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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만 이철호한의사(문학관 관장)의 인생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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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방배동 서문여고 정문 앞으로 가면 아담하고 하얀 4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경암 이철호 문학기념관’이라는 글씨가 흘림체로 쓰여 있다.
사전에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한의사 이철호’는 알아도 ‘문학관장 이철호’는 십중팔구 다른 사람이겠거니 생각했을 터였다.
경암문학관은 본인의
호(경암·景庵)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흔히 문학관이라 하면 작가가 태어난 고향을 떠올린다.
땅값 비싼 강남 도시 한복판에 문학관 개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다른 도전 정신과 열정 때문이었으리라. 문학관 내부는 신문을 스크랩해서 펼쳐 놓은 듯하다.
한쪽 면에 서면 한 사람의 74년사(史)를 그대로 옮겨 놓은 약력이 빼곡하게 보인다.
다음 면에 서면 그가 집필한 수십 권의 책이 엘이디(LED) 조명을 받고 있다.
그 다음 면은 문인들이 그에게 보낸 자필 편지로 빈틈이 없다.
작고 문인 조병화 시인에서부터, 김동리 소설가 등 대한민국 문단의 역사를 수놓은 분들로부터 받은 편지이다.
그 밖에 그가 받은 상장과 상패 등이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다.
새삼 그의 꼼꼼한 자료수집 정신에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다.
“인생의 대부분을 한의사로 일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나요” 하고 물었다.
“사실은 내가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중학교 졸업장도 없어요. 그래서 상장과 상패를 유난히 챙기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한테 오는 것은 무엇이든 모아 두었습니다.
예전에는 인터넷 문화보다 편지 문화가 발달해서 서로의 안부와 격려를 편지로 하곤 했죠.
그때마다 모아 두고, 기념사진 찍은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둬서 이렇게 세월이 흐르니까 자료가 된 거죠.
먹어서 없어지는 것 빼고는 무엇이든 모아 두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쓰던 한약장이라든가 오래된 물건이 제법 있어요. 그것도 기회가 되면 전시를 해 놓을까 합니다.”
—흔히 문학관이라고 하면 작가의 고향 쪽에 개관하지 않습니까. 고향이 방배동인가요.
“방배동은 아니지만 출생지는 서울입니다.
35년 전 주차장도 없는 명동에서 한의원을 하다 건물을 사서 이사를 오게 됐어요.
그래서 방배동은 제게는 고향이나 다름 없는 장소입니다.”
원래 그는 의사인 외할아버지를 둔 나름 신문명(新文明)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런데 세브란스 의사이던 외할아버지가 지병으로 일찍 작고하고,
설상가상으로 6·25가 터지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는 중에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떨어진 그는 친척 집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머물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의정부에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3년 만에 어머니의 생존 소식을 듣자마자 그 길로 의정부로 달려갔는데,
재혼을 하셨더라고요. 충격과 배신감으로 밤새 철길을 걸어 청량리까지 왔어요.
그 당시 청량리역 부근은
양아치 굴이었죠. 거기로 흘러들어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꼭 그래야 했느냐고 하겠지만, 그만큼 저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절박했으니까요.
청량리에서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심지어 원주까지 가서 양키물건을 받아다 장사도 했어요.”
청량리 소년 양아치의 극적인 인생 反轉
—어린 나이(12살)에 어떻게 양키 물건을 원주까지 가서 떼다 팔 생각을 했나요. 유전적으로 이재에 밝은가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상 나이 관계없이 물건을 떼어다 파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기도 했어요.
나뿐이 아니고 고등학교 다니는 애들도 그런 장사를 많이 했어요. 제게 특별히 이재가 있어서가 아니고….”
—장사할 때 이야기를 해 주시죠. 요즘 같으면 고등학생이 상상도 못할 일 아닌가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아닙니까.
“나이가 어리니까 가짜
학생 교복을 입었어요.
그 안에다가 담배, 껌, 초콜릿, 비누, 치약 같은 것을 잔뜩 숨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책가방에다가 넣어서 가져왔어요.
원래 의정부나 원주 등에서 이런 것 못 들고 와요. 검문검색이 심하니까.
그런데 어리고 학생이니까 조사를 여간해선 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학생들까지 전부 조사를 하더라고요.
‘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며 완강하게 저항했는데 헌병이 날 확 밀치더라고.
그 바람에 내 가방에 있던 양담배, 비누 같은 것이
와르르 쏟아졌어요. 할 수 없이 헌병대에 끌려갔지.”
“엄동설한(嚴冬雪寒)인데, 옷을 다 벗기고 물건을 다 뺏어 갔어요.
헌병들이 나보고 물건 다 내놓으면 부모한테 인계해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난 부모도 없으니까 데려갈 사람도 없고,
또 물건이 내 전 재산인데 그걸 뺏기면 내 생명줄을 뺏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그걸 찾아가야 한다며 난로가에서 밤을 새웠어요.
아침이 됐는데 헌병대장
누이동생이 아침 밥을 도시락에다 싸 와서 오빠한테
주고 기다리는 동안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너 몇 살이니’라고 물어요. 오빠한테 전후사정을 듣더니, 뒷문으로 날 오라는 거야.
그러더니 옷을 갈아입히고 나한테서 빼앗아 간 물건을 전부 돌려주는 거야.
거기서 그친 게 아니고 날 집으로 데려가서 방을 하나 내주고
‘여기서 자고 일해. 구두를 닦든, 신문을 돌리든 너가 알아서 하고
그 대신 너 공부는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책을 잔뜩 사 왔어요. 내가 구세주를 만난 거야”
‘소년 이철호’는 이때부터 주경야독(晝耕夜讀)에 들어간다.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구세주 같은 누나를 만나기 전 초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중학교 입학 검정고시,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모두 합격했다.
뜻하지 않은 문학도의 길
—그럼 고등학교는 제대로 들어갔나요. 남들처럼.
“검정고시를 봤기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는 처음부터 진학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청량리에 있는 국립학교인 서울농업고등학교를 갔어요.
지금은 서울시립대학교가 됐는데, 그게 농업고 마지막 졸업생이죠.
짝꿍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새벽이면 신문 돌리고 닥치는 대로 돈 되는 일은
모두 하다가 결핵성 늑막염이 걸렸어요.
그 당시에 결핵성 늑막염은 폐결핵이라 해서 위험한 병이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엄마를 찾아갔어요. 갔더니 엄마는 나를 반겨 주지만
의붓아버지나 동생들은 나를 반겨 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몸이 아프니까 거기서 한 달간 요양을 하면서 겨우 회복을 했는데,
학교를 한 달간 결석하니까 출석일수가 모자란다고 졸업을 안 시켜 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했어요. 다음 학년이 있으면 차라리 낙제를 하겠다고.
그랬더니 교장선생님이 교무회의를 열어 졸업생이
약 300명인데 시험을 봐서 20등 안에 들면 졸업을
시켜 준다고 해서 제가 14등을 했어요. 그때 측량사 면허를 땄어요.”
건축측량사 자격증은 그가 딴 제1호 자격증이다.
그는 이후 측량기사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 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되려고 했던 그는 가톨릭대학 의과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의대 입학이 어려웠던 것은 마찬가지다. 가톨릭의대 합격자 발표날,
그는 자기 이름이 붙은 방(榜)을 보고 눈물을 쏟았다.
틈틈이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의대에 합격하리라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등록금을 구하려 여기저기 손을 벌렸지만 마감까지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을 해 놓고도
포기하고야 만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것은 ‘청년 이철호’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그는 돈을 들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대학을 골랐다.
바로 동국대 문학특기생이었다. 문학 공부를 별도로 하지는 않았지만,
글쓰기 실력 하나만 믿고, 무엇보다 입학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동국대학교 문학특기생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러곤 서울시청 주변에 친구 세 명과 조그만 가게를 하나 열었다.
고등학교 때 딴 측량사 면허로 청사진과 지적도 그리는 것을 대신 해 주고
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다.
—오늘날 문학인으로서의 기초소양을 대학에서 닦은 셈이네요. 대학생활 얘기 좀 해 주세요.
“내 자랑 같지만 내가 리더십이 좀 있어요.
더구나 한창 젊은 혈기일 땐데 4·19가 일어났잖아요.
난 그때 내가 ‘의병장’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정의를 위해 열심히 투쟁했지. 다른 학생들이 부러워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학회 회장이 됐어요. 학회장으로 있으면서 좋은 일 많이 했죠.
당시 미당(未堂·서정주) 선생이나 평론가 조연현 선생 등이 교수들이었어요.
어용교수 추방 등이 쟁점이었는데 내가 막았죠.
우리 학교에서 어용교수로 추방당하는 일을 없게 해 달라고 시위를 벌이니까
명동 깡패들이 와서 칼침을 놓았어. 지금도 여기저기 칼침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철호 지독한 놈’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동국대 국문과에서는 단 한 사람도 어용교수 희생자를 내지 않았어요.
조연현 교수의 《눈물의 사상》이라는 평론집 속에 내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더라고.”
—부인과는 대학 재학중에 만났다면서요.
“대학 1학년 때 만나 4년간 사귀고 군대 갔다 와서 결혼했어요.
집사람과 캠퍼스커플이었죠. 당시 지도교수님까지 다 알았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언제나 저와 집사람이 나란히 앉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쩜 대학생들이 그렇게 생각이 깊었는지 몰라요. 참 고마운 친구들이었어요.”
—군대생활 하는 동안 부인이 한눈팔지 않았나 보죠.
“군대는 헌병과를 갔어요. 그 당시 헌병 하면 인간 세탁장이라 해서
해병대하고 마찬가지로 훈련을 지독하게 받았어요. 점수가 좋은 탓에 서울로 배치를 받았죠.
그때 헌병과 출신들은 경호실, 보안사, 중앙정보부로 배치를 받던 시절이었요.
그쪽으로 들어간 친구들이 많아서 정부로부터 누구 연설문이나 담화문 좀 써 보라는 주문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 걸 써 주고 금일봉을 두둑하게 받곤 했어요. 그런 것들이 큰 도움이 됐죠.”
KBS 간부 고쳐 주고 일약 스타 한의사로
‘청년 이철호’는 대학 졸업 후 교사 자격증으로 경기도 이천 양정여고, 오산고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를 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의사의 꿈을 끝내 접지 못하고 그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시험에 응시를 했다.
안정적인 교사 생활을 팽개치고 6년제 한의과 대학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그때는 ‘한의사 그까짓것’이라고 생각할 때였어요.
골방구석에 앉아 돋보기를 봐 가며 약이나 써는 낙후한 직업으로 취급할 때였으니까요.
주변 사람,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 미쳤다고 했어요.
이제 공부해서 언제 한의원을 내느냐 그런 얘기였죠.
난 그래도 ‘시작은 늦지만 너희들보다 빨리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동창들에게는 돈키호테였고 완전히 정신병자였죠.
결혼도 했고, 교편 생활을 하면서 안정적인 길을 가면 되는데 그제사 무슨 한의학 공부를 하느냐는 거였죠.”
그렇지만 결국 남들이
미쳤다고 하던 길을 그는
마침내 완주(完走)했다.
한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받던 날,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한의원 개원 2년차 그는 정말 ‘남들보다 더 빨리’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의 절친이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씨와의 우연한 만남이 인생역전의 계기가 됐다.
당시 이갑성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지병으로 일찍 작고한 친구의 손자에게
이갑성씨는 정·재계 인사들까지 소개해 줬다.
당시만 해도 젊은 한의사가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젊은 한의사를 찾는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그는 명성을 쌓아 갔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유명
인사의 병을 고쳐 준 것이었다. 그의 설명이다.
“그 당시 KBS 편집국장인가 보도국장의 7년 된 대장염을 내가 두 달 만에 고쳐 주었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방송국에서 부르는 거예요.
방송 출연을 하고 나니까 하루에 백여 통씩 전화가
오고,
환자들이 몰려와 번호표를 나눠 줘야 했어요.
아마 그 당시 한의사가 매스컴 타는 건 제가 최초였을 거예요.
정말 사방에서 난리가 나고 일약 스타가 되더라고요,
어떤 중증 환자도 제가 치료만 하면 잘 나았어요.
불임 여성들도 한약을 먹고 효과를 많이 보았다고 하고요.
한번은 어떤 부인 하나가 찾아왔는데, 망부석의 코를 빻아서 먹고,
관악산 너럭바위를 홑치마를 입고 타면 임신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도 해 보았다고 해요. 울면서 찾아왔는데,
얼마 후 아이가 생겼어요. 나중에 돌잔치 때 초대해서 가 보니 모기업 3대 독자였어요.
이런 일들이 겹치니 당연히 제가 유명해질 수밖에요.”
무료진료 받은 사람들이 市의원으로 밀어
‘유명 한의사 이철호’를 찾는 곳은 환자들만이 아니었다.
한의사협회뿐 아니라
문인협회,
JCR(세계청소년기구),
서초로터리클럽,
라이온스클럽 등에서 그에게 손짓을 했고,
그는 각종 모임을 통해 유지(有志)들과 친분을 두텁게 쌓아 갔다.
자연스럽게 정치인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당시 이태섭 장관,
김동영 의원, 김영구 장관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교분을 쌓았어요.
이태섭 장관은 같은 4·19세대라며 저를 지구당(서울 서초을) 부위원장으로 세웠죠.
한참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웅평 소령이 제트기를 타고 (북에서)넘어왔어요.
당시 5000명 정도를 모으는 군중 환영대회를 준비했고 제가 그 일의 책임을 맡았어요.
그런데 강남에는 몇천 명이 들어갈 장소가 없지 않습니까.
2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광림교회를 빌려
행사 준비를 하던 도중 제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는 며칠간 혼수상태를 헤매다 깨어났는데 백혈구 감소증이라는 뜻밖의 병명을 알게 됐다.
백혈병은 지금도 치료가 쉽지 않은 질병인데
당시엔
사망을 선고받은 거나 다름없었을 정도의 중병이었다.
그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환자복 위에 양복을 껴입고
그 길로 강원도 강릉으로
향했다. 그의 계속된 설명이다.
“책이라는 책은 다 들췄지. 목숨을 건져야 하니까.
독사 쓸개즙도 많이 마셨어요.
새벽이면 배를 타고 나가 처음 잡은 생선을 날 것으로 먹기도 했고요.
그렇게 한두 달간 강릉에서 지내는데 어느 날 별안간 몸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솔직히 얘기하면 아침에
거기가 불끈 서더라고요.
그때부터 다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전국 사찰순례를 했어요,
전국 유명한 절은 전부 돌아다녔어요.
그런 다음 서울에 오니까 집사람은 제가 가출했다고
실종신고까지 해 놓았더라고요.
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해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그후 저와 비슷한 환자를 제가 경험한 방식으로 많이 고쳤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더 유명해지는 거 있죠.”
—백혈병 치료를 그렇게도 할 수 있나요.
“어찌 보면 오진(誤診)이었는지도 모르죠. 쓰러졌을 당시 감기로 목이 부어 항생제를 제법 세게 먹었거든요.
그러니까 혈소판 수치가 많이 떨어졌을 때 피검사를 하니까, 그런 결과과 나왔을 수도 있고요.
그건 나중에 저의 추측이고, 여하튼 살기 위해 별의별
약을 먹은 건 사실이죠.”
—독사의 쓸개즙이라고 하니 어쩐지 소름끼쳐요. 어떻게 드셨나요.
“제가 술을 안 마시니까 쓸개즙을 소주에는 못 타고
활명수에다 타서 마셨죠.
그리고 더덕을 사삼이라고 하는데, 모래에서 나는 삼이라 해서요.
설악산에 가면 그것도 백년 이백년 된 게 있어요.
그걸 탕제로 해서 마시기도 했어요.”
민간요법을 시도하면서
그가 빠지지 않고 했던 것은 기도였다.
부처님에게 살려만 주면
하루에 한 가지 좋은 일은 못하지만
일주일에 한 가지는 꼭 좋은 일을 하겠다고,
그동안 너무 비참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좀 살아 보려고 하는데, 너무 불쌍하지 않으냐,
제발 나를 살려 달라는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얘기가 잠깐 옆으로 샜지만 그는 이 일을 설명해야 그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과정을 알아들을 수 있다며 계속했다.
“그래, 부처님 덕으로 살아났으니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매주 월요일은 간호원을 데리고 달동네 돌아다니면서 무료진료를 했어요.
그걸 딱 10년을 했어요.
10년을 채웠더니 나한테
무료진료를 받은 사람이 4400명이 되더라고요.
제가 방송출연을 하니까, 저 한의원에 가면 병이 꼭 나을 것 같은데,
워낙 비쌀 것 같다며 못 오고 있는 사람까지 죄다 고쳐준 거죠.
그러고 나니 동네에서 이리 가도 인사를 하고 저리 가도 쫓아와서 선생님, 선생님 하고 인사를 하는 거예요.
무료진료 했던 환자들이 연판장을 돌렸어요. 우리 지역에는 이철호 박사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지역 사람들이 난리를 치니까 이태섭 장관, 김동영 의원 같은 분들도 추천을 하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되니까 당시 여당에서 무조건 공천을 줬고,
그게 시의원이 된 계기가 됐어요.
3선이 되면서부터는 국회의원으로 가라는 충고와 권유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국회의원으로 갈 경우, 무료진료 받은 사람들이 표를 밀어줄 수는 있어도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남의 돈으로 정치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서 정치는 여기서 접어 두었다
‘유명 한의사 이철호’, ‘서울시의원 이철호’일 때도 그는 늘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글을 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한의학 서적뿐 아니라 소설, 에세이 등을 썼고, 실제 출판도 수십 권에 이른다.
한의학에 관한 실용서적, 시·수필·소설·칼럼집 등. 전부 합치면 70권이 넘는다.
그중에는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책도 여러 권이다.
사상의학과 관련한 《체질로 보는 남녀궁합》 《이제마1,2,3》이 있고, 《체질대로 삽시다》 《한방성의학1,2,》 《한방의학백과》는 한의학 관련 대표 작품이다.
수필집으로는 《당신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생활이 나를 속일지라도》 《사랑의 밤 너머에는 슬픈 아침이》 등이 있다.
살아생전의 소설가 김동리는 “작가 이철호는 보건학 박사로 이름난 한의학자이면서
소설과 수필 다양한 장르에서 전문가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이 쓰고 있다”고 문학관련 잡지인
《문학세계》에 언급한 기록이 있다.
현재 그가 문학관을 연 장소는 원래 이철호한의원 자리다.
약장 대신 책장을, 작두 대신 상패와 편지로 공간을 채웠다.
모두가 어렵다고 난리지만 종합문예지 《한국문인》을 10년 넘게 출간하고 있는 것도 문학에 대한
그의 식지 않는 열정을 느끼게 한다. 그에게 문학세계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초기에 쓴 소설에는 여성에 대한 폄하와 원망이 많았어요.
엄마라는 여성한테 배신당한 기억이 워낙 또렷했으니까요.
엄마는 이 세상에서 굉장히 위대하고 배신이란 건 없을 줄 알았거든요.
어렸을 때 의붓아버지와의 잠자리를 목격하고 엄마로부터 확실한 분리가 된 것이죠.
엄마는 그 후 동생을 4명 나았어요. 그것도 완전한 배신이었어요.
어릴 때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가 사는 집에 찾아가면 동생들과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오기도 했어요.
그런 트라우마가 있어서인지 일생이 고독한 것 같아요.
의학의 꿈도, 남자로서 정치인에 대한 야망도 다 이루고 나니,
마지막에 남는 건 역시 문학밖에 없더라고요. 그것은 저에 대한 구원이자, 저와 같은 사람에 대한 구원이기도 해요.
제가 죽은 후에도 풍운아
이철호에 대한 세인들의
기억을 돕고자 문학관 건립을 결심했어요.
앞으로 나머지 생은 문학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통로 역할을 해 주고 싶어요.
혹자들은 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하지만 난 그런 데 개의치 않아요.
또 몇 사람은 유언장을 써서 나한테 갖다 놓은 것도 있어요.
자기가 죽을 때 은행에 잔고가 있으면 이철호 문학기념관에 전부 기증한다고.
저 또한 제 소유의 재산을 문학을 위해 쓸 계획이고요.”
이철호 문학관에서는 매주 수, 금, 토요일에 문학강연을 한다.
사회에서 화려한 생활을 했던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이곳에 오면 모두 문학소년 문학소녀가 된다.
사춘기 때 이루지 못한 문학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 꿈을 이루려는 모습으로 그 열기가 뜨겁다.
그의 수강생들은 집에 있으면 아프다가도 이곳에 오기만 하면 아프지 않다고 한다.
또 아픈들 어떠랴. 명의(名醫)가 있는데.
그러고 보면 ‘이철호’라는 이름은 이제 몸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치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란만장 그대로인 그의 인생 역정을 꿰뚫는 철학이 있는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인간 이철호’를 이해하는데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의학보다, 문학보다도 더. 그는 마치 준비해 두었다는 듯 답했다.
“제가 퇴근해 집에 들어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이놈 저놈 푸념을 하면 집사람이 딱 한마디를 하곤 했어요.
‘당신이 청계천이나 이런 다리 밑에서 연탄장수 같은 걸 하면 누가 당신을 거론하겠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그만큼 똑똑한 인물이니까 구설수에 오르는 거고
당신도 그만한 인물이니까 그런 것이겠죠.’
집사람이 이러면 제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어요.
저는 아무리 화가 나도 10분 이상 끌고가지 말자는 생각이에요.
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꼭 금기어로 삼는 것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겁이 나거나 체면이 안 서거나 자존심이 상할라치면 미리 포기를 해 버려요.
인생을 살면서 절대 포기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떨어질 줄 알면서도 끝까지 도전의식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열 번이면 한두 번은 기적이 나오게 된다고요.
그걸 믿지 못했다면 오늘날 나는 없었을 거예요.
청량리에서 껌 팔고 구두 닦던 양아치 이철호가 교사가 되고,
한의사가 되고,
시의원이 되고,
문학관장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제가 생각해도 열 번이면 한두 번 나온다고 말했던 기적이죠.
‘포기란 없다’는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의 지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한의원 간판을 왜 문학관 간판으로 바꿔 달았는지를 이해할 것 같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고,
칠십을 넘긴 이제 화려한 명성을 뒤로하고
‘활인(活人)사업’을 시작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이해가 된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 마지막 장면이 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13.8월 월간조선
이재은 기자에서
첫댓글 정말 파란만장 화려한 삶을 사셨네요 앞으로도 많은 환자들 고쳐 주실 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