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마을로 나가
입춘을 사흘 앞둔 이월 첫날 수요일은 날씨가 포근한 편이었다. 간밤은 늦도록 청년기부터 평생에 걸쳐 교류가 있는 벗과 차수를 변경한 술자리를 가졌다. 낮에 문학 동인들과 탐매 트레킹 일정을 잘 보낸 귀가 후 벗과 예정에 없던 야간 전투를 치렀으니 이튿날 아침은 생활 속 남기는 글을 늦게 마무리 지었다. 점심나절까지 집에서 미적거리다 정오가 지나 산책 걸음을 나섰다.
새날은 이틀 연속 저녁 자리가 약속되었다. 십여 년 전 근무지에서 만난 동료가 이번 이월로 퇴직하기에 식사 자리를 주선했다. 그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지기와 나의 친구도 포함하니 넷이 모일 자리였다. 저녁은 저녁이고 낮에는 낮대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어 떠올린 행선지로 길을 나섰다. 점심 식후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 반송 소하천을 떠라 원이대로로 나갔다.
대방동을 출발해 대산 들녘 송정으로 가는 32번 녹색 버스를 탔다. 시내를 벗어나 도계동 만남의 광장에서 용강고개를 넘어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사무소 앞을 지났다. 봉강으로 가는 새로 뚫는 우회 지방도 공사는 마무리 단계로 개통이 임박한 듯했다. 거리에는 지역민들이 환경 단체 갑질과 횡포로 못 살겠다는 현수막이 내걸려 눈길을 끌었다. 주남저수지 철새 보호 때문인 듯했다.
주남삼거리에서 단감 테마공원을 지난 고양과 석산을 거쳐 마룡마을에서 내렸다. 마을 앞은 주남저수지의 갯버들이 보이는 경작지가 가까웠다. 마을 안길을 걸으니 마룡 지명 유래가 적힌 간판이 나왔다. 백월산 산세가 남동쪽으로 뻗은 용마혈에 해당한 곳이라 마룡이라 불린다고 했다. 가을에 수확한 단감을 저장한 저온 창고와 겨울에도 직원들이 김치를 가공하는 공장이 보였다.
마룡마을 안길에서 언덕을 넘으니 석산마을이 나왔다. 예전부터 차창 밖으로 봐둔 덩그런 기와집이 궁금해 그곳을 향해 갔다. 마을 회관 곁의 주차장을 지나니 고풍스러운 집이 몇 채 나왔는데 ‘도봉서원’이었다. 도봉서원은 김해 출신 상산 김 씨 김명윤을 향사하는 재실을 겸하였다. 김명윤은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에 이어 충주 목사를 지낸 무인으로 일등 공신에 오른 이였다.
김명윤은 호가 동산으로 젊은 날 무과에 급제해 몇몇 고을 수령을 거쳐 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수행원이 되어 외교에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선조 임금을 가까이 보필한 공로로 공신록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칼이 유물로 전해 온다고 했다. 그의 사후 유림들이 서원을 세워 충절을 기렸는데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후대에 복원된 건물이었다.
석산마을 동구로 나가니 아까 도봉서원의 주인공인 김명윤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포장된 찻길을 건너 마을 앞으로 가니 야트막한 언덕의 단감과수원과 저지대 습지가 나왔다. 넓은 과수원의 단감나무는 전정 작업을 하다가 멈춰 놓은 상태였다. 과수원은 주남저수지와 이어졌는데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고니와 큰기러기들이 평화로이 노닐다 내 인기척에 놀라 날아올랐다.
벼를 거둔 일모작 논을 지나니 포장된 찻길은 아까 들렸던 마룡마을 어귀로 이어졌다. 차도와 가까운 곳에 나와도 안면을 트고 지내는 문인의 ‘운경시원’이 나왔다. 운경은 여든 중반에 이른 김종두의 아호로 본인이 묻힐 유택을 미리 준비해 놓은 곳이었다. 우리나라 근대 조각을 연 김종영과 사촌 간인 김종두는 평생 분재 묘목 농사를 지으며 시 창작으로 맑은 영혼을 가진 분이다.
운경시원을 둘러보고 본포를 출발해 오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복귀했다. 이달 말로 퇴임을 앞둔 지기와 가질 저녁 자리로 향했다. 넷은 같은 또래인데 백수 클럽 입문은 약간의 시차가 있었다. 도청에서 퇴직한 꽃대감이 가장 먼저였고 문인화 화실에 나가는 친구가 뒤를 이었다. 작년에 나를 이어 뒤 또 다른 한 지기가 인생 후반전 출발선에 서게 되어 잔을 채워 비우면서 격려했다. 2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