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인성이 삶의 다양한 변인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관점과 타고난 본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관점의 차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확대되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 중국인들이 과학을 일찍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호기심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인간계와 다른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연계’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단지 침술만으로 장기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한방의학은 중국인들의 이같은 세계관을 대변한다. 맨발로 걸어서 발바닥을 자극하는 것으로 몸의 기능을 개선한다든가, 귀의 바깥 살이 몸안의 장기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것도 그렇다.
중국인들은 귀나 발바닥과 같은 전체(몸)의 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실재(귀/발바닥)에 ‘본질’을 부여하고, 개개의 기관이 특정한 ‘범주’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개념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귀나 발바닥이 개별로서가 아니라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 전체(몸) 안에서의 일부로 기능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 개념으로는 귀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라도 귀만 떼어내어서 기능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중국에서 수술이 발전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다. 따지고 보면 이건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인의 세계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서양에서는 중국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어느 하나가 더 우수하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요즘 개념으로 말하면 어떤 자연현상이나 사회 문제를 매크로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마이크로로 접근할 것인가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만을 말하자면 마이크로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는 환자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중국인과 프랑스인이 비슷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해법으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다. 예를들면 동양 사회에서의 개인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파악되는 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고대 그리스나 근대 이후 서양에서는 ‘사회적 관계를 떠난 독립된 행위나 속성’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파악된다. ‘가족이나 사회 같은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된 나’와 ‘맥락에 구속되지 않은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나’는 유사한 정신적 이상 증상이라고 해도 해법이 달라질 수 있다.
지난주에 난 10년 이상 지속된 동창회 정기 모임에서 개근상을 받았다. 30여명이 참석했던 이 날 행사에서 매년 2회 개최되었던 이 모임에 나는 개근을 한 유일한 회원이었다. 상은 개별 회원과 조직을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에 대한 공식적인 격려다. 화목하게 모임을 유지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중간 다리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 이상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의 눈으로도 나의 개근에서 특별함이나 탁월함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행위나 역할에 친구들이 대집단 안에서 잘 어울리고 조직이 원만하게 유지되었으면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 이 조직 안에서의 나의 행위를 돌아보면 조직과의 관계보다는 주어진 개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보다는 나 자신을 앞세웠던 것이라고 하면 보편주의자라고 하기 보다는 개인주의 경향이 강한 인간이라고 자평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