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 늑막염을 앓았다. 왜 병에 걸렸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체력에 비해 힘든 공동수도 물지게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다닌 학교는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었다. 개천 건너편에는 부자동네였고 반대 건너편 개천변은 길게 판자촌이었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철이 들어갈 나이에 공동변소와 공동수도는 정말 같은 반 친구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창피함이었다.
병원에 입원할 형편이 안되어 병원 약을 타다 집에서 먹었다. 누워 있는 나에게 같은 반 친구들이 찾아왔다. 반에서 불우이웃 돕기 모금을 했는데 대상이 나란 것이다. 애들은 연필 몇 타스와 공책을 수북이 들고 왔다. 나는 고맙게 받았을까? 그러나 그 일은 내게는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다윈주의적 호혜적 이타주의를 읽으면서 갑자기 그 일이 왜 생각나는 거야? 나를 두고 똥고집이 세다고 한다. 나는 자존심이라고 응수한다. 직장에서도 내 꼴리는 대로 일했던 것 같다. 많은 적들을 만들었던 것 같다.
직장을 나오고 생각하는 것은 홀로 서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자원봉사에 참여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원래가 깊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다. 본능과 직관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왔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글을 최근에 접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개체들이 서로에게 이타적이고 관대하고 도덕적이 되려는
타당한 다윈주의적 이유 4 가지
- 유전적 친족관계라는 특수한 관계
- 호혜성 받은 호의에 보답을 하고 보답을 예견하면서 호의를 베푸는 것
- 관대하고 친절하다는 평판을 얻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다윈주의적 혜택
- 자하비가 옳다면 과시적 관대함은 속일 수 없는 진정한 광고의 역할을 한다.
호혜적 이타주의가 진화를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우월한 개체 동물은 약한 개체에게 먹이를 나누어준다. 역으로 약한 개체가 우월한 개체에게 보답하려면 절대 받아 먹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가축화된 동물말고..)
본능과 직관이 호혜적 이타주의로 행한 것이라면 자원봉사는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진화를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해 이상적인 조건이란 것일까? 어느 평론가는 자원봉사를 이기심으로 평가했다. 나는 자기 자존심이라고 응수했다. 다윈주의적 답은 호혜적 이타주의 4 가지 모두 다다. 여기서 종교적 개념은 고려치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