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년~1909년)
19세기 일본 정치계 최대의 거물이자 한국 침략의 원흉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를 다진 정치가 한마디로 말하여 19세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재림과 일본의 간웅
야마구치 현 쿠마게 군(現 히카리 시)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국 한자음으로는 '이등박문'이라 읽으며 한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 이토 암살 후 이토를 기리기 위해서 서울 남산에 지어진 사찰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博文寺)이다. 참고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나 출판사 박문사는 이 사람과 무관하며, 한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다.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식민지 국가에 만행을 일삼았던 인물들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기무라 헤이타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정말 말 그대로 온 국민이 다 안다. 아무래도 몇 안되는 독립운동가의 암살 성공 사례이기 때문인 듯하다. 때문에 한국인에게 '구한말 침략의 원흉' 이라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수로 따지면 5~6위나 될 정도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동성(同姓)이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흔한 성씨라는 것. 그런데 이 사람 때문에 박힌 '이토' 씨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이토 성을 가진 수많은 일본인들이 여럿 봉변당했다. 일본인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한국에선 일단 성을 바꾸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다. (양육자의 재혼, 부모 중 다른 한 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결혼만 해도 성이 바뀐다. 심지어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처가 쪽으로 바꾸기도 하고(대표적인 사례가 김전일).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일 또한 흔하다.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가 없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씨가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일왕의 전쟁책임에 대해 주장했던 양심적 정치인인 이토 잇쵸 전 나가사키 시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일본에서는 초대 일본 총리로서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現 일본의 의회 제도와 양원제를 확립한 위인으로 분류된다. 일본 국회건물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서있다. 심지어 패전 이후에도 1,000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이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교체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리스케(利助)였으나, 천하다 하여 도시스케(利助), 슌스케(春輔)를 거쳐 히로부미(博文)로 이름을 고치었다.
원래 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林十臓)는 소작농을 짓는 농민 출신이었지만, 추겐 미즈이 다케베에게 근면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겐 신분을 얻는다. 추겐(中間(ちゅうげん))이란 최하급무사 아시가루와 평민 사이의 세습제 신분으로 짧은 칼을 차는 것은 허용했지만, 상급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하는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이 신분 출신이었다. 이윽고 미즈이 다케베가 이토 가의 양자가 되면서 아시가루가 되고, 두 부자도 하급무사 아시가루 신분을 얻는다.
1857년, 16살 때 요시다 쇼인의 마츠시타(松下)촌숙을 찾아가 배웠다. 15살 때부터 초슈번의 지금의 말단 공무원(9급 공무원)으로 에도만 경비직으로 파견갔는데, 윗 상관인 쿠루하라 료조가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추천하면서 거기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다. 신분이 낮아서 교실 밖에서 서서 수업을 들었다고도 한다. 쿠루하라 료죠, 카츠라 코고로의 종자(하인)일을 하면서 공부했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에 조슈 번 유신지사로 메이지 유신을 위해 크게 활동하고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나 이노우에 가오루, 노기 마레스케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슈계 인사들은 대부분 쇼인의 제자. 가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봐도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타카스기 신사쿠, 부정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출세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요시다 쇼인의 마츠시타촌숙 선배들의 행동대장 똘마니 노릇을 하던 히로부미. 선배 자알 만난 덕분에 영국 유학도 경험하고 능력있는 선배들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밥상 차릴 때, 부엌에서 밥이나 짓던 쫄따구 히로부미. 선배들이 밀어주고 당겨줘서 고위직을 맡고, 선배들이 차례차례 죽으면서 어느새 자신이 일본 초대 총리로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물론 개인적인 능력도 있었고 국제 정세를 읽는 감각이 있었지만, 한 마디로 선배 잘 만나서 대성공한 케이스.
이토는 쇼인에게는 인정받은 일이 없고 (쇼인이 이토에게 내린 평가는 한마디로 "재능없음"), 오히려 타카스기 신사쿠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는 나이 차이도 있고, 계급 차이도 있었지만 절친한 평생의 동지였다.
1859년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의 대옥사로 죽은 후, 존황양이 도쿠가와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불타오른다.
19살 때인 1862년 다카스키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일당이 주도해서, 에도의 시나가와에서 건설중이던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 적도 있고, 본인은 부인했지만 천황의 퇴임을 주장한 국학자를 암살하기도 했다(1863년 2월).
22살 때는 상급 무사 이노우에 가오루(당시 28살, 사진의 하단의 좌쪽의 인물)의 제안으로 '조슈 파이브'라고 불리우는 친분이 있었던 4명와 함께 조슈 번의 거액의 공금을 횡령 해서 그 돈으로 영국으로 밀항(1863년 5월 12일), 영국에서 해군 기술을 배우려고 유학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요코하마항구를 출발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초슈 번과 영국사이에 전쟁(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 이 소식을 알게되고 영국생활 6개월만에 귀국을 결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사상적으론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영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선진문명을 접하면서 존황양이에서 양이를 버리고 개화파로 돌아선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 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의 영국과의 중재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영어 실력은 서툴러서 실제 통역은 영국측 어네스트 사토가 다했다.
막부(幕府)와 조슈번(長州藩) 사이에 벌어진 막장(幕長戰爭. '제1차 조슈 정벌')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타카스기 신사쿠의 시모노세키 거병)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타카스기의 거병에 맨 먼저 참여했고 이것은 일생 자랑거리가 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맨 나중에야 거병에 참여했는데, 이토는 이 일을 들먹이면서 평생 야마가타의 기를 죽였다. 그때 너는 뭐하고 있었어?
도사, 히젠(사가), 사쓰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조슈와 사쓰마 파벌을 중재하면서 사쓰마 파벌의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며, 오쿠보, 기도 등의 거물들이 잇따라 숨지면서 생긴 정권의 공백을 메우면서 수완을 발휘하고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와의 정쟁 직후 메이지 정권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평민이나 다름 없던 일개 하급무사가 멀쩡한 무사들도 평민이 되던 시절에 되려 공작이 되는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극초반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비주류노선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사쓰마 파벌의 영향력이 워낙 강한 초기에는, 정치인-관료 진영의 (비교적) 온건파 조슈 파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듯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놀러 갔다. 정확히는 사냥을 하러 갔다. 이 와중에 안양에 사는 농부인 원태우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조국을 몰수당하게 만든 을사조약에 대단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양에서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사가 시작되기 전, 이토가 타고 있는 열차가 오는 것이 목격되자 동료 중 하나가 겁을 먹고 바위를 치우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럼에도 원태우는 돌을 집어서 그걸로 이토를 향해 힘껏 던졌다. 서리재 고개에서 달리는 기차를 향해 돌을 던져 맞혔고, 그 짱돌은 유리창을 깨고 거짓말처럼 이토의 머리에 정확하게 명중 되었다. 이 때 깨진 유리조각도 같이 이토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조치를 해서 살아났다. 돌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조선시대의 평민들은 석전이라는 돌 던지기 싸움 놀이를 심심찮게 했다.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성불구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다, 정말 다행히도 대한독립을 보고 1950년 시흥군 안양읍 비산리 수푸루지(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족상잔이 벌어지기 전에 돌아가셨는지, 벌어진 뒤에 돌아가셨는지는 불명. 보셨더라면 분명히 통탄하셨을 거다. 암살이 미수에 그쳐 안중근 의사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진다.
이 사람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모습을 새긴 동판이 있다. 그런데 그 동판이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누군지 이름 읽기도 어렵다. 안양 사는 사람 대부분이 그냥 장식인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원래 농부인데 동판엔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다. 정말 제대로 표현한다면 23살의 농부로서 이토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표현해야 했다.
3.2. 2차 시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하얼빈역에 정차했다.
당시 이토는 이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던데다 더욱이 원태우의 암살 미수사건 때문에 그 후 이토는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저격대상인 이토가 코 옆에 점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역으로 가게 되었다. 또한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체념했으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덕분에 안중근 의사가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중근이 이토를 FN M1900으로 3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혔고,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혔으며,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혔다. 3발 다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혔다. (네이버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코레아 후라! 코레아 후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 의사의 저격을 받고 열차 내로 옮겨졌다. 이토는 이 때까지는 살아있었으며 동반했던 비서 모리의 안부를 묻고 눈을 감았다. 참고로 유언으로 "당했다" 라거나 자신을 저격한 자가 한국인이란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는 "멍청한 놈" 등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전부 거짓말로 밝혀졌기에 의미는 없다.
그 외의 내용은 이 기사 참조. 유언, 제2 암살설 외 다른 이야기도 분쇄한 기사이다.
3.2.1. 암살에 대한 논란
•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안중근 의사가 국제정세에 밝았더라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였을까, 한국이 한일합방을 당한 건 안중근이 이토를 죽여서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구글에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멍청한 놈>을 키워드로 쳐서 검색하면 2010년까지만 해도 수도 없이 이런 얘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라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비록 항의 끝에 수정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주장에는 그렇게 해석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일단 한국 병합 부분만 놓고 따지면 분명 이토 히로부미가 명시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고, 정확히 말하면 합방 자체는 필연이었다. 그러나 이토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강경파 득세를 견제하고 한국을 최대한 온건하게 대하려고 했던 세력의 대표자였다. 때문에 이토 사살 이후 견제장치가 사라진 제국주의 강경파는 폭주하여 식민지화된 한국을 특히 더 강하게 억압, 탄압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은 순종 황제부터가 이등박문은 나의 스승인데, 이를 암살한 안중근은 미치고 도덕을 모르는 자라는 칙문을 발표할 정도로 이 암살은 논란거리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면 일제의 주권 침탈이 철회되고 독립이 보전되리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실은 견제장치가 사라진 일제와 송병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들에게 힘을 싣어주는 결과가 되었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가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긴 어려웠겠지만, 이 암살은 더욱 급진적인 한일합방, 애국 세력의 색출 및 박해 등에 기여하였다.
• 하지만 안중근의 판단 미스와 별개로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한일합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냐면 그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일합방은 사실상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일본과 장기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고, 어중간한 선전포고로 진주만에 선빵을 치며 폭주하는 일본과도 제대로 한번 혼내주고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포츠담 선언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이는 태평양 건너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에서 장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이다. 즉 한일합방을 견제할 세력이 아무도 없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동양의 세력구도를 결정짓는 요직이었고,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고 추밀원 의장이 된 상태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도 있다. 사실상 한일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황태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한국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는 주장이다. 이후 실제로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에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긴 했다. 이런 것 보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즉 오히려 이토가 한국의 뒷처리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총리직 등 국내 요직을 일부러 떠나있었다는 것이다.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 독립군으로서 일본과 교전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전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으로 안중근 또한 일본측에 본인은 독립군 중장의 신분이니 전쟁포로로 취급해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제협약상 교전권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교전권자임을 상징하는 의상, 즉 독립군복 등을 입고 총을 쐈으면 또 모를까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이토를 사살했기 때문. 법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공격하는 행위를 국가간의 교전으로 인정하면, 민간인을 위장한 적군으로 오해하여 민간인을 사살하는 등 여러 위험성을 증가시키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건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일제의 국제법 위반은 안중근을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은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사형 판결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에 있다. 일본은 이미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시키기로 정해놓고 안중근의 의견을 모두 묵살한 채 사형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도 국제법 위반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국제법의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던 시기이기는 하다.
"남자는 배꼽 밑으로 인격이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가히 원조 색욕마인이라 불리기에 적절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널렸던 대표적인 견공자제분(그런데 정작 히로부미 본인은 한일병합 전에 사망). 여자문제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다.(어린이를 상대로 성폭행을 가했다는 의미인지는 출처 추가 바람)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뭇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다. 그 중의 한 명이 이와쿠라 토모미의 딸이었다. 다행인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돈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넘겼다고 한다.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놈은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 스캔들 메이커'였다.
한편 친일반역자 배정자를 수양딸로 거두었다는 둥, 애첩으로 뒀다는 둥의 소문이 유독 한국에서만 나돌고 있지만 사료적 근거는 전무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워낙 유명한지라 그가 사망했을 때에도 여자 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일본 신문에 실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생전 사귀었던 여성들의 신상은 일본 언론이나 사학자 등에 의해 모두 밝혀졌지만 그 어디에도 배정자(일본명 다야마 사다코)의 이름은 없다. 실제로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 간의 비밀스런 관계나 출세 배경에 관한 일화의 원출처는 모두 배정자 본인이거나 악랄한 그녀의 행적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간의 소문이 전부다.
또한, 최승희와 함께 192-30년대를 풍미하였던 무용가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인데 사실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사생아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다. 배구자의 동생 배한라는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라고 직접 발언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배구자 또한 2003년까지 살면서 98세의 나이로 장수를 했는데 말년에는 자신이 메이지 천왕의 10번째 딸이고, 할머니는 민자영 이고, 자신의 어머니는 조선의 공주라는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
일본 내에서는 온건파 노릇을 했던 탓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그가 죽은 덕분에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사람이 일본에서"만" 온건파였던 건 사실이다. 초대 총리로 입헌군주제의 확립 등 일본의 근대화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며,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평화주의자적인 행보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모두 개전에 반대했다. 이 점이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취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안중근 의사에게 죽었을 때 실제로 기뻐한 것은 이토의 정치적인 적들이었던 보수파 정치인들인 것도 사실이라고. 마리우스 젠슨 같은 일본근대사 학자는 이토를 정치적 수완과 미래에의 비전을 동시에 갖춘, 메이지 원로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반면 일본 제국의 폭주에 명확한 책임이 있는 군국주의자 야마가타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다른 원로들은 뭐 총리대신직을 감당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그냥 쩌리들이고, 사이온지 긴모치는 다음 세대에 가깝다.
이토 히로부미는 경비가 많이 드는 합병보다도 한국을 완충지대로 두고, 강력한 일본의 영향력안에 드는 "한국의 속국화"를 기획한 약간은 온건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가쓰라 다로 등 정부 요인들의 한국병합이라는 결과를 승낙한 뒤,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형식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는 떼어내고 비록 중부 지역만을 명목상 주권자로 당시 베트남 황실이었던 완조에게 남겨졌지만 실상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지배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 베트남에 황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봐도 프랑스의 통치임이 명백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출신 성분에 있다는 견해가 보통이다. 일단 정치적 성장 배경이 진보적 유신지사들이 주축이었던 조슈파였고, 그곳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기에 온건파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초대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한론 정변에서 정한파를 몰아내고 승리한 주역으로서 일본 정부의 거두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다음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른 말로 당시 이토의 제국주의 정책이 온건하게 보일 정도로 당시 일본에서 과격한 주장들이 많았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일본에서 영어에 능통하다는 점이 크게 먹고 들어갔다는 점이다.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가 그만 둬도, 영어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즉 자기 실력 이전에 정치적 뒷배경이 그를 온건파로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거기다 온건파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총리가 되었으니 온건파 코드 인사 등용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또 영어에 능통하여 서양 문물과 당시 세계 정세를 잘 알다보니 이 사람의 정책 기조가 서양식 국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니 민주주의니를 도입하며 국가간 평화 등을 강조하면서도 제국의 확장에 열중하는 서구 열강의 모습까지 그대로 카피해버렸다! 이 때문에 강대국의 입장이 되기 위해 근대 제국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19세기 정치가였다. 그리고 고종은 이런 인물에게 대한제국의 최고훈장인 금척대훈장을 내리며 꼬시려고 했다. 사람을 잘못 고른 셈… 그런데 오판은 심지어 이토를 암살했던 안중근 의사까지도 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순 있겠다.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처단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 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황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에 돌려줄 마음이 없었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한국인 첩도 있었다(...)
파일:external/www.imaeil.com/20090828_161108000.jpg
한복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다. 이토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다. 한국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는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황실에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 본마누라 우메코(梅子)에게 한복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가운데의 갓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기사 링크 책 링크
또한 을미사변에 당시 총리였던 이토를 비롯해서 무츠 무네미츠 등 일본 내각이 개입했다는 증거 자료가 공개되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파이며, 한국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진보 중에서는 김기협 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토는 식민지 주민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대단히 제국주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이 보호국이란 이집트에서의 영국과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서부에서의 미국처럼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긴 사례처럼 지역 또는 국권을 강탈하는 포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일병합을 묵인하고 을사늑약, 고종 폐위를 통해 한국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노예'를 다루듯이 '채찍과 당근'처럼 채찍을 '덜' 때리면서 이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한 인물이다. 당연히 이런 행보를 일반 백성들이 알리 없었고 이토의 겉모습에 속아넘어가 친일파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 이토는 한국인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대단히 제국주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격이다.
대외적(백성)으로는 감화정책을 펼쳤지만 내부적(한국)으로는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인간으로 한국인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던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국가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저항의 의지를 흐리는 식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만약 이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과격한 군부가 감화 정책을 통해 한국을 부드럽게 스며들게 해 한국의 독립의 의지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이 연상될 정도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1909년 대한제국 주재 프랑스 영사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토는 보호령을 경영하는 영국의 방식보단 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우리 프랑스의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만약 그 이야기대로 이토의 생각대로 온건적인 운영이 이뤄지고,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의 수탈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우리나라에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변할 게 없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한국에 미치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서도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 내의 반항을 줄이고 친일파의 득세를 통한 문화적인 종속을 꾀했기 때문에 독립군의 규모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그 의지도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한국인데 이토의 계획대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해이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게 된다면 직접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어 현재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 있는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나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현재보다 훨씬 더 큰 리스크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토의 암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위험한 변수들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토의 이후 계획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이토가 한국을 수탈하거나 한국인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기도 힘들며, 이토의 뒤를 이어 한국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헌병 경찰 통치로 조선인들을 탄압하는 등 이토 사후로도 한국 수탈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비록 온건파라고 해도 을미사변의 배후로 지목되는 만큼 잔혹한 행동을 해야 할 때는 할 수도 있을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이토의 성향을 모아봤을 때 그가 살아있어서 꼭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도조 히데키 같은 놈은 여전히 살아있으니… 설령 지속적인 온건적인 운영을 통해 한반도가 일본에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해도 내선일체 정책이 일본인 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한 것과 부라쿠민이나 아이누, 오키나와인, 히키아게샤의 일본 내에서의 인식과 대우가 어떤지를 생각해 보면 현재까지도 한반도 출신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본토 출신 일본인 사이에서 은연중에 차별이 자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안중근 문서에서도 나와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본 위인들에게 바쳐지는 신사가 없을 정도다. 예전엔 있었다. 한일병합 이후 경성부 종로에 박문사라고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가 건립되긴 했지만 8.15 광복 이후 파괴되었다. 그리고 현재 일본 본토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는 없다고. 대신 요시다 쇼인을 주제신으로 하는 쇼인신사에서는 그의 제자들도 신으로 섬기는데 제자들 명단에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도 있다.
뒤에 나오듯이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디즈레일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처럼 근대화의 주역이기에 평가는 엇갈려도 대체로 위인 취급은 해준다.
4.2. 결론: 일본 근대화와 한국 식민지화의 일등공신
19세기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정치가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일본내의 역사적인 평가는 호의적이다. 물론 이토 한 명이 혼자서 일본을 근대화시킨 것은 아니나 그가 일본의 근대화 및 선진국으로의 급부상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라는 것. 일본에서 평가가 엇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토를 위인으로 대우한다. 다만 최근에 들어서 일본에서도 수많은 학자들에게 안중근이 재평가되는 일이 많아지고 이토의 행실 하나하나에도 문제가 많은 게 드러나자 안습행보를 걷고 있다. 단 그것과 별도로 한반도에 개입하고 한일병합의 기초를 닦은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이웃나라를 희생시킨 제국주의자로 취급되어 공과를 평가받고 있다.
만약 그가 1905년 한국인에게 가장 증오스럽게 만든 을사늑약과 고종황제 강제 퇴위, 군대 해산 전에 이전으로만 한정되고 한국에 악행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오늘날에 그냥 한국에서 사카모토 료마나 이와쿠라 토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정도의 인물로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5. 지폐 속 인물
파일:attachment/erqerqerqe.jpg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다. 1000엔권 인물 도안은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였다. 그 뒤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지폐를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현재는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한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노구치는 과학사기꾼임이 들통났다. 자세한 것은 노구치 히데요 참조.
6. 기타
구한말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사람이 등장할 때는 배우 윤주상이 많이 연기하는 편인데, 실제로 많이 닮았다.
바람의 검심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판에서 등장한다.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권력을 위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냉혹한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켄신을 체포하도록 전국에 포고르르 돌리고 켄신이 제발로 잡혀 들어오자 온갖 소리를 다 붙여 켄신에게 시시오를 처단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놓고는 후에 켄신이 연옥 호에 지난 지 시간이 오래걸리자 아예 육상에서 포격을 가해 시시오와 켄신을 같이 매장시켜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간신히 나룻배를 타고 일행과 탈출해 돌아온 켄신에게 뻔뻔하게 사무라이라고 부르며 경례를 붙이는 모습이 압권.
아이돌 사변에서는 6화에서 일본을 만든 정치인으로 등장해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 주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