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자네 반찬 가게: 독거노인의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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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례 생활을 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봉자씨가 반찬 가게를 차렸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 생각은 틀렸다. 봉자씨는 여전히 3호관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 이야기이고, 다른 동네 이야기이다. 나는 2주일에 한번 꼴로,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작은 아이가 살고 있는 서울 근교로 올라간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봉자네 반찬 가게는 거기에 있다. ‘봉자네 반찬’이라는 간판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웠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허름하고 조그마한 가건물들이 여남은 채 도열해 있는데, 봉자씨네 가게는 그 중 두 번째 집(2호)이다. 그런데, 한 집 건너 옆집(4호)에는, 어럽쇼, ‘봉순이네’라는 간판이 떡하니 붙어있지 아니한가? 흘낏 보았더니 봉순이네는 순대 등속을 팔고 있었다. 자매인가? 자매였다.
봉자씨는 많이 준다. 그리고, 달라는 대로 준다. 어쩌면 “멸치 볶음 천원 어치만 주세요.” 하고 말해도 짜증을 내지 않을지 모른다. 한번 가면, 나는 멸치 볶음 2천원어치와 콩자반 2천원어치를 사곤 한다. 가끔씩 김치나 깍두기 3천원어치를 사기도 한다. (대형 마트에서는 이런 식으로 살 수 없다. 보통 세 팩에 만원. 한 팩을 사면 4천원 정도.) 그 집에 처음 간 날 나는 멸치 3천원어치, 콩자반 3천원어치, 동태전 3천원어치, 그리고 (우리 집 아이가 좋아하는) 명란젓 5천원어치를 달라고 한 후, “김치도 주세요. 조금만요.”라고 말했다. 내 말을 잘못 들었는지, 봉자씨는 비닐봉지에 자꾸 자꾸 김치를 퍼 넣었다. 불안해하는 나를 보면서 봉자씨가 말했다. “3천원만 내세요. 시어져서 그냥 처분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봉자네 반찬 가게의 단골이 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봉자씨는 엄청나게 바쁜 것 같다. 지나가다 보면 가게가 비어있기 일쑤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다. 손님이 가게를 기웃거리거나 물건을 들여다보면, 4호 점포의 봉순씨가 달려오게 되어있다. 봉순씨가 자기 가게를 비워놓고 봉자씨네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도 많다. 처음 봉순씨를 보았을 때 나는 경솔하게 행동하고 말았다. 봉자네 반찬 가게 앞이었다. “이 집 사장님하고 닮으신 것 같네요...... 언니시구만?” 동생이란다. 나는 허둥지둥 내 말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들 그런단다. 다들 동생인 자기를 보고 언니인 줄 안다는 것이다. 봉순씨(동생)만 불쌍하게 되었다. 장사도, 언니네 가게에 비하면, 잘 안되는 것 같은데, 언니랍시고 자기 마음대로 나다니는 봉자씨 때문에 언니 가게까지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나, 게다가 (자타 공인으로) 언니보다 더 늙어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동생 봉순씨가 봉자네 반찬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이면,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오늘도 바쁜 언니는 출타를 하시고, 착한 동생이 대신 가게를 보아주고 계시네.”라고 인사삼아 말하곤 하였다.
그것 역시 나의 오해였음이, 혹은 오해일 수 있음이 드러난 것은 지난 주이다. (아, 어째서 나는 이리 경솔한가?) 지난 주까지는, 나는 그 자매가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한 사람만 보았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맨 첫날만 빼놓고는) 동생 봉순씨라고 생각해 왔다. 봉순네 가게에서 뛰어 오면, 그녀는 당연히 봉순씨라고 생각했고, 봉자네 가게에 앉아 있어도 (언니 가게를 대신 봐주고 있는) 봉순씨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봉순씨니까 봉순씨라고 생각한 거지. 얼굴이 봉순씨라는 말이다. 지난 주, 멸치 볶음 2천원어치와 콩자반 2천원어치를 사러가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쌍둥이. 나란히 세워 놓고 보니 영락없는 쌍둥이였다.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따로 따로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 생각과 정반대로 동생이 언니를 부려먹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봉자네 반찬 가게에 앉아있는 사람도 언니 봉자씨요, 봉순네 가게에서 뛰어 온 사람도, 동생 가게를 대신 봐주던 언니 봉자씨일지 모르는 것이다.
그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불쌍한 것은 동생 봉순씨다.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확연히 드러났지만, 동생이 확실히 더 늙어 보인다. 키도 더 작더라. (인물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 바란다. 테레비에 나오는 김재동이하고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만 말하겠다. 물론 둘 다. 나이는 50세 전후.) 그리고 언니네보다 장사가 안 되는 것도 분명하다. 나만 해도, 봉자네 반찬 가게는 벌써 여러 번 갔지만, 봉순이네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런 뜻에서 오늘 저녁은 멸치 볶음과 콩자반 대신에 순대를 먹어볼까? 봉자네 반찬 가게가 아니라 봉순이네에 가서 순대 3천원어치를 사오는 것이다. (간은 빼고) 허파와 염통도 좀 넣어 달라고 해서 말이다. 쏘주 반병을 곁들이면, 또 한 끼 때우는 게 되는 거다. 박근혜처럼 테레비를 앞에 놓고 먹어야지. 우리 집 아이는 바빠서, 나로서는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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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자네 반찬 가게가 있는 이곳은 광명시이다. 올 봄에, 2년 정도 살 예정으로, 안양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집 아이와 시집간 큰 아이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계속 안양에 머물렀던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어 이사를 감행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4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세 번이나 이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사를 온 곳이 하필 광명시라니...... 사람은 자기가 아는 곳을 찾게 마련인가? 나는 신혼 시절 7, 8년 정도를 광명시에서 살았다. 광명시 철산동.
올 봄, 아이를 데리고 집을 보러 다니는 중에 철산동도 둘러보았다. 지금은 고급의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모두 5층짜리 아파트였다. 우리 아파트는 11평짜리였다. 방은 두 개였고 거실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좁은 곳을 잘 견디어내었다. 아내는 그곳에서 큰 아이 돌잔치까지 치루었고, 한 동안은 시동생까지 데리고 살았으며, 나는 나대로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막바지였을 것이다. 아내는 몸보신을 해준다면서 안심을 자주 구워주었다. 등심보다 맛은 떨어져도 육질이 연해서 안심이 나한테 잘 맞는다는 것이었다. 장기간 자주 거래를 했기 때문에 동네 정육점에서는, “소 한 마리를 잡아도 안심은 두어 주먹 정도밖에 안 나와요.”라고 하면서, 고기를 남겨두었다가 우리에게 내 주곤 하였다. 그 시절, 우리는 또 무엇을 먹었던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지 않다. 주말이면 우리는 아이를 안고 — 작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다 -- 고개 넘어 광명 시장에 갔다. 시장 좌판에서 오징어 튀김을 먹기도 했고, 다도해라는 이름의 일식집에서 회덮밥을 먹기도 했다. 월급날이면 영등포 역전의 번화가까지 진출했다. 거기에서 먹은 것은 기껏 만두 한 판과 비빔냉면 한 그릇이었지만, 젊은 부부는, 순전히 젊은 탓에,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을 느끼면서 은근한 자부심까지 느끼곤 하였다.
며칠 전에 봉자네 반찬 가게에서 봉자씨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저, 음, 예전에 선생님 하셨던 분 같애. 젊잖으신 게...... 맞죠? 선생님 하셨죠?” 그녀는 ‘선생님 하셨죠’라고 분명히 과거형으로 말했다. 요즘 광명시에서 내가 제일 자주 가는 식당은 ‘전주 손칼국수’라는 간판을 단 곳이다. 종재기에 보리밥도 조금 내 오는데, 3시 이전에 가면 점심특선이라 하여 5천원만 받는다. 무엇보다도 조용해서, 혼자 먹기에 좋다. 젊은 주인 여자는, 발달 장애가 있는 딸을 대리고 일하는데, 내가 가면, 그렇게 잘 해 주려고 한다. 친정아버지나 작은 아버지 같이 느끼는 것일까? 과잉 친절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이러한 수상한 시선에 나는 약간의 자격지심을 느끼지만, ‘혼밥’ 하기에는 역시 제일 편한 곳이라서, 상을 차리기가 귀찮아질 때면, 나는 또 그 집을 찾곤 한다.
오늘 점심에는 냉장고에서 멸치볶음과 콩자반을 꺼내오다가 콩자반 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리그릇은 산산조각이 났고 수십 개의 콩 알갱이는 사방으로 튀었다. 사랑은 한 마리 배추흰나비, 저승길에 동행이 되어준다.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이 슬픈 거지. 어쩌면 저 세상에서 정말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거야. 나는 멸치볶음 통을 손에 든 채 꼼짝하지 않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 그것이 무슨 일인지를 알아차리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사람처럼. 침착하게. 자, 침착하게.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청승맞기는 뭐가 청승맞아? 식생활 개선? 웃기고 있네. 이 정도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거야. 제일 중요한 것은 유리 조각을 완전하게 훔쳐내는 거야. 맞아. 그런데, 그 여자가 정말로 봉자씨였을까? 봉자네 반찬 가게에서 나한테 “예전에 선생님 하셨던 분 같애.”라고 말한 여자 말이야. 봉순씨가 아니었을까? 가서 물어보지 뭐. 유리 조각이랑 콩 자반 먼저 치우고.
첫댓글 광명시. 나에게도 추억이 많지. 남남관계, 남북관계, 밤샘 마이티... 조교수 하고도 많지? 새로 추억거리 만들어봐. 봉자 자매도 좋을 것 같은데...얼굴 너무 따지지 말고...분양도 생각하면서^^ 그리고 ‘달라는대로 준다’는 너무 19금식 표현 아닌가??
조 교수님 댁이 광명시라니 글이 더 다정해집니다. 아들 부부가 광명시에 살아서 인가?
명서 님의 댓글을 읽으며 옛날 신형식 목사와 옆집에 살 때가 생각나고, 학교 게시판에
백원기 선생님께서 쓰라고 하신 글을 백묵으로 쓰느라 안간힘을 썼는데 명서 님의 글씨는
참 멋젔습니다. 45년 전 이야기입니다. 모두 강건하시길 빕니다.
아드님이 광명시에 사는군요. 나는 하안동. 명서는 글씨도 잘 썼지요. 분양? ㅋㅋ 김위원이 그런 농담을 다 하다니. 그런데 남남남관계? 남북관계?
영태교수 이러다 "완전한 광명"이란 제목의 책 쓰는거아녀? ㅋ봉자씨가 봉지에 짭조롬한 콩 담아 주시면 맛있겠다~
ㅎㅎ 그래 비닐 봉지에 담아주더라. ㅋ '완전한 광명'? 빛 광, 밝을 명. 좋은 제목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