장성 떡은 글도 못 배우고
한이 되어 끝내 돌아가셨지라 내 자식만 바라보며 봇짐장사로 살며 그래도 자식들은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정 지들이 가것다면 갈켜는디 이놈의 해노(현호)는 학교 가라면 나몰라라 쉬영골로 얼음박골로 까짐재로 은석 안으로 소요사 중턱으로 절골로 질마재골로
돼지골로 질마재 가는 서낭제로 내용골로 강체이재로 맨날 눈만뜨면 돌아댕기고
학교 갔는가 하면 질마재 골 가서 낚시질만 하고 까만 고무신 바닥이 구멍이 나면 사달라고도 안허고 학교 갈 때 집에서 나갈 때는 신고 나가고 저만치 가면 바닥난 구멍으로 모래와 흙이 들어오니께 벗어서 책가방에 넣고 다니질 않나 동네사람들이 집이 해노는 맨발로 학교 갑디다 해야 그때사 장성 떡이 알고 새 신발 사주고 참으로 할망이 없어당게
학교는 담임선생님 얼굴도 모르고 댕기질 않나 그 자식 갈켜 보긋다고
육성회비 싸들고 댕김서 고등학교 보냉게 반학기 댕기다 그만두고
가을까징 칠 남매 모두 객지로 가고 혼자만 쇠종꼬랑에 남어서 어매랑 농사짓더니 농사 끝난 겨울은 서울로 갔단다
한양이 어떤곳인지 간다더만 중국집으로 공장으로 카바레로 돌아댕기다 다시 학교 댕긴다고 내려와서 삼년만 다니면 될 고등학교를 사학년을 댕기고 자기는 공부를 못하는디 엄마가 봇짐장사로 힘들게 번 돈을
수업료로 낼 수 없다고 하사관 장학생 후보가 되어 수업료를 장학금으로 받고 댕겼당게
그런 해노가 엄마가 그렇게도 부러워하고 존경하던 질마재 서정주 양반을 좋아했는디 엄마는 글을 몰라도 그 양반을 존경했는디 해노는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시인으로 등단을 하게 되고 어머니 요양병원에 계실 때 지 생일 정월 초사흘날 어메 보고 나옴서 울면서 썼던 어머니 시를 가지고 시인이 되었단다
양력2016 년11 월11 일 빼빼로 데이라고 떠들던 날 어머니는 먼길 소풍 가신다고
갑자기 오라 해서 찾야 갔더니 어머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나를 알아보시는 듯 손을 잡으니 꼭 잡고 놓지 않더라 울면서 또 울면서 어머니 귀속에 대고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던 서정주 양반처럼 어머이 네째 아들 해노가 시인이 되었어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쓸게요 어머니는 훌륭하셨어요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리 시고 먼길
소풍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시는지 숨소리가 잦아들고 행복하게
해노 손잡고 먼 소풍 가셨지요 엄니는 호흡이 멋고도 맥박은 한참이나 아주 한참이나 남아 계셨지라
반시간이 지나 소풍 가신 어머니 등 밑에 손을 넣어 엄마 내 엄마 우리 엄마 마지막 까지 남은 온기를 잡고 싶어 식어가는 당신 육신 끌어안고 통곡 합니다 마지막 까지 남아 있는 엄마 온기가 너무 좋았답니다 지금도 가끔 엄마에 온기를 느끼곤 합니다
어머이 해노 잘하고 있소 잉 걱정하지 마시고 좋은 소풍 즐기시고 계시오 잉 한해가 갈수록 그리움은 더 깊어 가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