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勿良郡), 또는 무안군으로 불리웠다.
이러한 이름들은 지금의 목포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안군, 신안군과 함께 더불어서 불렀으며, 오랜 세월동안 이 고장의 행정구역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나주목의 속현으로 이어왔다.
「목포」라는 이름은〈고려사〉라는 역사책에서 처음 나오는데, 땅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木浦)라고 불렀다고 하고, 목화가 많이 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조선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만호진」이 설치 되었으며, 임진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물렀으며,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 되었다. 그후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던 해의 10월 1일「목포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지역을 더하여 8.6㎢의 도시면적에 인구 6만인 전국 6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하여 一黑(김),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8월 15일「목포부」를 비로소「목포시」로 고쳐 부르게 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포 신항·무안 국제공항 건설 등 SOC 투자촉진과 대불·삼호공단 조성으로 산업기반 시설이 확충되어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기능을 담당한 세계로 웅비하는 미래의 도시이다.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지주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일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정통, 목포대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경정1정목으로 본정통, 산수동3정목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경정2정목이 되었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9년 만호동회의 관할이 됨.
옛날에 일본 사람들이 살았다는 유일한 집으로써 일본사람들이 이 집을 보기 위해
많이 찾아 온다는군요...현재는 찾집
구동양척식주식회사목포지점
우리에게 지난 세기는 격동과 파란의 시기였고, 슬픔과 기쁨이 무수히 교차했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사람은 물론 도시들도 갑자기 부상하고 쇠퇴하곤 했다. 항도 목포의 110년 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목포근대역사관에 그 해답이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근세 서양건축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 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2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척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조선농민 수탈기관으로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고,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 외에도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다. 부산의 동척 지점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이를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운영중으로 동척 목포지점이 지니는 의미도 매우 크다. 따라서 동척 목포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이 있고, 지금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동척건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남아있는 부산의 동척건물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 또한 1920년경의 공공시설물로서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이 근대 건축물에 상징적으로 표출된 유구로서 교육공간으로 활용가치가 높다. 그래서 지난 2006. 7월 목포시는 동척 목포지점을 근대시기 목포 및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조성 운영중에 있다.
우리에게 지난 세기는 격동과 파란의 시기였고, 슬픔과 기쁨이 무수히 교차했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사람은 물론 도시들도 갑자기 부상하고 쇠퇴하곤 했다. 항도 목포의 110년 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목포근대역사관에 그 해답이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근세 서양건축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 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2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척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조선농민 수탈기관으로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고,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 외에도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다. 부산의 동척 지점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이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논의중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동척 목포지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따라서 동척 목포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이 있고, 지금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동척건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남아있는 부산의 동척건물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 또한 1920년경의 공공시설물로서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이 근대 건축물에 상징적으로 표출된 유구로서 교육공간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목포시립도서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이 건물은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8년 10월 일본영사관이 목포에 설치됨에 따라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일본은 영사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정부로부터 만호청(1895년 폐진된 목포진)을 빌려 사용하였고,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하였으며, 다시 현재의 위치인 대의동에 일본영사관과 부대시설인 경찰서·우편국 등을 함께 마련하였다. 당초 일본영사는 무안감리에게 일본영사관 부지 16,028평방미터를 요청하였으나, 이신청을 접수한 조선정부는 9,483평방미터만을 승인하였다. 공사비 7만여 원을 들여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이 전해온다. 이후 목포이사청, 목포부청사 등으로 사용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는 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 1월부터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특징]
개항 당시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만 하더라도 높이 13.65m, 연면적 597.68m²로서 목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면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형은 장방형의 2층 구조에 붉은 벽돌과 흰색 벽돌을 사용하였고, 좌우대칭으로 전면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현관은 목재로 입구를 돌출 시켜 만들었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대부분 이러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 창문은 타원형에 차이를 틀어 오르내림창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물의 내부에는 각 실마다 벽난로를 설치하여 모두 9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2층의 두 곳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중 1기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눈길을 끄는데, 그 당시에는 집 한 채 값을 호가하는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건물의 내부는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변형되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천정의 문양이나 띠둘림 등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외형은 백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견고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시청으로 사용하던 시절에 건물의 주변에 설치한 부속건물들과의 연결 통로를 만들기 위해 벽돌을 헐었다가 다시 복원해놓은 흔적들이 건물의 원래 벽돌과 조금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6.25당시 공중폭격으로 인해 건물의 외부가 조금 손상된 모습이 눈에 띤다. 목포문화원에는 당시 건물 벽돌에 박혀 있던 탄환4기를 보존하고 있다.
일본영사관 건물은 옛 관청건물이 지니는 위풍당당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금의 선창가 쪽을 바라보면 동척 건물을 비롯하여 구 일본인 조차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반대로 조차지 지역에서 바라보면 약간의 언덕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이 건물의 외형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매우 위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부속 건물로는 현재 서예실과 음악실로 쓰고 있는 별관 1채가 남아있다.
[의의]
목포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개항되어 성장한 근대도시이자, 일제강점기 한국수탈의 기점 역할을 했던 눈물의 도시이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립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용했던 것도 아니지만, 우리역사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써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목포의 문화재중 유일하게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방이후 목포시청으로 오래동안 사용되면서 목포가 행정중심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중심역할을 이 건물이 수행하였으며, 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어 목포시민과도 매우 친숙한 건물이 되었다.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근대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이 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남아 있는 과거의 일본관련 유산들에 어떻게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여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 관심사이다.
[관련일화]
한동안 이 건물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알려져 있었고, 좀 자세히 아는 분들의 경우 원래는 러시아가 사용하려고 지었는데 나중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이 건물을 차지하여 사용했다는 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는 이 건물의 외양이 서구식이라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 동안 이 건물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 목포문화원은 이 건물이 처음부터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축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선 건물의 중심부 상단에 일본국화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점과 양측 벽면의 상단에 일장기 모형의 벽돌배치, 건물 내부 벽난로에 새겨진 벚꽃문양 등이 그 물적 증거이다. 또 1990년 본 건물 옥내 전기배선공사와 1992년 천정 및 마루장 보수시 [韓國木浦日本領事館建築場長谷川方行]이라 표시된 여러개의 장목이 발견되어 일본인의 지휘하에 일본영사관 건물로 지어졌음을 뒤받침하고 되었는데, 확인 결과 현재 이 건물의 내부에 사용되고 있는 목재들에도 이와같은 글씨가 써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의 기록이긴 하지만 『목포지(1910년 발행)』라는 책에도 그들이 건축하였던 것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순수 일본인들의 기술에 의해 지어졌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제시대 목포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원로분은 마지막 부윤이였던 일본인 가와노 군조가 "러시아의 건축기술에 대해 극찬을 하였다"는 것과 일제시대 사용했던 러시아제 대형 벽시계와 사무비품 등이 1960년대 초 김학중 시장 때까지만 하여도 전해왔다고 증언했다.
목포도로원표
골목길 지나 한 길로, 고갯길 넘어 바른 길 찾아서 남쪽으로 내달리면 뱃길과 찾길이 만나는 곳!
목포에 늘 처음처럼 길머리에 시작을 알려주는 도로 원표가 있다.
목포시 대의동에 위치해 있는 도로원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번 국도는 목포에서부터 서울을 지나 신의주까지이며, 2번 국도는 부산까지인데, 이 1,2번 국도의 출발점이 바로 목포입니다. 남북방향의 국도는 홀수번호, 동서방향의 국도는 짝수번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번호는 만들어진 순서대로 였으나 최근에 그 번호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다.)
이 길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국도 1호선 구간의 공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1904년부터 3년간 전구간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답니다.
"일제는 목포에 들어와 솜, 쌀, 소금을 가져갔어요. 이들은 모두 전쟁준비물자였지요. 그런데 당시 조선의"길"로는 이런 물품은 물론이고 군대도 이동할 수 없었죠. 그래서 8~10m폭의 신작로를 만든 거예요. 또한 동학농민군 등 산골의 '폭도'들을 소탕하려 해도 '길'로는 힘들었어요. 이 역시 국도 1호선을 서둘렀던 이유 중 하나였지요." 라고 향토사학자 김성열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호선 공사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투입되었고,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2호선의 경우 동학농민 전쟁 때 '폭도'들이 주요 노동력이었다고 합니다.
무엇인꼬요......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면 이루워진다고 하네요
목포 노적봉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유달산 기슭의 노적봉에 이엉을 덮어 곡식을 쌓아 놓은 낟가리처럼 만들어 아군의 군량미를 많이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였다.또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군사들이 밥을 해먹는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우리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것처럼 속여 왜적으로 하여금 미리 겁을 먹고 도망가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새해에는 기원을 비는 종을 울린다고하네요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 관경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고 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뒤, 일단 혼령이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저승길에서 극락 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 (삼학도를 나타냄)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려 떠나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거북섬 (구도 : 목포와 압해도 사이에 있는 섬)에 가서,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떠난다는 전설이 있다.
목포 해양박물관에서
외달이란는 섬을 가는중 유달산 아랫 건물이 예뻐서
첫댓글 구경 잘 하구감니다 ... 자연이빛어내신비 .다산목
네
좋은구경 정보 감사 합니다..오늘도 좋은 시간으로 행복하게 지내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