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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英親王) / 이왕(李王)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즉 순종황제 다음으로, 만약 경술국치가 없었거나 해방 이후 왕정복고가 되었더라면, 대한제국 제 3대 황제가 될 뻔한 인물이자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이왕. 고종황제의 7남으로, 순종황제와 의친왕의 이복동생. 종묘에 모셔진 마지막 조선왕족.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적인 시호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2. 호칭 관련
2.1. 친왕은 틀린 호칭이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통칭은 고종이 황제가 된 후에 받은 왕호인 '영친왕'으로 굳어져 있는데, 간혹 '친왕'이 일본식 칭호이기 때문에 '친왕'에서 '친'을 뺀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부인인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영친왕'은 잘못된 호칭이니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실 친왕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황제국의 제도이고, 대한제국도 이에 준하여 제도를 정했으므로 '~친왕'을 가리켜 틀린 호칭이라고 하는 주장이 잘못된 셈이다. 실제로 기록상 '영왕'이라는 칭호로 부른 사례는 '영친왕'이란 칭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고 단순히 '영친왕'을 줄여 부른 것일 뿐이다. 중국 이야기를 예로 들면, 청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을 줄여서 예왕(睿王)이라고 부르곤 한다. 고종실록에서 간단히 '영왕'이라고 기록한 사례도 있으나, 대한제국 시절 왕부에서 사용하던 도장에서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또한 영친왕 본인도 스스로 '영친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영친왕이 9살일 때(1905년) 쓴 글에도 스스로 '영친왕'이라고 서명하였으며, 여기 찍은 도장에도 역시 '영친왕인'(英親王印)이라고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2.2. 그런데 '영친왕'은 문제가 된다? 왜?
하지만 '영친왕'이라는 호칭은 다른 이유로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영친왕' 칭호는 황태자가 되기 전에 쓴 것이었기 때문. 정식 황제국 체제를 오래 경험하지 못한 한국 역사를 볼 때, '친왕(親王)'과 '황태자(皇太子)'의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쉽게 말해 '친왕'은 일반 황자일 뿐이고, '황태자'는 '친왕'보다 격이 훨씬 더 높은 '황제의 유일한 후계자'다.
그래서 영친왕이 황태자가 된 직후 영친왕 작호는 폐지되었고 이후 영원히 공식적으로 쓰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영친왕으로 기억하는 걸까.
그가 살면서 역임했던 공식 작위는 '영친왕(英親王)', '황태자(皇太子)', '이왕세자(李王世子)', '이왕(李王)'이다. 그런데 이 중 '황태자'와 '이왕세자', '이왕'은 보통명사로 어떤 한 개인을 콕 찝어서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당대에 그 지위에 해당하는 사람이 한 명일 뿐, 시대에 따라서 해당되는 사람이 계속 변한다.
해당 지위에 있을 때는 그 지위대로 불렸으나 문제는 해방 이후다. '이왕세자', '이왕'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잔재로 흑역사 취급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고 그렇다고 황실 복원이 아닌, 민주공화정 체제가 들어선 마당에 그냥 '황태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그런데 '영친왕'은 고유명사로 그 만을 따로 지칭해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잊혔던 영친왕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의민황태자', '의민태자'로 부르는 것이 맞지만 이 '의민'은 공식적인 시호가 아니라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바친 사적인 시호이기 때문에 또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면 순종황제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호칭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 멸망 후 대한민국이 들어선 뒤에 죽어 사시를 받았지만, 실제 대한제국이 존속했을 때 황후였기 때문에 별 다른 문제없이 순정효황후로 잘 불린다. 그렇다면 '의민황태자'로 부른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다.
백과사전 등에선 일반적으로 '영친왕'으로 등재되어 있고 본 항목의 예전 명칭도 '영친왕'이었으나 위키백과는 이 점을 신경쓴 건지 '의민태자'로 등재했으며 이 문서의 이름도 2018년 1월 17일 '의민태자'로 변경되었다.
3.1. 태자 책봉과 결혼
늦둥이인 것도 있지만,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 엄씨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문제가 있었던 이복형인 의친왕을 제치고 1907년 황태자에 택봉된다. 의친왕이 문제가 많아서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서 힘을 써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당시 내명부에서 가장 직책이 높았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는 직첩도 보잘 것 없었는데다 오래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
당시 순종황제가 즉위한 상태였으니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황제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위에선 물러났어도 실질적인 황제는 고종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했다. 당시 유학자들은 "황태제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고종은 조선에서도 태종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할 때에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 자격으로 받았다는 전례(…)를 인용하며 황태자로 하길 고집했다. 어째 왕조의 시작과 끝이 유사하다 순종이 독차사건 등의 후유증 등으로 인해 사실상 자신의 핏줄로 후사를 잇지 못하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순종보다는 고종의 영향력이 더 컸다. 순종 행장에는 이와 관련하여 "(순종) 황제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정종(定宗)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정종(定宗)이 아우인 태종(太宗)을 세자로 책봉(冊封)한 것이 우리의 왕가의 옛 법이라고 여겨서 드디어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두텁게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행장 특유의 고인을 존중하는 서술인 것으로 보이며, 영친왕이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로 책봉된 일은 사실상 고종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결과라고 보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종황제가 강제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으나 국력이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으니 그 해 일본인들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 철저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강제로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했다. 보통 정략결혼인 경우 당사자들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방자 여사와 의민태자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일본에 인질로 붙들려 있었을 때, 의외로 메이지 덴노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아들이 여러 가지로 모자란 면이 많은 데 반해 꽤 총명한 아이였던 의민태자를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 그래봤자 인질. 하지만 나중에 군 장성이 되는… 일단 왕공족, 그것도 조선 이왕가의 수장으로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기에 생활은 유복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 황족들은 매월 궁내성에서 주는 일정한 생활비 외에는 돈줄이 없었지만 영친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들의 관리기관이던 이왕직에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다. 덕분에 영친왕을 부러워 하는 일본 황족도 있었다고(…). 그러나 태평양 전쟁 이후엔 그런거 없다(…).
그가 황태자로 책봉된 건 전혀 행운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뿐인 황태자이고 어린 나이에 일본에 볼모격으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야 겨우 고국에 돌아오는 고통뿐인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민태자의 일본 생활은 앞서 말했듯이 이왕직을 승계한데다, 현역 일본 육군 중장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실제로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향수와 지독한 고독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공기에나 쓸 하얀 조약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 큰 어른 방에 있을 듯한 물건이 아니라서 물어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답하길 "어릴 적 고향이 너무 그리워 조선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 고종은 물론 어머니 엄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 그나마 순종 사후에 이왕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도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제사는 지낼 수가 없었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종묘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생활 속에서 몇십 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단 희망과 의지는 놓지 않았는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억양, 문법 모두 틀리지 않고 말이다.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동기생들과 함께 의민태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앞선 주석에 설명됐듯 의민태자는 허울 뿐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론 조선 총독보다 높은, 조선의 대표자였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어르신이었던 셈. 의민태자는 조선인 생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실내에 조선인밖에 없는데도 일본어로 격려를 해주어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 날, 다시금 의민태자를 찾아갔을 때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를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혼잣말을 하며 한국어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평도 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붕어 후 하루 뒤, 순종이 일제강점기 때 갖게 된 이왕(李王) 직위를 계승한다. 이왕가는 일본 왕공족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호도 갖고 있었는데, 순종이 갖고 있던 쇼토쿠노미야(昌德宮)의 호칭도 이때 받는다.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년 중에 종묘의 제사가 있던 며칠 간 뿐이었고 거의 대부분을 도쿄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동경(東京) 이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은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아리랑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추적 결과 이 아리랑 영어 번역자가 바로 의민태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국은 광복이 되고서도, 정치적인 입장과 분단으로 그를 받아주지 못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군의 연대장과 사단장을 역임한 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 중장으로 제1항공군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일제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는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이 때문인지 무난히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했고, 1935년까지 대령으로 무난히 진급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단지 정치적인 이용물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또 사귄 이들도 진심으로 사귄 자들은 없었는지 일제가 패망하고 생활이 어려워지고 그가 점점 고독해질 무렵 찾아오는 이는 커녕 큰 사기를 당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손실을 보고 물질적으로 궁핍해진다. 사실 귀족제가 폐지되고 대부분이 전범 등으로 권력을 잃은 판에 누가 그를 도울 수 있었겠는가.
이 때 기록에 따르면 이방자 여사를 만나러 온 한 여인이 집에서 누군가가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의민태자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누가 왔는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었으며 그녀가 나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민태자에게서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으로도 괴로워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 왕족 취급을 했고 조선에서는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그 중에서 의열단 출신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역임한 박건웅은 "동경의 이왕 민족반역자인데 왜 광복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같은 전주 이씨인 이승만은 그를 증오하다 못해 아예 귀국 자체를 못하게 막아 버렸다.
한국전쟁 시기에 노획한 북한군 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병준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북한군에서는 육군대학 출신의 의민태자가 남한으로 귀국하여 남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직접 군을 지휘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고려를 했다고도 한다. 양녕대군의 후손이었던 이승만의 성격상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만일 이루어졌다면 흠좀무. 한국전쟁 전후의 역대 육군참모총장들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일제 연간에 위관급 하급 장교출신들이었다. 그런데 의민태자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한 군사대학이었던 일본육군대학 졸업자이긴 했다.
물론 일본군에서는 대개 어지간한 황족이면 모두 장성 계급에 있었으며, 이것은 실제 야전군 사령관이 된 두어 명을 제외하면 실제 지휘능력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왕공족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당시 왕이나 공이란 칭호를 받은 조선의 왕족들은 일본의 방계 황족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다만 의민태자는 제1항공군 사령관 등 대규모 제대의 지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시 남북한 군부 인사를 통틀어도 사단급의 지휘 경험조차 한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는 걸 고려하면 최소한 다른 장교들보다는 나았을 지도 모른다.
이승만은 해방 후 이왕가의 재정 정리를 맡은 황손 이청 정도만 미관말직을 내줬을 뿐, 나머지 황족들에 대해선 아무 배려가 없었다. 이왕가 재산은 모조리 국고로 귀속시켜 한국전쟁 이후 구 황실의 사유재산이라곤 사동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의민태자는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아내 이방자에게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 내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공식적으로 국적이 없는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 이후 1947년 GHQ의 조치로 이왕직이 폐지되어 결국 평민으로 격하당했다.
의민태자 측은 광복 직후와 1948년에 조선으로 가겠다는 요청을 했지만 전자 땐 미군정이, 후자 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승만 정부는 의민태자나 순정효황후 윤씨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이우에 대해 조금 호의적으로 반응했는데, 이에 대해선 2가지 추측이 있다. 자신의 혈통과 그에 따른 영향력이 그들에 비해 밀리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대했다는 말과, 어쨌든 독립운동가였으니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직계 황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런 거라는 말이 있다. 이승만 정부에선 의민태자가 일본 황족으로 살아간 것은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여 '의민태자는 일본인이 되었다'고 법률을 해석하여 그의 귀국을 거부하였다. 물론 일본 정부에서는 호적을 기준으로 의민태자 부부를 한국인으로 보았으므로 부부가 모두 무국적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6.25 전쟁 중 실제로 왕정복고를 꿈꾸며 그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주동자는 이유립. 환단고기의 그 사람 맞다.(...) 1952년 7월 12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유립은 청주대학교 상과대학 학생 이용하와 함께 1951년 8월 경 '재일조련선전부(在日朝聯宣傳部)'의 지령을 받아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해 같은 해 9월 초에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은밀하게 회원들을 모집하고 '불구레문화사'란 간판을 내걸어 위장한 다음, 일본에 있던 의민태자를 국가 수령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나라 이름은 대달(大達), 국가(國歌)는 신가(神歌), 연호는 개벽(開闢), 그리고 국화(國花)는 진달래로 정했으며 국기 역시 태극기에서 사괘를 뺀 뒤 중앙에 연한 검은색 원을 두고 바탕을 황색으로 정한 국기를 사용하기로 정했다. 그 다음 의민태자에게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여 이용하를 시켜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구포(龜浦)에 피난와있던 순정효황후에게 전달하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중부경찰서 사찰계원에게 적발되었다. 그리하여 이유립, 이용하를 포함하여 노동당원 노봉우, 통관업자 홍성도, 사주업자인 이석영, 한독당 대전시책인 박헌철 등 일당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수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5년 뒤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의민태자가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까지 벌어지면서 이승만 정부는 의민태자를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그러다 1957년, 유학 가 있는 아들 이구를 보러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발생한 여권 문제 때문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선 그에 대한 반감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의민태자는 나중에 김을한 기자를 통해 밝히기를, "국적 같은 것은 나중에 다시 쉽게 회복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고 술회하며 일본 국적 취득이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왕공족으로 있으면서 법제 등에 대해 무지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55년에는 여동생인 덕혜옹주를 이혼시켰는데, 정신질환자인 덕혜옹주의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에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 합의를 그와 아내인 이방자가 대신 진행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완전한 평민이 된 의민태자와 이건 모두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결국 경제적 이유로 이왕가저(邸)를 일본 사업가에게 매각했다. 그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주일한국영사관 부지로 이왕가저를 사려고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그의 한국에서의 평판은 더 나빠졌다. 이 시기에 따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는 이방자 여사의 친정 나시모토 가문과 몇몇 재일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간간히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였던 애신각라 부걸과 사가 히로가 종전 이후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던 것과 달리, 종전 당시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전범으로 취급받지 않고 일본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만주국에서 실권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일에 관여했던 부걸과 달리 의민태자는 이미 망해버린 대한제국의 황족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일본 밖에 있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1961년에 이구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들렀다 일본으로 귀환하던 중 뇌일혈이 재발, 이후 의사 소통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 박정희의 지원으로 1963년이 되어서야 혼수상태인 채로 56년만에 겨우 한국에 오게 된다. 당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하와이의 이승만 귀국은 불허한 대신 (이건 제2공화국도 마찬가지)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배풀었는데 그런 사례 중 하나다.
1년의 병상생활 끝에 퇴원한 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일반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가에서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300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7년 후인 1970년 5월 1일 사망하였다. 향년 74세. 만약 순종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를 그대로 계승했다면 재위 44년째였을 것이다.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의민태자의 유해를 모신 재궁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아버지와 형이 안장된 홍릉·유릉 능역으로 운구되어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왕릉 최후의 능원에 묻혔고 신위는 종묘에 모셔졌다. 대한제국 시대 황태자의 무덤이 조영된 적이 없었으므로 의민태자의 무덤을 조영할 때 어떤 무덤을 전례로 따를 것인지 논의한 결과 문조의 수릉을 전거로 삼았다. 조선 시대 왕세자의 원(園) 중 가장 나중에 조영되어 시기상 가장 가까웠으며, 뒷날 왕과 황제로 각각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주 이씨 종약원에 의해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로 추존되었다.
참고로 장례식 때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문을 왔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이종사촌 여동생인 세츠코(勢津子) 비,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
생전에는 구 황실에 대한 일말의 예우심과 맞물려 동정적인 시각으로 보여졌으나, 한국 왕공족과 일본 황족을 상징적으로 묶어놓은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 이후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의민태자를 매국노로 여겼으며, 이는 공화정에 반대하던 복벽파의 몰락을 야기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독립신문은 국권을 빼앗고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 나라에 장가를 들었다고 하여 정면으로 금수라는 멸칭을 붙였으며, 독립운동가 서상한은 의민태자 부부를 폭사시키고자 사제폭탄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다. 이들 부부의 큰 아들 이진의 독살설을 뜬 소문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생후에도 일본군 중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일본 정부로부터 매달 돈을 받고 지냈다는 것, 나아가서 중일전쟁 시기에는 화북 등 주요 전선에서 선전활동을 주임무로 복무한 것이나 일본 본토 후방 방위를 담당하던 제1항공군 등의 지휘를 맡았다는 점,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제의 선전활동에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고, 의민태자만이 아니라 여러 왕공족이 비슷한 활동을 했고 군인으로서의 계급도 높았기 때문에 왕공족을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왕공족에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왕공족은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는지 유무로 친일파인지를 판단했는데, 의민태자와 이우는 사실상 일본의 볼모로 끌려간 처지를 감안해 제외되었다. 실제로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볼모였으니…
위에도 어느 정도 적혀 있지만, 그가 일본 군인이 된 건 사실상 강제나 다름없었다. 그는 일본에 온 뒤 일본 귀족급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선 귀족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인 교육을 받았다. 이에 따라 육군유년학교 예과에 진학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으니 사실상 다른 학교로 가는 거 자체가 어려웠다.
