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 매화 완상
이월 첫째 목요일 아침나절은 집에 머물면서 해방 이전 우리나라 문단 주요 인사들의 행적을 수록한 김남일의 ‘염치와 수치’를 읽었다. 독립운동에 몸 바쳐 감옥에서 차디찬 주검이 되어 나온 이육사가 있었는가 하면 이광수는 창시 개명해 천황 폐하 총알받이가 되자고 독려했다. 나혜석은 그림도 소질이 있어 그 당시 프랑스로 건너가 최린과 염문을 뿌리기도 한 신여성이었다.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봄기운이 얼마큼 번지는지 살필 산책 걸음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 반송 소하천을 따라 원이대로로 나갔다. 대방동 종점을 출발해 백월산 밑으로 가는 14번 버스를 타려고 했더니 그보다 먼저 고암마을을 둘러 가는 13번 버스가 와서 타게 되었다. 시내를 벗어나 굴현고개를 넘어간 지개리에서 대한마을 앞을 지나 고암마을을 거쳤다.
무학산을 거쳐온 낙남정맥은 천주산과 구룡산에서 창원 컨트리클럽 골프장 능선에서 정병산으로 솟구쳐 올랐다. 구룡산이 북으로 뻗친 한 갈래는 백월산에서 바위 봉우리가 뭉쳐 기도처가 되어 신라적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등신불이 된 삼국유사 설화를 남겼다. 14번 버스는 백월산 밑 남백마을로 가는데 13번 버스는 승산마을에서 화천리로 나가 마금산 온천장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승산마을 못 미친 승산분교장에서 내렸다. 시골로 귀촌해 전원생활을 누리는 그림 같은 집이 몇 채 보였다. 폭이 좁은 길을 따라가니 잉애터마을 이정표가 나왔다. 잉아(孕兒)의 ‘아’가 ‘l’ 모음 역행 동화로 잉애였다. 낮은 산자락 아래 위치한 마을이 여자의 아기집 형상이라고 잉애라고 불리었는데 고암에 딸린 작은 마을이었다. 예닐곱 가구라 마을 회관을 갖추지 않은 동네였다.
견공도 짖지 않는 적요한 마을 앞을 지나니 산기슭은 온통 단감농원이 펼쳐졌다. 과수 농사는 겨울은 농한기라 인적이 없어도 봄이 오면 뿌릴 두엄 포대가 쌓여 있었다. 구룡산이 뻗쳐온 산등선이 백월산으로 건너가는 잘록한 산허리를 넘으니 행정구역은 북면에서 동읍으로 바뀌었다. 그곳도 역시 산자락은 단감농원 일색이었다. 비탈을 내려서니 화양마을 어귀에 초등학교가 나왔다.
화양초등학교는 지난해 여름까지 내가 잘 알고 지내는 대학 동기가 교장으로 재직했다. 동기가 명예퇴직한 후임도 역시 같은 학번이라는데 여 교장이라 나는 모르는 사이다. 초등학교에서 화목마을로 갔더니 신설되는 국가 지원 30번 지방도 교차로가 나왔다. 교차로 근처에는 분재원이 있어 비닐하우스 내부를 살폈더니 사람 손길에 다듬어진 분재들이 가득 채워져 눈요기를 잘 했다.
분재원에는 대형 비닐하우스가 서너 동 되었는데 한 곳에는 농장주 내외가 택배 포장에 여념이 없었다. 아까보다 더 기화요초 분재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는데 철이 철인 만큼 단연 매화 분재가 눈길을 끌었다. 옹글어지고 비틀어진 고목 둥치는 성글게 뻗친 가지에 매화가 송이송이 피어 그윽한 향기를 뿜었다. 홍매를 비롯해 만첩 백매와 명자꽃 분재까지 눈과 코가 호사를 누렸다.
분재원 주인장은 기업형 농사로 가꾼 갖가지 종류 분재를 경매에 부쳐 전국 각처 구매자에게 택배로 배송했다. 잠시 쉬는 틈새 안주인은 초면의 방문객에게도 커피를 타 주어 넙죽 받아 마셨다. 여러 점의 매화 분재를 완상하고 사진으로도 담아 지기들에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나는 뜰에서나 베란다에서 화초를 가꿀 여건이 못 되어 산천을 주유하면서 꽃 소식을 전해 드린다고 했다.
분재원을 나와 신설 30번 지방도로 올라섰다. 동읍 덕산 교차로에서 화목까지는 중앙 분리대와 차선을 그어 놓아도 미개통 구간이었다. 차량이 한 대도 다니질 않는 포장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걸으니 주남저수지 건너는 진영 신도시 아파트가 드러났다. 다호터널을 통과하니 현장 인부들이 천정의 전등 가설 공사를 하고 있었다. 동읍 사무소 앞에서 1번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23.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