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생각 / 홍속렬
내 유년시절은 시방 생각 해 보면 정말로 불행한 시절로 기억된다.
뮬론 6.25란 불행한 전쟁이 있었지만 부모를 잘못만나 더 큰 불행을 겪으며 살아왔다 생각된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난 흙 수저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난 결혼하면 가장 이상적인 가정을 이룰 거야. 그렇게 결심을 했다.
군인이면서 박봉을 모두 다 집에 송금하여 부모님과 동생들을 부양했다.
베트남 전쟁에 가서도 받은 수당 모두를 집으로 송금을 했고 가족이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좀처럼 가난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청년시절엔 결혼을 할 생각을 못 할 정도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가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선수였고 싸움도 최고였고 공부도 잘했다.
좋아하는 여자 아이도 가난 때문에 열등감으로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시방 생각해보면 참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 . .
아버지 / 홍속렬
아버님은
운동화 대신
늘 검정고무신만 사 주셨다
공을 차니
빨리 떨어진다는 이유에서
고무신코를 눌러도
발가락에 닿지 않는 고무신
언제나
느슨해 새끼줄로 묶고
조그만 고무공을 찼다
내가
한국대표 축구감독으로
태국에 가 킹스컵 대회
우승을 할 때
한국최초로 칼라 티비
방영을 해 줄 때
아버님은
동네 사람들에게
내 자랑을 했단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의
박수를 받으셨단다.
그것도
세월이 훨씬 많이 지나
누나가 전해준 얘기
위 시와 같이 가족의 가난은 나의 가난이고 육군상사의 급여가 기본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박봉이니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몇 번 연애를 했다. 그때마다 내게 콤플렉스로 다가오는 건 가난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크게 도움을 줘 생명의 위협에서 건져준 아가씨와 교제를 했다.
두 사람은 깊이 서로를 신뢰 했고 인격적으로도 매우 좋은 관계였다.
아가씨 집에 인사를 갔다. 우선 부모님이 매우 싫어하는 눈치다. 그도 그럴게 유학까지 다녀온 딸을 육군 상사에게 줄 수 없는 부모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이해를 했다. 그래 헤어졌다. 늘 가난이란 그림자가 늘 날따라 다녔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청년 때에 늘 이상형으로 꿈꿨던 가정을 이루려 노력한다. 첫 딸을 낳았다. 온 세상을 얻은 기쁨으로 첫딸을 맞는다.
육군 대표 축구감독이 되고 상무로 까지 이어지면서 나는 가정에 충실 했고 아이들 셋을 사랑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아내가 아이들에게 시켰다 그래 우리 두 아이들은 음악을 전공했다. 그런데 1990년 여자축구대표 팀이 공개모집을 통해 팀이 구성이 됐고 상무 체육부대에서 훈련을 시작한다. 내 불행의 시초가 시작되는 거였다.
엉터리 팀이 경기에 나가 형편없이 패하는 걸 본 후 나라가 위급 할 때 애국자가 필요한 것처럼 내가 여자축구를 하자고 결심하고 여자축구를 시작하므로 나와 가정은 어려움을 겪어 오늘에 이른다. 그 좋은 철갑통 직장 상무를 제대하고 여자축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전역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약속한 목사님이 약속을 안 지키므로 몽땅 여자팀의 데미지가 내 어깨에 짊어지게 된다.
사재를 다 털어 팀 운영을 하다 보니 그만 난 빚더미에 올라 온 가족이 파산을 하게 된다. 공부하고 음악을 하는 아이 둘은 유학을 가야 마땅하나 아이들의 교육 보다는 여자축구에 미쳐 있는 애비 때문에 국내에서 음악공부를 한 아이들은 대성 할 수 가없다. 음악은 사대주의가 팽배해 유학 파 아니면 행세를 못한다.
멀리 중미 땅에 선교사로 나와 있으며 겪는 어려움보다도 가족들에게 못한 것들이 생각나 많이 힘들고 괴롭다. 청년시절에 꿈꿨던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려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니 이제 2년 반 이곳에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발길이 무겁고 힘이 든다. 두 딸 결혼도 못 시키고 막내아들의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그만 바깥사돈의 교통사고로 회복 될 때까지 무기 연기가 됐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별로 행복해본 적이 없다. 신혼 초. 그때가 가장 내 일생 중에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말 할 수 있고 나머지는 수고하고 애써도 불행에서 탈출해 나 올 수가 없다고 본다. 불행한 놈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나보다. 노력하면 그만큼 댓가가 주어져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야 하나이건 늘 가난을 등에 지고 살아가니 아니 답답할 수가 . . .
새벽에도 기도를 하며 큰 딸에게 미안한 점 때문에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며 미안한 마음에 아직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나의기도 . . .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다 하나님 뜻이 아닐 때
하나님께서는 “넌 그렇게 불행 속에서 날 찾아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오너라.” 하시는 모양이다
가난은 내 숙명이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덧이다.
그래 무능한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미안해 귀국하는 마음도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